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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애 - - 8 장. 예수의 교육방법의 특성

Joyfule 2007. 8. 18. 02:33

2.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성

그는 무엇보다 구전교육 방법을 사용했다.글로 써서 가르치지 않고 이야기로 가르쳤다. 그는 단 한번 글씨로 쓰신 일(요8:18)이외에는 모든 경우에 친히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그가 가르치신 아름다운 금언, 명구,신앙과 도덕 등 결정적으로 규정 지은 모든 말씀 곧 [하나님의 신학] 은 모두 갈릴리 농부와 어부들의 기억을 정리하여 문자로 기록된 말들이다.

 

그 구전식 교육에 위험부담은 없었는가? 시간이 흘러가면 그렇게 말로만 전해들은 교육이 망각되어질 위험성은 없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안다.씨를 뿌린 농부는 그 곡식이 결실할 때까지 항상 돌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땅과 또 다른 결실을 한다. 예수님은 한번 사람의 마음 속에 뿌린 말씀은 뿌린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항상 돌보아 주셨다. 그 말씀은 해가 거듭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박혀 영원히 자라는 생명이 되었다. 그의 말씀은 종이에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생명을 가진 씨앗을 마음에 뿌리쳤다. 이 씨앗은 한번 마음 속에 뿌리를 박으면 세기에서 세기를 연결하여 죽지 않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노르웨이의 문호 입센은 [황제와 갈릴리 사람]이란 작품에서 제 4세기 로마황제 줄리안의 독백을 이렇게 표현했다. 즉 [그가 지금 어디 있느냐? 골고다의 사건이 일어난 후 그는 어디서나 일하고 있느냐?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가 고통을 받고 죽고,또 세계에서 세게로 계속하여 정복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말로써 예수의 기사를 썼다.

 

둘째로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성은 그의 교훈 대부분은 충분한 원인을 가진 사건과 현장에서 추출되어 나왔다는 점이다.다시 말하면 어떤 특수한 사건에도 미리부터 생각하고 목적한 사실을 말하고, 그 특수한 진지를 설명했다. 회당에서 반신불수를 만난 일(마12:10).길에서 만난 귀족청년과의 대화(마21:16)제자들의 돌연한 논쟁 (눅 9:46),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이 옮으냐,그르냐 하는 바리새인들의 질문(마22:17)등, 이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기가 목적하는 교훈을 주셨다.

 

이런 교훈은 그 적응성이 순전히 지방적이며 일시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늘날에도 꼭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교훈을 통하여 가르쳐주신 진리는 변함이 없다. 예수의 교훈 대부분은 분명히 어떤 특별한 사건에 관련하여 주신 것이지만 지금도 그 교훈은 진리이다. 교리나 철학은 가르치는 방법으로 체계를 세운 어떤 것을 말씀하셨다면 벌써 오래전에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선명하게 빛나는 말씀은 예수님을 만나고 또 그와 친히 사귄 남녀들의 가장 절박한 현실에 응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토록 확실하게 남아 있다.

 

사상의 체계는 시대를 따라 변한다. 그러나 곤란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눈은 유혹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눈물은 여전히 눈에서 흘러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교훈은 오늘날에도 세계 모든 사람들의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일정한 요구에 응하고 있다.

 

세째로 그의 교육 방법의 특색은 언제나 그가 가르치신 교훈은 듣는 청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데 있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말씀을 듣는 청중의 입장이 되어 피교육자의 처지에서 교훈을 시작하셨다. 모세의 율법이 과연 그들에게 활동적인 종교였는가?에 의문을 가지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으로서 자기의 말씀을 전개했고, 거기서 또한 하나님의 더 좋은 율법의 높은 말씀을 전하셨다. 청중은 또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이 나라 없는 백성의 처지에서 영적 국가인 하늘 나라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언제나 그는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처지에서 이야기를 시작했고 또 거기서부터 발전해 나갔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가 쓰시는 말씀은 단순했다. 직접적이고 단순하고 박력있는 그의 용어는 - 분명히 그가 쓰시는 용어는 그 당시 직업 종교가들의 것과는 달랐다 - 듣는이에게 쉽게 이해되었고 또 사람들이 잊어버리거나 등한시 할 수 없으리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당겼다. 그리고 그는 또 성급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을 결코 조급하게 만들지 않았다. 한걸음씩,한걸음씩 그들을 인도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16:12). 그는 거룩한 보류의 마음과 침묵으로서, 그는 그의 계시를 미리 다 말씀하시지는 않았다(예를 들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등).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까지 보류했다.

 

이런 실제적인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강조되어야 한다.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믿으라고 요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불완전한 신조 때문에 따르는 제자들로 하여금 돌아서게 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면에서 결점을 지니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을 자기 민족들의 입장에 서서 가르치므로 주민들은 할 수 있는대로 예수에게로 모이고 있었다. 초신자들도 예수를 환영했다. 처음 만날 때는 중요시 하여 누구에게든지 제자들을 처음 가르치실 때처럼 친구로 삼고 한 걸음 두 걸음 그 자신의 깊은 신비에 까지 인도해 가며 제자로서의 안전한 영광을 누리게 했다.

 

그의 방법의 특색 하나는 그의 교훈에는 비유적인 요소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 그의 경우, 역설이나 어떤 무엇보다도 비유를 가장 순직한 예술적 수완보다 은총의 산 계시로 그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사로서 생명, 운명,하나님등,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과 설명의 창문을 열어 자신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그 진리를 청중으로 하여금 확실히 보게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의 이야기가 듣는 사람의 심중에 한 그림으로 화하도록 하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상상력이나 생각하는 두뇌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도 그 말씀에서 나타나는 신비의 광경을 보게하여 [내가 본다] [나도 본다]는 부르짖음을 가지도록 했다.예수 앞에 나오기까지 인생 문제에 대하여 눈이 어둡던 사람이나 잠든 사람처럼 몽롱하여 인생의 영광스러운 문제에 한번도 접하지 못한 사람들도 예수에게 나와서는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안이 밝아져서 생명의 원리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 그에게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사람들에게 환상을 주시는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