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9일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
성경 ; 사50:4-9, 빌2:5-11, 막15:1-39
제목 ;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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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중국에 ‘비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아주 훌륭한 명궁(名弓)으로서
많은 제자들에게 활쏘기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기창’이라는 제자가 가장 훌륭한 솜씨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은 그의 재주를 크게 칭찬하면서 명궁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기창은 명궁 칭호를 별로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천하에서 유일한 명궁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속으로 ‘스승만 없으면 내가 천하에서 제일일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비위가 외출했다가 해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카시아 숲을 지나가고 있을 때에
어디선가 ‘쉬잉’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에게 화살이 날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빨리 나무 뒤에 숨어서 화살을 피했습니다.
그에게는 활도 없고 방어할 만한 다른 무기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던 그는
아카시아 나무의 가지와 잎줄기로 활을 만들고, 가시로 화살을 만들었습니다.
건너편에서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을 때,
그의 가시 화살도 시위를 떠나 공중으로 날아갔습니다.
두 사람이 쏜 화살은 중간에서 만나 부딪혀 서로를 쪼개며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기를 십여 번, 상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중단했습니다.
숲속에서 한 사내가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뛰어나왔습니다.
그리고 ‘비위’ 앞에 바짝 엎드렸습니다.
그는 바로 비위의 제자인 ‘기창’이었습니다.
비위는 제자를 일으켜 세우고
“나는 너에게 활 쏘는 기술만 가르쳤을 뿐이지,
자기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치지 못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비위’는 오히려 제자에게 용서를 구한다면서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러자, 제자 기창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스승 앞에 더욱 바짝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심으로 그 잘못을 뉘우치면서 스승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우리 인간에게는 일반적으로
최고가 되거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인류 최초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구비해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야말로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행복하게 잘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하며 거역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인류의 비극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세계 최고가 되려는 욕망을 품고서,
그 꿈을 이루고자 별짓을 다했습니다.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을 비롯하여 히틀러와 뭇소리니,
그리고 일본의 도오조와 같은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세계 최고가 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인류에게 엄청난 비극만 안겨주었뿐,
그들의 헛된 욕망은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러 성현들이나 종교까지도 인간 스스로의 힘과 의지만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거나 주장했습니다.
유교에서는 학문에 정진하면서 열심히 수련을 쌓으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도교에서는 신선(神仙)이나 도인(道人)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열심히 도(道)를 닦아서 득도(得道)를 하게 되면
부처, 곧 신(神)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인간 스스로가 열심히 도를 닦거나 수양을 하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서 신(神)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라는 철학자도 말하기를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초인(超人)이 되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무튼, 수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위치까지 오르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에서 제일가는 사람이 되려고 하거나, 아니면
한 나라 안에서만이라도 최고가 되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수단을 다해서 그 꿈을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 땅 위에서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늘 끝까지라도 올라가보고 싶은 욕망을 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지,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헛된 꿈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비극을 안겨주었습니다.
물론, 그들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인간의 모든 욕심은 필연적으로 죄를 낳게 되며,
그리고 그 죄가 점점 자라서 나중에는 결국 파멸과 죽음을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은 다 한결같이 죄 가운데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롬3:10)’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 스스로의 지혜와 힘만으로는 그 누구도 온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죄와 죽음의 바다에 빠져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건져낼 자가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듯이,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절규했습니다.
‘아, 정말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줄 수 있겠는가?’하고 말입니다.
시편기자도 ‘그 누구라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불로장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누가 제 목숨을 죽음의 세력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89:48)’하고 한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류역사에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하늘의 영광스런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그토록 올라가서 차지하려고 했던 그 귀한 보좌를,
하나님은 스스로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것은 물론, 죄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뭇 인생들을 구원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셨다(빌2:6)’고 했습니다.
‘주께서는 오히려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7)’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주님은 훨씬 더 자기를 낮추셔서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 주제와 한계를 망각한 채
한없이 높아지려고 애쓴 반면,
하나님은 인간 예수로 오셔서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셨던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뽐내거나 교만하게 굴 경우,
그것은 곧 죽음의 길이 되며,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경우에는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에 대해서, 주께서는 한 마디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자는 찾으리라(마16:25)”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내놓고 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는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말씀일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고자 원한다면, 즉 다른 말로 말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원할 경우,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졌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다 부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다른 말로 말하면,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욕심을 다 버려야,
우리는 참생명의 길을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멸망의 길로 빠져들지 아니하고
영생의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1.먼저, 우리는 주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눅24:7)”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마음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들은 쉽사리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진 다음에 있게 될 부활을 확신하지 못한다거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을 경우,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기도 어렵거니와, 세상을 포기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을 즐겁게 사는 것이 전부인 사람,
또는 세상에서 명예롭게 되는 일을 아주 귀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미래에 대한 아무 보장이나 확신도 없이 그냥 무조건
그 모든 즐거움과 세상명예에 대한 욕심을 다 버리라고 한다면,
그렇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자주 들어야 합니다.
주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거니와,
진리 안에서 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0장 4절 이하에는 ‘종의 노래’가 실려 있습니다.
그 말씀 중에는 ‘내가 말씀을 전하는 일로 갇히거나 고문을 당하더라도,
나는 결코 거역하지 않거니와,
무슨 사명을 받아도 두려워서 피하지 않는다(5)’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편에 서 계신다(7)’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선교사가 한 농부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는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부인과 자녀들만 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농부가 선교사를 부르더니 닭장에를 같이 가보자고 했습니다.
가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는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
병아리들이 한 마리씩 삐약삐약 소리를 내면서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선교사에게 그 암탉을 한 번 건드려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탉은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나 있는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암탉의 몸에서 피를 다 빨아 먹었는데,
그 놈이 자기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저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순간, 선교사는 그 농부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로 저것입니다. 저 암탉의 모습이 바로 주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움직일 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능히 구원할 수도 있었으나, 주께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바로 당신과 나를 살려서 구원하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고통과 수치를 다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본래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계셨으나, 그 모든 권리를 다 포기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죄와 죽음 가운데에서 건져내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하셨던 것입니다.
이 보다 더 귀한 말씀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벌레만도 못한 우리를 위하여 그 귀하신 주께서 죽으셨다는 말씀은,
인간은 결코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되는 아주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잠시 잠깐 누리게 되는 세상 즐거움과 명예를 위해 살면 안 되고,
참으로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귀중한 백성인 것입니다.
2.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마가복음 15장에 있는 말씀을 보면, 주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때에,
그 당시의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시키는 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빌라도가 ‘무슨 이유로 죽여야 하느냐?’고 따져 물어도, 그들은 무조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권력자인 대제사장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공동체에서 쫓겨나거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처럼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백성들은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생전에 하신 일이 있다면,
그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가까이 하시면서,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으며, 그들이 배고파 할 때에 먹을 것을 제공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영혼이 심히 굶주려 있었는데,
그런 그들에게 꿀보다 더 달콤한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 두려워서,
그처럼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대제사장들은 어찌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군중들을 선동했을까요?
그것은, 자기들의 권위와 지위를 잃어버릴까봐 그랬던 것입니다.
그들은 소위 종교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그처럼
무모한 짓을 감행함으로써 인류 역사 상 가장 큰 죄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주 초신자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길인지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길이 죽는 길이고,
어느 길이 생명의 길인지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진리의 말씀을 외면한 채,
계속 세상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생명의 말씀인 진리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려워도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십자가의 길을 외면할 경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의 길로 가야만 합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아니면 죽음의 길인 것입니다.
십자가 후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십자가의 고난은 헛된 고난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에는 부활의 영광이 확실히 보장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가볍습니다.
이미 주께서 우리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주께서 가르쳐주시는 대로만 살면, 우리는 아주 쉽게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온전히 죽지 못한 채로 십자가를 지려고 할 경우,
그 십자가는 본래보다 더 무겁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살아 있는 만큼,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더 무겁기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나는 완전히 죽고,
주님만이 온전히 살아계셔서 우리 인생을 주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어떤 청년이 자기 홈페이지에다가 ‘성경은 ~이다’라고
간단히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 하고,
그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저는 그 청년에게 답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은 십자가의 예수를 말한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 곧 죽는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걸어가게 될 때,
우리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잠깐 편하게 살기를 원하면, 그는 영원히 죽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선교사가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때마침, 이름 모를 전염병이 유행해서 수많은 중국인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교사는 그 병균을 유리병에 담아가지고
백신을 만들기 위하여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려고 할 때,
검역소 직원들이 방역을 위해 철저하게 승객들을 조사했습니다.
검역소를 통과할 다른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 선교사는
병균을 자기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유리병은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조금 뒤, 그의 몸에 병균이 퍼지면서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서 의사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지금 중국에 번지고 있는 전염병에 감염되었습니다.
이 병균을 뽑아서 백신을 만들어 중국에 보내주십시오.
그래서 죽어가고 있는 중국인들을 살려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며, 십자가의 희생정신입니다.
즉, 누군가를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도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값있는 인생을 살 수 있으며,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께서 우리를 하늘나라로 부르시는 그날까지,
십자가의 예수를 외면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십자가의 길만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마시고,
부지런히 주님의 길을 가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