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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크리스마스이브 - 김현자

Joyfule 2012. 12. 23. 08:42

 

  

우리 집 크리스마스이브 - 김현자

                                                

  잠실에 사는 큰 아들네 집 문안에 들어서자 하니(강아지)가 반갑다고 깽깽거리며 뛰어오른다. 허리에 두른 빨간 옷과 귀에 단 초록색 리본이 오늘이 특별한 날임을 말해준다. 널따란 거실은 추리를 비롯해 성탄절을 상징하는 갖가지 장식과 크고 작은 초들이 보기 좋게 장식되어있다. 어미의 정성과 솜씨, 치밀한 준비성이 엿보인다.
  이번 크리스마스이브 가족모임은 다른 때보다 한결 느긋한 기분이다. 지난봄 친손녀와 외손녀의 대학 입학으로 모든 집이 입시부담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리라. 부엌에서는 두 며느리와 딸이 음식을 만들며 내는 즐거운 소리가 새어나오고 CD에서는 연신 캐럴이 경쾌하게 흘러나온다. 


  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성탄예배를 드리기로 한다. 거실 이곳저곳에 꽂혀있는 색색의 초에 불이 켜진다.  전기 불까지 희미하게 해 놓으니 분위기가 한층 은은해진다.
  작은 아들이 들고 온 휴대용 전기 오르간을 설치하고 키보드를 조절한다. 키를 누르기에 따라 밴드소리도 나고 관현악 소리도 나고 성악소리도 난다. 큰아들이 전기 기타와 앰프를 들고 나와 곡을 맞춘다. 이 악기들은 분위기를 돋우고 사람의 맘을 설레게 하는 마력을 가졌다.  
  준비된 예배순서가 시작되고 인도자가 예배의 부름을 낭독한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다음에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반주에 맞추어 힘차게 부른다.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손자 손녀들이 번갈아 마태복음 2장을 3절씩 돌아가며 낭독한다.


  다음은 남편의 기도순서이다. 그의 기도는 언제 들어도 간절하고 은혜롭다. 기도를 마친 후 간단한 메시지도 전한다. 만주 훈춘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마을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 소년시절 사경회(査經會)에 강사로 온 길선주목사를 만난 것이 애국과 독립운동에 눈을 뜨게 한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 살아오면서 한 번도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은 것 등을 말하고 여기에 둘러앉은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당부로 끝을 맺는다. 


  예배가 끝나고 캐럴 부르기. 복사한 가사를 보며 오르간 반주에 맞춰 신나게 부른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初老)의 두 아들과 사위가 더 신나게 부른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를 부를 때 실제로 창밖을 내다본다. 흰 눈은 보이지 않고 아름다운 불빛들이 한강물위에 별처럼 총총히 박혀있다. 올림픽 대교의 불빛 사이로 승용차들이 붉은 줄을 그으며 흘러간다.  
  내가 처음 성탄절을 안 것은 언제였더라. 잠시 회상에 잠긴다. 언니의 이야기론 내가 댓살 쯤 되었을 때 식구들 모두 김제 박바우 근방에 있던 죽동교회에 가서 성탄예배를 보았단다. 그 때 내가 단위에 올라가 독창을 했다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 아마도 “그 어리신  예수 눌 자리 없어...”가 아니었을까.


  내가 의미 있게 성탄절을 경험한 것은 해방된 후였다. 당시 한국 YWCA의 고문으로 온 박에스더선생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소개한 것이다. 특히 1949년 YWCA에서 지킨 성탄절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나는 그 때 처음 크리스마스투리를 보았다. 박 선생은 소나무를 하나 구해놓고 색종이를 사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시내에서 색종이를 구할 수가 없었다. 


  마침 크리스마스 사흘 전 미국YWCA 여학생들이 보낸 소포가 도착했다. 그 안에는 손수 짠 벙어리장갑이며, 색연필, 캔디와 초콜릿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박 선생은 이것들을 나무에 주렁주렁 걸었고 또 헌 카드도 찾아서 군데군데 매달았다. 이렇게 장식하고 나니 눈부시게 아름다운 크리스마스투리가 되었다. 이 투리를 가운데 두고 이사, 직원, 공민학교 학생들 (학교를 가지 못하는 빈곤가정 소녀들) 100여명이 둘러앉아 여러 나라의 성탄절 풍습을 배우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 나는 Y의 수습간사였다.     

  
  “앗, 불꽃놀이다.”라고 외치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다. 동쪽 창문 쪽으로 다가서니 멀리 롯데월드에서 쏘는 불꽃이 화려하게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식구들은 잠시 구경하다가 다시 돌아와 캐럴 부르기를 계속한다. 지치지도 않고 부르고 또 부른다. “[화이트 그리스마스]는 누가 독창을 하면 좋겠네”라고 한마디 하자 사위가 목청을 가다듬는다. 마치 모두 일 년 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처럼 축제분위기에 깊이 젖어든다.
  며느리가 부엌에서 케익을 들고 나오면서 말한다. “예수님의 생일이니까 우리 해피버스데이 불러요. ‘해피 버스데이 투유, 사랑하는 예수님’ 하면 되겠지요?”
  참 아름다운 밤이다. 어른들에게는 어렸을 때의 추억을 회상하게 하고 젊은 세대는 추억 만들기의 밤이 되고 있다. 아이들이 이다음 어른이 되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살던지 성탄절이 되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리는 그런 크리스마스이브면 좋겠다.  

(2006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