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복음을 전하십니까?
우찌무라 간조
하나님을 위한 전도
전도는 하나님을 위해서 할 때야 비로소 순수한 종교 사업에 접어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말한 “주의 집을 위한 열정이 나를 삼킨다”는 정신이다.
또한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는 정신이며, 이것이 “너희는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주(진리) 안에서 복종하라”고 권면한 베드로의 정신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이외의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은 모두 헛일이요, 장난이다.
그것은 전도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전도하지 않는 전도자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그렇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전도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만” 하는 전도, 내 평판과 생명을 먼지로 여기고, 내 명예를 분토에 묻어버리는 전도는 많지 않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혈육과 상의하지 않고 단순한 마음으로 하늘의 음성을 믿으며, 다수의 반대를 개의치 않고, 사업의 성공 여부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오직 하늘의 명을 쫓는 정신으로 전도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진짜 전도자의 숫자가 적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만 전도하려면 내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파심에 기초한 교회를 위한 전도나 애국심에 기초한 국가를 위한 전도에는 아직도 이기심이 섞여 있으며, 자아가 살아 있다.
자기에 죽고 세상에 죽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게 되며, 모든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두려움이 없는 자는 심령의 자유와 평안을 얻은 자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전도에는 걱정이나 전략, 수단 등으로 인하여 혼란케 되는 일이 없다.
세상이 전도자를 따라야지 전도자가 세상과 야합하여 안일을 꾀해서는 안된다.
온 세상 모두가 전도자에 맞서서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전도자는 혼자 서서 진리를 지켜야 한다.
이러한 전도자에게는 태산을 움직이는 태연함이 있으며, 성난 파도를 잠잠케 하는 평안이 있다.
전도는 하나님만을 위해서 해야 비로소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대세의 흐름을 역행하고, 대다수의 위협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만이 이웃과 세상을 위하여 유익을 줄 수 있다.
하나님만을 위하여 전도한다는 말은 뜬 구름 위에 앉아서 신학을 분석하고 성령의 기적을 기대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만을 위하는 전도는 자신의 교리와 맞지 않는 자를 괴롭히고 출교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한 전도라는 이름 하에 십자군을 파병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했던 것이 하나님을 위한 전도가 아니다.
정신병자를 마귀의 화신이라고 해서 물 속에 집어 넣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실천했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전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위한 전도에는 열심이 있는 반면에 동정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성실과 정직과 충성과 겸손과 온유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만을 위한 전도에도 결핍될 수 있는 정신이 있는데, 그것은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슬프고 외로운 자들을 껴안아 주며, 자신과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관용하는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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