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열 두 사람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열 두 사람에게 대하여 생각하자. 안드레는 스콧트랜드를 지키는 성자로 섬기고 있다. 안드레와 스콧트랜드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안드레를 자기들의 수호사도로서 자랑하는 것 만은 사실이다.[안드레란] 말의 헬라어 뜻은 [용감하다][사내답다]는 말로서 남자의 이름이다. 복음서에는 안드레의 이야기를 별로 소중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는 베드로의 형제였다는 것만을 말하고, 뛰어난 다른 제자들의 그늘에서 빛을 못보는 듯한 느낌으로 평범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안드레는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를 만난 사람이며, 그가 자기의 형제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를 만난 사람이며, 그가 자기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다. 그러니까 안드레가 아니었더라면 베드로가 그리스도교 역사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손꼽히는 네 제자(베드로,안드레,야고보,요한)의 한 사람으로 항상 한 그룹에 끼인 것을 보아서 예수님과 더가까이 지냈고 또한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한 사건이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항상 예수님 곁에 있을 수 있는 그의 존재를 주목할만 하다.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부흥 운동에 깊이 감동을 받은 사람 중의 한 청년이었다. 요한은 자기의 신앙 운동에 참거하여 온 사람들에게 어느날 석양, 요단강변으로 걸어가시는 낯선 사람을 가리키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요1:36)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안드레와 다른 한 사람은 요한이 말한 그 이유를 알기 위하여 낯선 그림자를 따라 갔다. 그리고 물었다. [랍비여,어디 계시는 분입니까?] 예수님은 [와서 보라]는 간단한 대답을 했다. 그날밤, 그들이 피차 어떤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그들이 피차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밤을 밝힌 것만은 사실이다.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요1:39).이런 점으로 보아 안드레가 사물에 대하여 주도면밀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의의 깊은 활동은 그가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중책을 이행한 일이다. 그가 밤이 깊도록 진리의 담화를 나눈 그 다음날 아침, 즉시 자기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났다]고 기뻐하던 흔적이 복음서에 보이고, 그후 [자기 형제 베드로를 예수에게로 데리고 왔다]고 기록했다(요1:42)
그후, 어느날, 주린 5천의 군중이 예수를 떠나지 아니하고 늦도록 빈들에서 방황할 때,조그만 어린아이가 가져온 떡덩이를 찾아 내어 예수님에게 가지고 가서[여기 떡이 있나이다](요6:8)라고 말한 사람이 안드레다. 여기에서도 역시 어린 아이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다. 그 다음 어느 날, 헬라 사람들이 나타나 예수님을 면회하려고 벳세다 사람 빌립을 찾아서 면회하기를 간청했다. 빌립은 직접 예수에게로 데리고 가지 않고 먼저 안드레의 의견을 듣고 안드레와 같이 헬라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갔다(요12:20-22). 이런 점으로 볼때 안드레는 스콧트랜드의 성자만이 아니라 그는 모든 선교 사업을 하는 선교자들의 영원한 수호 성자라 하겠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예수에게로 데리고 오는 것이 제자들의 할 일이며 오늘도 이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지도자의 천성을 타고난듯, 그는 열두 제자를 대표하는 대변자였다. 어느날,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 가려느냐?] 고 물으셨을 때,[주여! 당신에게 영생의 말씀이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이렇게 얼른 대답한 사람은 베드로였다. 예수가 누구냐는 문제가 예수님 자신의 입에서 제기 되었을 때에 다른 제자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다보고 있는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한 이도 베드로였다(마16:16).
그들의 스승을 십자가상에 잃어버리고 낙망하여 앞일을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들을 할 때에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 하고 앞장 서 나선 사람도 이 베드로였다. 이 말을 따라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요21:3). 용감하고 넓은 마음을,그리고 열광적이고 급한 성격의 소유자인 베드로는 지도자의 자질을 천성적으로 타고났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성격에 결함도 있었다.[사탄아! 물러가라]하는 노여운 책망을 받은 사람도 이 베드로였다(마16:23).어느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마19:27) 하며 장한듯이 자랑한 사람도 베드로다. 조그마한 계집종을 무서워하여 예수를 부인한 일도 있다(마26:69). 얼마나 변화무쌍한 혼잡한 성격인가?베드로가 우리에게 가까운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그런 결점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새로운 이름 [베드로]를 받은 시몬은 교회사상에 바위와같이 굳건한 존재였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실수를 많이 하지만 후일에는 하나님의 가장 강한 사람이 될 미래를 보시고 그를 수제자로 삼으셨다. 그가 예수를 부인한 그 실수에서 통회하고 돌아선 그 후부터는 정말로 모래알이 변하여 바위가된듯 하였다(막16:7). [내 양을 먹이라](요21:17)는 예수님의 명령에 [주께서 아시나이다.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거듭 조아렸다. 베드로의 최후에 대하여 유명한 전설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로마성에 숨어 있다가는 아무래도 잡혀 죽을 것을 안 그는 로마성 안에서 수난 당하는 신도를 버리고 어느날 도망하여 성문을 빠져 나왔다. 이때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는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고 물았다. [나는 네가 피해 오는 로마로 가서 두번 십자가에 못박히러 가노라.]이 대답에 베드로는 문득 자기의 비겁함을 깨닫고 걸음을 돌이켜 로마성으로 들어가서 꺼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자의 영광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용감한 사람]베드로는 [저편에서 들리는 하늘 나라의 소리]를 들었다.
주님의 사랑을 받던 네 제자 중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형제가 있다. 야고보에 대한 기사는 비교적 적다. 복음서에 다만 두번 나타나는데 그것도 요한과 함께 한 자리에서다. 그러나 최초의 순교자로서 영광을 차지한 제자다(행12:2).요한은 신약의 요나단이라 하겠다. 구약에 나오는 다윗의 친구 요나단은 신약에 있어서는 다윗의 아들 예수와 가까이 지낸 요한이라 하겠다.[나의 기사]는 절대 대담,절대 온순의 사람으로 맹세를 한 사람이다]라고 테네슨은 말했다.
요한에게는 남자의 대담성과 여자의 온순,이 두 가지 성격이 완전히 조화되어 있었다.예수의 최후 순간, 갈보리까지 스승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자여 보소서,아들이니이다]한 마지막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이다(요19:26).또 다른 한면의 성격으로서 허락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어떤 사람에게 대하여 분개했다는 마가복음의 기사와 (막 9:38),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마을에 불을 내리기를 요구한 기사(눅 9:54),그리고 높은 자리를 탐낸 사실을 보여주는 기사(막10:35)등이다. 그러나 그 성격중 가장 깊은 것은,그가 예수를 떠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그 마음의 정결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한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이 그를 기념하여 항상 들려진다.즉[주의 사랑하는 제자]라는 말이다(요13;23).
또 한분의 제자 도마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의심이 많고, 그리고 불가지론자,회의론 자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아름다운 별명은 아니다.그러나 예수님이 수난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 할 때, 다른 제자들은 [랍비여 금방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시나이까?](요11:8)하고 만류했으나 이 의심 많은 도마는 웬 일인지 큰소리로 대담하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고 말했다. 그 의심은 단순히 반항적인 의심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성격의 한 우울증이 섞여 있는 결함이었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가장 아름다운 신앙 고백의 하나는 의심하던 도마가 예수를 확신한 다음의 고백이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을 때] (마9:9)부름을 받았다.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희망이 없는 수치스런 사람으로서 모든 국민의 조롱을 받는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그날 밤,가버나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큰 이야기 꺼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서 보면, 후에 사도 바울이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빌2:7)고 증언한대로 예수님의 품이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 준다. 이 관대한 대접을 받은 마태는 그날밤 연회를 베풀어 고귀한 손님을 청했다(마9:10).이 연회를 베푼 목적은 세리 마태에게 있어서는 세가지 이유에서였다고 생각된다.
첫째, 그것은 그의 영혼의 새로운 출발을 기념하는 잔치이며,둘째, 그는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의 신앙을 공공연하게 고백하여 자기 생활을 결정적으로 청산하고 다시는 과거의 그런 길을 걷지 않겠다는 표현이며, 세째,그의 옛날 친구들로 하여금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만나게 하여 그들과도 신비스러운 영적 경험을 나누고자 함이었다. 이 연회로 말미암아 예수에게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이 유명한 칭호가 처음으로 붙게 되었다. 그러나 이 칭호가 그리스도에게는 참으로 영광스런 이름이었다.
나머지 여섯 제자에 대하여는 별로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열심히 묻는 질문가(빌립 특히 요1:4314:8),열심당이며 열렬한 민족주의자 시몬,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바돌로매(요1:45),다대오라 이름하는 레빼오(레빼오란 이름은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었음: 역자 주-마10:3),유다 9예수님에게[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 하시려 하시나이까 한 사람-요14:22), 그 다음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그에 대하여는 아무 기록도 없다).
그 다음 예수를 판 가롯 유다,그가 왜 이 단체에 끼어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여기서 가롯 유다에 대한 문제는 더 깊이 다루려 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처음 그를 부르실 때는 그에게도 후일 훌륭한 제자가 될 소질이 있음을 인정했으리라는 것만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다 역시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에 끌리어 그를 찾아 왔을 것이다. 서로가 이렇게 보는 바가 없었더라면 결코 사제지간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유다의 신비에 대하여는 17장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자.
예수님은 자신이 택하신 열 두 사람을 데리고 세상을 정복하려는 영적 사업을 시작하셨다. 이 출발은 대답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이 모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모험이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미련한 자를 택하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것들을 폐하러 하시나니](고전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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