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복음을 전하십니까?
우찌무라 간조
사람을 위한 전도
사람을 위한 전도라는 말은 사람들의 요구와 기호에 맞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한 자가 어찌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복음을 조작할 수 있는가!
인간적인 종교에 빠져 있는 자들은 감정적인 사랑에 빠져서 공의와 율법을 소홀히 여기며,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악을 다루는데에 있어서 매우 나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인류를 향한 진정한 사랑은, 먼저 하나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을 마음에 간직한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들을 외면한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섬길 수 없다.
인간은 사람과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우상 숭배자들은 하늘에 걸려 있는 해와 달과 별을 섬기지만, 비록 그러한 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라고 하지만 인간의 마음과 양심을 의탁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자신의 헌신과 희생을 바칠 하나님의 모습은 볼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눈 앞에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제물과 희생을 받을 대리자를 이 세상에 두셨다.
우리가 숭배할 하나님은 전혀 형체가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목적이 될 수 있는 분명한 대상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봉사함으로써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고, 그것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우리 마음의 전부를 거기에 쏟아 부음으로써 우리는 직접 하나님과의 교제를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영안으로 볼 수 있다.
이 우상은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이 허락하는 아름답고 귀한 우상이다.
나의 전부를 바칠 수 있는 이 우상이란 무엇일까?
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쳐서 성경이 지정한 이 우상을 섬기리라.
북두칠성이나 북극성이 하나님이 계신 장소 아니다.
천둥이 쳐서 산천초목이 흔들릴 때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시간이 아니다.
갓난아기가 말구유에 누운 곳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신 장소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하신다.
사람을 통하여 우리의 경배와 순종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사람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다음과 같은 로욜라 공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한가지 의미있는 교훈을 제시해 준다.
“로욜라 공은 중세기 때에 한 성의 군주로서 열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큰 공을 세우길 원했는데, 하루는 그의 마음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실 때에 사용했던 금잔,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금잔, 그것을 찾아낸다면 교회를 위하여 매우 의미있는 봉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 앉아 용기 백배하여 성문을 나서는데, 때마침 문둥병을 앓는 자가 로욜라 공 앞에 나타나 엎드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동냥을 구했다.
로욜라 공은 성급한 말투로 ‘나는 하늘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구세주의 금잔을 찾으러 가는데 어찌 네가 나를 번거롭게 하느냐!” 문둥병자는 로욜라 공의 소매를 붙잡으면서 애걸하였다.
로욜라 공은 크게 노하며 금화 하나를 땅에 던진 후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이로부터 수십년 동안 로욜라 공은 유럽의 전지역을 구석 구석 뒤져서 금잔을 찾았지만 헛수고 였다.
드디어 그에게도 가난이 닥쳐 왔으며, 머리에는 하연 서리가 내리게 되었다.
마침내 로욜라 공은 자신의 뜻이 도저히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깨닫고 고향 땅에 돌아가 여생을 마치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가 다시 고향의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는 눈이 내리고 강물은 얼어 있는 추운 겨울이었다.
다 낡은 옷을 걸치고 손에 지팡이를 짚고 터벅 터벅 걸어가고 있는데, 다시 문둥병자를 만났다.
그 얼굴을 살펴보니 수십년 전에 큰 뜻을 품고 떠날 때에 그의 말 앞에 엎드려고 구걸하던 거지였다.
환난과 고생으로 인하여 꺽어진 그의 마음 속에서 깊은 동정심이 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이제 돈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베낭 속에 가지고 있던 빵 한 조각을 꺼내어 절반을 잘라 거지에게 주면서 ‘나는 이제 이 빵밖에 없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것을 받게나’ 라고 말했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쪽박을 꺼내어 강가로 내려가 얼음을 깨고 냉수를 떠다가 문둥병자에게 주면서 ‘자비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이것을 마시게’라고 말해 주었다.
로욜라 공의 친절을 받은 그 거지 문둥병자는 갑자기 그 모습을 바꾸어 영광스러운 구세주의 모습으로 로욜라 공의 앞에 섰다.
감개무량한 모습으로 넋을 잃고 서있는 로욜라 공을 향해 구세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니 두려워 말라. 거룩한 잔을 찾으려고 여러 나라를 헤메어도 소용없다.
보라. 잔은 여기에 있다.
강물을 길어 온 그 쪽박이 바로 금잔이다.
내게 떼어 준 빵 반 조각은 찢어진 나의 살이다.
이 냉수는 십자가 위에서 흘린 나의 피다. 가난한 자와 더불어 나누는 식사야말로 진정한 성찬이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로욜라 공은 드디어 깨달았다.
그렇다. 세상의 가난한 자가 그리스도이다.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창고를 개방하여 성밖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로 평생 낙을 삼았다.
그 결과 그가 다스리던 모든 마을 사람들은 평안하였고, 로욜라 공 역시 기쁨과 영혼의 평안을 가지고 일생을 마쳤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 계신다.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한 왕자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자의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의 모습에 가깝다.
“내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내게 행한 것이니라” 마 25:40.
그리스도인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가난한 자에게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참된 교회의 부흥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봉사로 증거된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사자를 보내어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 질문에는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이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내게 그 증거를 보여주십시요” 라는 의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기 위하여 신학적 논리를 사용하는 대신에 요한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신 자신의 봉사를 설명하셨다.
“눈먼 자가 보며 절뚝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며 가난한 자가 복음을 듣는다.”
예수께서는 환자들의 치료 봉사와 함께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복음을 듣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거짓 예언자는 가난한 자에게 뜻을 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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