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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애 - 그리스도의 교육방법의 원칙

Joyfule 2007. 8. 19. 00:10

그리스도의 교육방법의 원칙

이제 우리는 그의 특수한 교육방법으로부터 시선을 옮겨 그 일반적인 원칙을 연구해 보자. 첫째,그의 교육은 무엇보다도 권위가 있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대로 [무리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마7:28).예수님의교훈에는 [아마]라든지 [그럴 것이다], 혹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등의 불확실한 상상적인 이야기는 없다. 언제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와 같이 자신의 말슴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명확히 했다.[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는 말은 서기관들은 항상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라든지 [랍비 000는 이렇게 말했고, 율법과 예언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인용했다.

이렇듯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이름과 의견을 자신 있게 밝히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종교는 낡은 책에 의존하는 종교였다.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서 말하게 되는 종교였다. 서민층까지도 그 종교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온 대변이라는 것을 알았고,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느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서기관들을 매우 멸시하고 있었다. 에머슨이 세네카(로마 철학자,B.C.54-A.D.39?)를 평가한 말이 서기관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그는 자기의 사상을 자기 스스로 말할 수만 있었다면 대단히 훌륭한 사상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왜냐하면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릴리 나사렛 사람 예수님에게서는 새로운 말씀이 흘러나왔다. [옛 사람도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이렇게 그는 서기관들의 사상과 그 처지를 일축해 버리고 전설을 기초로 삼고 있는 그들의 사상을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옮겨 놓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고, 또 놀라고, 경이롭게 바라보았지만,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권위 있는 그 태도에 결국 군중은 감격하고야 말았다. 그가 말하고 있는 사실은 친히 체험 가운데서 나온 말씀이며 정말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는 분을 만났다고 믿어주고, 그분이야 말로 다른 사람을 교훈하실 수 있는 분이며 하나님에게서 직접 오신 분인 것을 믿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교육이 지방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영원성을 지닌 것임을 재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이 정치나 사회문제 내지는 도덕과 종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옛 전통의 구습을 깨뜨리고 권위 의식에 대한 새로운 도전에 부딪친 시대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가 취하신 원칙을 외면하고서는 어떤 항해도나 나침판도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정신상태와 양심에 주신 그의 교훈은 지금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다음의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예수의 교훈이 비록 권위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 교훈이 어떤 지나친 의미의 교훈이거나 교리적이거나, 또는 강제로 동의를 요구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가 가르쳐야만 할 사람에게 대하여 놀랄만한 인내를 지니고 계셨다는 점이다. 강제성을 띠고 이끌기를 거절하시고,그들에게 자기의 의지대로 강요하시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매우 존종하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기적의 힘을 아무렇게나 쓰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현혹을 주고 판단을 그르치게 하지 않으시려는 의도에서였다. 길지 않은 기간 훈련을 시키시고는 제자들을 지방으로 파송하신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실로 위태로운 일이었다. 왜 그렇게 위험 부담이 있는 모험을 시도 하셨는가?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이 얼마나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가 보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의 기본되는 말씀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너희를 친구라 하리라](요15;15)였다. 만일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전할 때 강요의 방법을 써서 무오의 교리를 짊어지게 하여 사상적으로 질식시키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이 아니고 친구라] 그는 결코 [이것이 진리이니 이것을 받으라. 그렇지 아니하면 멸망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나는 진리이니 나와 함께 있으면 너는 진리를 발견하리라]고 권유로 하셨다.[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을 알리라](요7:17).그의 교훈은 참으로 권위 있었으며, 결코 강압적이거나 독단적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개인의 인격을 무한히 존경했다는 점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가 자기의 결정을 자기가 하도록 하는 것이 예수의 교육 원칙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이 점은 모든 교육가가 본 받아야 한다. 교육자가 이 점에 실패하면 자기의 모든 일을 실패한다. 예수님은 그의 교훈으로서 세계가 일찌기 경험한 사실을 상기하게 하고 또 의문을 가지도록 크게 자극을 시키기도 했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에 해답을 주셨다기 보다는 세계에 문제를 제시하고 세계로 하여금 거기에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 하셨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언제나 직접적인 질문에 대하여 항상 직접적인 대답을 주시지 아니하셨다.

한 교법사가[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고 물었을 때에는 [어떤 사람이 여리고고 내려가는데...]로 시작하여 사마리아 사람의 착한 행실을 전해주셨다(눅 10:29이하).베드로가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21:21) 라는 물음에는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느때는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물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3)고 하셨다. 그가 말씀하신 비유는 모두 이런 방법이었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 자신의 영적 통찰력과 영적 실제에 대한 지각력을 사용하도록 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다(마11:외)

예수님 교훈의 목적은 모든 인생 문제에 대하여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해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인생 문제에 대하여 미리부터 그 답을 제공할 수 있었다고 하면 안식일 문제, 종교와 정치, 주인과 고용인, 그밖의 여러 가지 문제의 해답이 대단히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단순한 입법자가 되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칼로 베는듯한 규칙적이며 무미건조한 해답을 주시려고 육체를 입고 인간 사회에 오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해답을 주신 목적은 그가 살으신 일과 또 죽으신 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명랑하고도 힘있게 모든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새로운 상념적인 해결 방법을 주시는데 있다.바울은 [의문은 죽이고 영을 살린다](고후 3:6)고 말하낟. 이것이 곧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적 자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자신이 교훈하신대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에수님으로부터 애매하거나 추상적이거나 불확실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모가 그들의 눈에 구체적으로 실현되었고,사는 사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주신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에의 신앙이었다. 그가 생활에서 그렇게 가르치셨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교훈인가?그의 용서는 그의 마음 전체를 모두 주셔서 용서하시는 것이었다. 단순히 어떤 잘못에만 관계하여 그 부분만을 해결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기도에 대하여 교훈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사랑과 봉사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는 교육만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친히 허리를 동이시고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 주셨다. 형제라는 제목으로 웅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실망한자의 집을 찾아가서 형제요 친구라고 위로하셨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최고의 선생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가르치신 일에 대하여는 최대의 성의를 기울여 실천하셨고, 형식이 아니라 진실로 성심을 다하여 자연스럽게 그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자신을 종교에 바치지 않은 사람의 종교운동은 사람들에게 감화력을 전하지 못하며 예수의 말씀대로 산증거가 없으면 사람을 설복시킬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서, 즉 그가 전하고 가르친대로 살아갈때, 그 종교는 가는 곳마다 감화를 끼친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더 말할 수 있는 예수의 교육방법은 자기에게 배우는 사람들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점이다.[사랑의 정신은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인다]고 어거스틴이 외쳤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영원히 거룩한 선생으로써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의 사랑의 정신 때문에 그의 모든 제자들은 항상 그 심령에 뜨거운 불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가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를 단순히 법적인 것과 같이 딱딱하게 한 것이 아니고 기쁨과, 영광으로, 그리고 로맨스로 실수하는 학생들은 그 제자들이었다. 그래서 그 선생으로 하여금 실망케 하고,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큰 교훈에 항상 장애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이런 실수를 할찌라도 예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또 그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 서로가 얽혀져서 신앙은 항상 사랑으로 자라가고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는 그 정신은 그들 속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넉넉히 제해 주었다. 갈보리와 오순절이 다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저들이 배운 교훈이 일층 구속의 중심 사명이 가장 완전하게,그리고 확실하게 그들에게 알려졌고, 그 교훈 때문에 저들은 생의 의의를 발견했고, 그 구속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하여 그들 전부를 바쳐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