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리스도의 동정
예수님의 치료 사업은 흔들리지 않은 사실 중의 사실이다. 우리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곧 그 해석이다. 왜? 또 어떻게 이일을 행하셨나 생각하자. 그 해석에 있어서 두 가지 방면의 고찰이 가능하다. 즉 그 일을 하신 동기와 그 방법이다. 예수님은 왜 이 치료 사업을 중요시 하셨을까? 또 그의 고치심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동기의 문제
이 문제는 간단히 대답할 수도 있다. 즉 이 일을 하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을 주목케 하려는 신중한 목적에서와 그의 신성을 증명하고 그러하므로 그의 교훈을 좀 더 확실히 깨닫게 하시려 하심에 의의가 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자기에게 주목을 끌게 하는 것이 필요했었다. 즉 이 극적인 모든 사건을 그가 자기 사업 성취에 필요 조건으로 삼으셨다. 그의 지상 사업을 이 세계에 알리는 나팔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이는 그의 당당한 권위, 혹은 권리의 표시인 신임장을 세상에 제시하시는 행위다. 즉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사실적 증거였다. 그 동기는 자기자신을 신임할 수 있게 하는데 있고 이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일으키고자 함에 있다.이 동기에 대하여 좀더 생각하자. 한가지 이상한 일은 이 일이 복음의 증거 자체와 모순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그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주목하게 하고 그의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리고저 하여 그 능력의 일을 했다고 했다. 복음서가 참으로 그렇게 말했는가?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보다도 자기의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고 남에게 칭찬을 받게 될 경우에도 그의 몸을 숨기셨다고 했다. 복음서에 보면 그는 자기의 치료의 이적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시려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8:4,막 8:26,눅 8:56).자기선전의 행동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대체 왜 예수님은 자기의 하신 일을 남에게 알리지 않으려 했으며 그 신기한 기적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여 큰 인망을 얻으려 하지 않았는가? 기적으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사람을 놀라게 함으로써 세계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단번에 거절하셨다. 그것이 바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기를 거절한 것이다. 그는 진실로 놀라게 할 수 있는 기적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자 하지 않고 다만 거룩함과 불타는 사랑으로만 걸으셨다. 그러므로 병자들의 병을 고치심에는 그 치료의 이적으로서 자기를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병자와 함께 아파 하시는 바로 그 사랑이 그 동기였다.
이것을 좀더 설명하면 그가 자기의 신적 능력을 가지고 기적을 행함에 있어서 그 능력을 자기 몸에 친히 나타나게 할 수도 있었으나 복음서는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 아니! 모든 사람이 그 능력으로서 은혜를 받도록 한 사실을 기록했다. 그는 그의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기도 했다. 처음에 그의 제자들에게 이 능력을 받아가지고 어느 정도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신 동기는 그의 인망을 높이고저 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런 동기에서 기적을 행하셨다면 그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기적은 신앙을 일으킬 수 없다.[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16:31).그런 방법이 신앙을 일으킬 수 없음을 예수님은 철저히 알고 계셨다. 이것이 사실임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하신 말씀으로 확실히 알 수 있다. 신자의 부활 신앙은 결코 예수님의 신비와 놀라움으로 일어남이 아니다. 기적과 논쟁하는 그런 종류의 것으로 기독교를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기는 그의 기적 때문이 아니다. 실상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순수하게 믿는 사람이라야 또한 그 기적도 믿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인망을 얻기 위하여 기적을 행했다거나 우리가 결코 그 요술에 미혹되어 그를 믿게되지는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권위있는 행동은 다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보다 깊은 동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음서에는 두 가지 동기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모든 상처에 대한 자비심이다. 문둥이가 고름나는 손등에 그의 손을 얹으심은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또한 어린이를 그의 품안에 안으심도 군중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신비스런 인상과 감동을 일으키려고만 했다면 정말 그것은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다만 어린양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를 자기 품에 안으셨을 뿐이다. 문둥이의 몸에 손을 얹으심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였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행위의 가장 큰 동기는 언제 어디서든지 다만 그의 자비심,남을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었다.
그것은 결코 사람들이 할 수 잇는 값 싼 동정은 아니었다.[동정]이란 라틴어의 뜻은 [함께 괴로워 한다]는 말이다. 문둥이의 괴로움을 자기의 고민으로 삼으시고 함께 괴로워하는 그 마음이 주로 주님의 동정이었다. 땅위에 있는 모든 형제들의 상처를 자기의 상처로 생각하고 그들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며 그들의 비애를 자기의 비애로 삼음이 예수님의 동정심의 근본이었다. 로마교에서는 [예수님의 다섯개의 상처]를 말하는데 그것은 곧 네 곳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말한다. 그러나 상처는 다섯개만이 아니다. 수천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마태는 이사야의 글을 일허게 인용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마 8:17,사53:4).실상 남을 위하는 동정심은 언제든지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권세있는 일을 행하신 다른 동기는 여기에 있다. 즉 하나님의 세계에는 병이란 용납될 수 없는 존재이다. 병이란 하나님의 계획에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그 의지가 병을 당초부터 용납하실 리가 없다. 신을 쫓아내는 병은 하나님의 세계를 어지럽히는 난군이며 이단자다. 하나님의 세계와는 양립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그를 쳐부수고저 했다. 병고치는 이적의 해석에 있어서 이적은 오늘날까지 충분히 강조되지 않았다. 예가님에게는 단념적 순응이 있을 수 없다. 그는 결코 [친구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을 고칠 수 없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괴롭히시니까요] 같은 말은 할 수 없다. 예수님은 문둥이를 만났을 때 운명에 내어 맡기는 단념을 하지 않았다. 어린이의 울음을 못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병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흑암속에서 예수님은 결코 그저 복종을 권함으로써 만능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는 언제든지 그런 흑암과 싸우시는 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하늘에 깊은 하나님께로 부터 보냄을 받아 오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세계에 있는 이 모든 해악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어디까지라도 그것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예수님은 자기의 사업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사업을 방해하는 사람의 왕국 역사를 파괴하기 위하여 이 치료 방법을 시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 당시에는 다만 사귀병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병도 다 사탄의 장난으로 되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악령의 사자로 인하여 모든 흉악한 일이 발생한다는 생각했다.그러므로 어느 곳에서든지 고침을 받는 것은 그 병을 일으킨 악령 하나가 쫓김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로 말미암아 모든 병자가 나음을 받게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은 곧 악령과 흑암과 사탄 왕국의 그 기초가 흔들려 무너지고 선과 빛과 하나님의 왕국이 새로이 세워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셨나니라](눅 11:20). 그리고 그가 보낸 70제자들이 신비한 치료 사업을 하고 돌아와서 경과를 보고할 때 예수님도 기뻐하여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10:18).그가 가까왔나니라]한 그의 교훈의 주제를 설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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