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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식 중독에 빠진 우리네 교회

Joyfule 2019. 9. 6. 09:35



 
    예배의식 중독에 빠진 우리네 교회



매년 연말의 자정에 가까울 무렵이 되면 교회마다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말씀 뽑기를 한다.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시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는 물론 주일에도 오전에 드리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또 예배를 드린다. 또한 구역마다 근처에 살고 있는 교인들이 모여 구역예배를 드린다. 심지어는 새벽기도회에도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30분이지만, 기도하는 시간은 10~20분에 불과하다. 새벽에 예배를 드리러 나왔는지, 기도를 드리러 나왔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일주일에 10번이 넘는 예배가 드려진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배는 주일 11시에 드려지는 대예배이다. 이 예배에 참석을 해야 주일성수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예배, 소예배를 나누는 이유가 무엇인가? 큰 예배, 작은 예배가 있다는 발상은 섬뜩하고 기이하기조차 하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동일하지 않은가?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크고 작은 의미로 나누면서 드리고 있으니 기가 막히다. 예배시간 전에 드리는 찬송을 준비찬송이라고 부른다. 예배 의식를 준비하는 찬송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찬송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라면 예배와 같은 의미가 아닌가? 그런데 예배의식을 드리려고 준비하는 찬송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예배의 의미에 무지하다는 증거이다.

 

우리네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정확하게 말해서 예배가 아니라 예배의식이다. 즉 종교적인 의식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의식자체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게 아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한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우리네 교회는 예배의식에 참석했는지의 여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믿음이 있는지를 측정하는 도구로 삼고 있으니 기가 막히다. 우리네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의식은 성경에 없다.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을 죽여 번제로 드리는 제사가 있었으며,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더 이상 죄의 용서를 비는 구약의 제사법이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예배의식이 생겨났다. 구약시대의 명절에 하던 기도와 찬송에다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성만찬의식을 토대로 시작하였으며, 시대와 지방에 따라 크고 작은 행사들이 들어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성경공부의 강조로 설교시간이 예배의식의 중심에 들어간 게 중요한 예이다. 이렇게 생겨난 예배의식자체가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의 명령은 아니다. 그렇다고 필자가 우리네 교회의 예배의식을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영성학교에서도 이러한 예배의식을 드리고 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배의식에 참석한다고 예배를 드린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네 교회에서는 기형적으로 예배의식을 많이 만들어서 시행하고 있다. 그래서 예배의식에 성실하게 참석하면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잘 드리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게 심각한 문제이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3,24)

 

위의 말씀은 우리가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는 우리네 교회에서 시행하는 예배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네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로 마치는 1시간짜리 예배의식을 예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이러한 예배는, 예배(worship)가 아니라 예배의식(worship service)일 뿐이다. 예배의식은 단지 껍데기일 뿐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과 자세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육체의 눈으로 사람들의 신앙행위를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속내와 동기와 목적을 날카롭게 살펴보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시간에 경건한 모습으로 앉아서 찬양을 부르고, 대표기도에 동의하고 설교를 진지하게 듣고 큰소리로 아멘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예배와는 별개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에서의 예배의식에 성실하게 참석한다면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성경을 찾아보라. 작금의 우리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의식을 시행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필자가, 그런 예배의식이 성경에 없다고 시행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마음의 자세와 삶의 태도가 없이, 예배당에 앉아 경건하게 앉아있다고 해서 예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에서는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예배의식에의 참석이 성실한 신앙생활의 척도로 삼고 있다. 그래서 속마음이 감추어진 껍데기뿐인 신앙인들을 양산하고 있다.

 

수가성 여인에게 하신 위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두 가지 조건은 영과 진리이다. 헬라어 원어로는, ‘프뉴마토스 카이 알레데이아라는 구절로서 영혼과 진리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행위나 겉모습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로 평가하신다. 영혼의 창()은 마음이고, 마음의 창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자는 진리로 드려야 한다. 진리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라고 말씀하셨다. 예배란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로서, ‘절하다’ ‘경배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오직 예수님만을 예배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의식에 참여하는 목적이, 예수님을 예배하는 게 아니라 세속적인 축복을 바라거나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1,2)

 

여기에서 소개하는 예배라는 헬라어 단어는 위의 프로스퀴네오가 아니라, ’라트레이아이다. 이 단어의 뜻은 제사이다. 구약의 제사법에는 소나 양 같은 제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나 양을 성전에 끌고 와서 죽여서 제사장에게 넘겨주면, 제사장이 불에 태워 번제로 드렸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없다.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는 자리에 경건한 모습으로 참석하여 서 있기만 해도 되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짐승을 불에 태워 드리는 구약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님이 영원한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후에는,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죄다 죄가 용서함을 받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는 걸까? 아니다. 성경은 이제부터는 우리가 살아있는 제물이 되어, 영적 예배(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상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위의 로마서의 말씀은 하도 유명한 구절이라, 모르는 이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말씀대로 사는 이들을 찾기 어렵다. 여전히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의식에 성실하게 참석하려고 하지만, 정작 삶의 현장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 아는가? 작금의 교회에서는 1분짜리 영접기도를 마치고 주일성수를 하면 천국은 따 논 당상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약속이 결코 없다. 만약 그랬다면 천국의 자격이 녹록치 않다는 다른 말씀과 충돌되고 있으며,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상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인들은 눈을 가리고 귀를 닫은 채, 담임목사의 머리를 타고앉아 조종하는 귀신들의 소리를 들으며 천국을 철썩 같이 믿고 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살아가려면, 이 세상을 본받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고 추구하지도 말아야한다. 그리고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 뜻대로 삶에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눈을 뜨고 있으면 세상의 유혹이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온다. 상품을 팔아 이들을 보려는 자들은 온갖 광고매체를 통해, 먹고 마시며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게 태어난 목적이라고 세뇌시키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 인생을 바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세상 사람들의 인생관을 버리고, 마음을 새롭게 바꾸어서 철저하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성경은 그 모습이 진정한 영적 예배라고 말하고 있다. , 영적 예배는 짐승을 드리던 구약의 제사가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리는 제사(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고 드높은 교회직분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의 예배의식에 성실하게 참석하고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더라도, 돈을 사랑하며 자신을 사랑하여 육체의 쾌락을 즐기려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이들이 허다하다. 이들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주일이 아니라 평일에,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 지를 찬찬히 살펴보면 된다. 이는 쉬지 않고 기도하라는 사도바울의 권면과 맞닿아 있다. 쉬지 않고 기도하려면, 혼자 있는 시간이면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며 찾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세상에 나가면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주일이면 예배시간에 맞추어 허겁지겁 달려 나오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이런 이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될 수 없다. 단지 기독교를 믿는 종교적인 사람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일은 결코 없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라. 작금의 우리네 교인보다 율법지식에 해박하였고, 그들의 희생적인 신앙행위는 우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외 없이 지옥에 던져졌다. 그런데 우리네 교인들이 어떻게 천국을 자신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자로 살 것을 결심하고,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들어갈 것을 꿈도 꾸지 마시라.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삶을 결심하시고 삶에 적용하시라. 그 길만이 당신과 가족의 영혼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