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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길례언니 - 최순희

Joyfule 2005. 4. 23. 04:30

] 길례언니 - 최순희

“길례언니를 꼭 닮았습니다…….”

화가이며 수필가인 일현 선생님이 불쑥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 옆자리의 언니도 흠칫 돌아보았다. 언젠가 언니는 이제 길례언니 얘기는 그만 쓰지 한 적이 있었는데, 그제서야 나는 과연 많이 발표하지도 않은 글 속 두어 군데서나 길례언니를 들먹였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때 이후 나는 오히려 내 안에 정식으로 두레박을 드리워 한번 길어올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다. 천경자 화백의 글 가운데 수채화 붓자국처럼 언뜻언뜻 스쳐 지나간 ‘길례언니’가 대체 내 무의식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길래 아련한 연둣빛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절로 따라나오는 이름이 되었는지 나도 궁금했었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자리에서 뜻밖의 말을 듣는 기분이라니.

당황해 하는 내 마음을 잘못 읽었는지 선생님이 덧붙였다.

“일견 화사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얼굴에 한(恨)이 있어요. 나는 화가예요. 내 눈은 못 속이지요…….”

설마 한이랄 것까지야. 어쨌든 내 마음 속 그늘을 잘못 들켜버린 듯한 느낌에 오후 내내 말이 헛나오곤 했다.

길례언니. 어느 해 가을 천경자 화백의 그림전에서 처음으로 길례언니를 보았다. 예전에도 또다른 전시회에서 보았을 법도 하나 기억엔 없고, 내게 남은 길례언니의 인상도 실은 그의 글에서 연상된 이미지가 전부인 터다. 큼직한 이목구비에 챙 넓은 흰 밀짚모자, 그 위에 풍염하게 얹힌 장미꽃, 턱을 고인 손가락의 섬세한 표정, 노란 블라우스의 화사함. 뜻밖에도 화안하고 도시적인 여인인 것이 길례라는 이름에서 상상해온 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하긴 ‘안으로 삼키고 삼켜서 때론 한으로 응어리지기도 하고, 때론 아련한 환상으로 채색되어 차라리 화려처염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그의 그림의 마력인 터이다.

기억의 연상작용이란 참으로 개인적이고 불합리한 것이어서, ‘길례언니’ 하면 내 십대와 이십대의 종로나 광화문 풍경이 활동사진처럼 떠올라 눈앞을 지나가곤 한다. 가령 중학교 입학 시험날, 담임선생님이 떡만두국을 사 주신 나직한 청진동 한옥 같은 것. 만두국을 날라오던 아줌마의 얼룩덜룩한 금박 무늬 한복 저고리, 소매 끝동에 묻은 고춧가루, 또 노란 알루미늄 쟁반에 환칠하듯 벌겋게 찍힌 꽃. 그때까지 떡만두라는 걸 먹어본 적 없었던 나는 추운데 마른 떡 같은 것 말고 아무거나 국물 있는 걸로 먹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말은 못하고, 윗목에 개켜진 이불의 큼직한 목단꽃 무늬만 무연히 쳐다보았었다.

고등학교 적엔 무교동의 무과수 제과에서 어떤 아저씨가 사 주는 고로케를 자주 얻어먹었다. 고교 일 학년인가 이 학년이던 어느 날, 국어 선생님의 지시로 한 신문에 짤막한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때 원고와 사진을 받으러 왔던 시인이라는 기자였다. 그가 신문을 가져온 날은 나는 검정 무용복에 검정 타이츠 차림으로 막 강당으로 뛰어가던 참이었다. 사진이 별로 예쁘지 않게 나와서 유감이라는 그에게 괜찮아요, 생긴 대로 나왔는데요 뭘, 하며 웃었는데 그게 인상적이었던가. 그 다음부턴 예술가처럼 베레모를 멋부려 쓴 어른이 하학길의 무교동 길에 우연처럼 나타나 자꾸 빵을 사 준다는 바람에 쑥맥 같은 나는 어른의 친절을 거절하면 안 되는 줄 알고 하는 수 없이 따라가 얻어먹곤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갈 때까지도 그와는 이상하게도 무과수 제과 앞이나 종로 복떡방 근처에서 자주 마주치곤 하였다. 아무개가 너댓 살만 더 먹었더라도, 하고 한숨을 푸욱 내쉬곤 하던 걸 보면 그는 일종의 로리타 콤플렉스 비슷한 것을 내 쪽을 향해 품고 있었던 것일까.

내게 길례언니 얘기가 들어 있는 천경자 수필집을 처음 사 준 이도, 나중에 미국으로 떠날 때 다시 그의 『한(恨)』과 그 무렵 갓 나온, 우송 선생님의 최초의 장편 수필을 사 준 이도 그 아저씨였다. 그는 눈시울까지 붉히며 어디 가 살든 물기 있는 글을 쓰거라, 하여 연인과의 이별만 슬퍼하던 나를 미안해지게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돌아온 첫 가을, 모든 것이 그립고 정답게만 다가드는 향수에 젖어 나는 ‘창자 속 같은 옛날 거리’를 기억을 되짚으며 하염없이 걸어다녔다. 독일 빵집은 없어졌지만 무과수 제과와 그 옆의 장의사는 그대로 있고, 종로 복떡방도 내가 좋아하던 연노랑 녹두 고물 빛깔도 그대로였다. 아무 건물 옆댕이로나 슬쩍 접어들면 매운 낙지볶음 냄새, 파마 머리의 아주머니가 밖에 화덕을 내놓고 굽는 청어 냄새가 났다. 옛 모교는 강남으로 이사간 지 오래라지만 종로통 풍경은 크게 변함없는데, 난데없이 나타나 나를 당황하게 하던 그 아저씨는 만나지지 않았다. 어느 십일월 아침, 종로 장의사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옆에 선 남자의 카키색 웃저고리 밑단에 허연 헝겊이 너풀거리는 게 보였다. 저게 무얼까 유심히 살피니, 아파트 동 호수가 적힌 헝겊이었다. 세탁소에서 찾아온 그대로 급히 입고 나온 게 분명했다. 챙겨줄 아내도 누이도 없는 남자의 서글픈 일상 같은 것이 확 달겨들면서, 갑자기 이 가을도 깊었구나 하는 생각에 추연해졌다. 말해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도 무안 탈세라 말도 못한 채 몇 걸음 뒤따라가다 멈춰 서 버렸다. 그때 바람이 휙 불어왔고, 가로수의 은행잎이 내 머리위로 노란 색종이처럼 우수수 흩날렸다. 멀어져 가는 남자의 뒤꽁무니에 달린 헝겊도 덩달아 너풀거렸다.

길례언니가 화가 천경자에게는 본래 어떤 의미였든, 내겐 이런 가버린 시간 속의 화사하고 쓸쓸하고 아늑한 기억들의 총체적 상징으로서 점점 더 커져가며 존재하는 듯하다. 팔랑거리며 땅으로 돌아가는 잎새를 눈으로 좇느라면, 내 안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거미줄에 걸린 풍뎅이처럼 푸르르 떨며 수면으로 솟구치려 한다. 내게 무언가를 말해 줄 듯 말해 줄 듯 싶지만 애써 길어올려 봤자 덧없기 그지없는 한낱 기억의 자투리들. 그러나 그런 자투리의 조각보 이상으로 이제 내게 더 중요한 게 무엇 남아 있나 싶기도 하다.

내가 길례언니를 보러간 날은 전시회 마지막 날이었다. 개관 이래 최대의 인파였다는 여성 관객들도 대부분 빠져 나가 갤러리 안은 호젓했다. 길례언니 프린트를 한 장 사고 싶었으나 동이 난지 오래였다. 대신 그림엽서를 사와서 딸아이에게 보여 주니 “어, 엄마잖아?” 했다. 으응? 하며 다시 들여다 보았지만 내 눈엔 그저 단발머리 정도가 닮았을까. 아이는 풍염한 꽃모자와 턱을 고인 손등의 느낌, 아무튼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딘지 나와 닮았다며 “정말로 아니야? 그럼 누구야?” 했다. 으응, 길례언니, 하고는 엽서로 써버리기엔 아까워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것인데, 일현 선생님에게 길례언니 얘기를 들은 다음부턴 고운 액자에 넣어 책상 옆 벽에 걸어두고 있다. 글을 쓰거나 작업을 하는 간간이 올려다 보면, 글쎄, 현실과 몽환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무렵의 나와 얼마간 닮은 듯도 하다. 꽃분 같은 노란빛에 둘러싸여 잠잠히 나를 굽어보는 여인은 이제는 거울 앞에 돌아와 앉아 있는 것일까.

얼마 전 집에 놀러왔던 딸아이의 친구도 “아, 너네 엄마구나?” 하더라던가. 아이는 자기가 잘 모르는 먼 외가쪽 친척인가 보다고, 그래서 닮았는가 보다고 멋대로 생각하면서 저도 “으응, 길례언니래” 한 모양이다.



천경자화백의 "길례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