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 버트란드 러셀
다음의 글은 러셀의 “Portraits from Memory and other essays”
(A Touchstone Book, Simon and Schuster, NewYork, 1956)에 실려 있는
4쪽 짜리 짧은 글 “Why I am not a Communist”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어떤 정치 이념(political doctrine)에 관해서나 다음의 두 가지 물음이 제기된다
1) 그 이론적 원칙들이 참된 것인가?
2) 그 실제 정책이 인간의 행복을 증대시킬 것 같은가?
나의 소견으로는 공산주의의 이론적 원칙들이 거짓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 실제적인 지침들이 인간의 비참의 한 측량할 수 없는
증대를 산출하는 그런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공산주의의 이론적 원칙들은 대부분 맑스로부터 도출된다.
나의 맑스에 대한 반대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는 혼동된 머리의 소유자였다는 것이고 (...he was muddleheaded),
다른 하나는, 그의 사고는 거의 전부가 증오에 의하여 일깨워진 것이었다는 것이다.
(...his thinking was almost entirely inspired by hatred).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의 임금노동자들의 수탈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상정된 잉여가치론은
(가) 맑스와 모든 그의 제자들이 명확히 반박하지만 말서스(Malthus)의
인구론을 은근히 자기의 독창적인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나) 리카르도(Ricardo)의 가치이론을 제조품의 가격들에는
적용하지 않으면서 임금에만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온통 결과에만 만족하는데, 이는 그것(결과)이 사실과 부합된다거나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임금노동자들 가운데 분노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동기가 계급적 갈등들(class conflicts)에 있다는
맑스의 이론은 백년전의 영국과 불란서에서 부각된
어떤 양상들을 세계역사에까지 조급하고 참되지 못하게 연장한 것이다.
인간의 의지들(human volitions)과는 독립적으로 인류역사를 지배하는
변증법적 유물주의(dialectical materialism)라고 일컫는 한
우주적 힘이 존재한다는 그의 신념은 다만 신화에 불과하다.
그의 이론적 오류들은, 그러나 터툴리안(Tertullian)과 카알라일(Carlyle)처럼,
그의 주된 욕망이 그의 적들이 벌받는 것을 보는 것이었고
그는 그 과정 속에서 그의 동지들에게 무엇이 발생한지에 관하여
거의 주의 깊게 염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별로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맑스의 이론은 충분히 나쁜 것이었지만,
레닌과 스탈린을 통한 사태 발전은 그것을 훨씬 악화시켰다(229-30쪽).
나는 항상 맑스와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에 대한 나의 첫 비판은 1896년에 출판되었다
(이것은 그의 맨 첫 번째 책이기도 한
“독일 사회민주주의: German Social Democracy”를 가리키는데,
이는 그의 첫째 부인 Alys와 함께 여행한 1895년 두 차례에 걸친
베를린 체재의 결실로서 1896년 2-3월에 마침 창설된
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6개의 강의로 발표된 것임: 역자주).
그러나, 현대 공산주의에 대한 나의 반대는
맑스에 대한 반대보다 더 깊이 근거한다.
즉, 그것은 민주주의의 폐기에 있다.
이는 특별히 처참한 것으로 나는 본다.
한 비밀경찰의 활동 위에 그것의 권력을 지탱하는 한 소수자는
잔인하고 억압적이며 애매모호주의적(obscurantist)으로 되기 쉽다(231쪽).
공산주의에 대결하는 방도는 전쟁이 아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서구진영을 공격하는 것을 방지할
그러한 무장태세에 첨가하여 필요한 것은,
비공산 세계의 덜 발전된 지역에 있어서 불만의 근본원인들을 감소시키는 일이다.
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서구진영이 그 힘이 닿는 한
경감시켜야하는 비참한 빈곤상태에 처해 있다.
거기에는 또한 수세기 동안 유럽이 아시아를 모욕적으로 지배함으로써
초래된 큰 쓰라린 체험이 있다. ...
공산주의는 빈곤과 증오와 분쟁의 온상에서 나오는 한 이념이다.
그것의 전파는 빈곤과 증오의 지역을 감소시킴으로써만이
방지될 수 있다(232쪽). (배동인 옮김)
(‘횃불’, 제7호, 1979년 8월,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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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배동인, '그리움의 횃불'(전예원, 2003), 265-7쪽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