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복음을 전하십니까?
우찌무라 간조
사람을 위한 전도2.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고, 은근히 부자 찾기를 즐기며, 귄위를 의지하고 금력을 존중하는 자는 사람을 위한 전도자가 아니다. 그대여, 사람을 위한 전도가가 되기 원하는가? 가난한 자들에게 가라. 가난한 자를 중히 여기고 부자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증거 중의 하나이다. 세상의 가난한 자들이 그대를 사모하고 존경하여 따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 계신다는 증거이다. 부자 앞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가난한 자 앞에서 고개를 쳐드는 것은 그대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는 표시이다.
가난한 자란 반드시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이것이야말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직접 돌보시는 진짜 가난한 자이다.
그 영혼에 심한 허기를 느껴서 자신의 영혼을 가득 채워줄 수 진리를 사모하는 자가 가난한 자이다.
그러므로 비단 옷과 대궐 같은 집에서 좋은 음식으로 배부른 사람들 중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백만의 재산이 있지만 그 마음이 하늘과 같이 비어있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위한 전도란 심령의 가난함을 고쳐주고, 육신의 가난함을 위로하는데 있다.
전도는 심령적 자선 사업이다.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하기 때문에 나는 내 심중의 무한한 위로를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만일 금과 은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즐겨 하나님께 바쳐 가난한 인생들을 구제하리라.
그러나 내게는 재물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받은 나사렛 예수의 구제력으로 가난과 고통을 덜어주고자 한다.
전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먼저 하늘의 부유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있는 가난한 자들의 심령을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10.
구제의 어려운 점은 항상 나누어 줄 것이 부족한 데서 생긴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왜 나누어 줄 것을 걱정하겠는가?
나누어 줄 것을 잔뜻 쌓아 놓고 나누어 주는 자가 아까워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심령적 자선 사업에 있어서는, 나누어질 은혜가 하늘로부터 무한하게 공급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찾아 나누어 주기만 하면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삯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는 것이 쾌락인 사람이 왜 삯을 요구하겠는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전도가 어렵게 되는 것은 나누어 줄 영의 결핍에서 온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바울은 복음 전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전도는 생계를 위한 전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명예를 위하여 전도하고자 하는 유혹이 그의 마음에 떠올랐다면, 그는 이런 생각을 일으킨 악마를 꾸짖고 분연히 자신의 마음에 붙으려고 하는 야심의 꼬리를 떼어버렸을 것이다.
세계를 전도하고자 하는 그의 분명한 목적은 그로 하여금 바리새당파를 버리도록 하였으며, 유대인들에게만 머물러 있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는 대양을 건너 헬라와 유럽으로 전진하였다.
자신의 마음과 생애 속에 부끄러운 것이 없었던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에 있어서 부끄러움이 없었다.
마음 속에 부끄러운 것이 감추어져 있는 자는 감히 복음 전도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
부끄러워 할 것이 없다는 말과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는 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맹자는 말하였다. “부끄러움은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잔꾀를 부리는 자는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아직 전도자가 됨을 부끄러워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전도가 무엇임을 모르는 사람이다.
전도자에게는 연민의 정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전도 사업은 깊은 연민의 정에서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 23:37.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전도하시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 9:35~36.
바로 이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연민의 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 이 더러운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이 기독교회의 시작이며, 이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사람을 위한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전도이다.
여기에는 교회가 발급하는 면허증이 필요 없으며, 교회의 인정도 필요없다.
진리 그 자체가 유일한 조력자이며 증인이다.
내 머리 위에 유명한 목사의 손이 얹혀지고, 내 이름 앞에 목사, 박사와 같은 부담스러운 칭호가 넘치게 붙는다고 해도, 가난한 자가 나로 말미암아 하늘의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내가 받은 안수는 허식이고 허례이다. 오해하지 말라.
지금 나는 사람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뒤로 미루는 전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며, 진리를 존중하는 전도이다.
어떤 세인은 말하기를 “쓸모없는 인간은 중을 만들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
전도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기를 버리기로 결정한 자만이 전도자로 설 수 있다.
전도의 직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정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강권함을 받은 자만이 전도의 직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전도의 직에 부름받지 않은 자가 그 직에 매달리는 것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그 직을 담당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큰 죄를 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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