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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생, 그 싱그러운 초록빛 시작 - 김열규

Joyfule 2012. 12. 21. 10:26

 

 

여생, 그 싱그러운 초록빛 시작 - 김열규

 

여생餘生! 나는 그 말을 구슬처럼 귀하게 섬긴다. 여생을 '살다 남은 인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쓰다남은 군더더기가 여생의 '여餘'일 수는 없다. 여생의 여는 넉넉하고 충만한 것이다. 풍요豊饒의 '饒와 뜻이 통하는 글자가 바로 여이다. 모자람 없이 풍족한 것이 바로 여이다. 여유餘裕의 '여'가 그걸 익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여생은 '여유작작 餘裕綽綽'하고도 '여유만만 餘裕滿滿'한 인생이다.

 

  요즘은 거의 매일 하루 24시간이 몽땅 내 시간이다. 엄청난 시간 부자이다. 그래서 나는 시간의 여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매사에 손을 놓고 빈둥대는 것을 삶의 여유로 여기지는 않는다. 넉넉하게 시간을 내서 즐기는 것, 그것이 바로 여생의 '여'라고 다짐해두고 있다. 물론 천천히 숲길이나 걷다가 돌아와서 녹차 한잔을 맛나게 끓여 마시고 늘어지게 낮잠을자는 것 또한 여생의 '여'의 필수조건이지만, 그게 아무래도 보람찬 일에 마음을 바치는 것만은 못한 것 같다. 그렇기에 나의 밭일은 그런 여유의 본보기 같은 것이다.

 

 나는 거의 매일 밭에서 일한다. 밭을 갈고 잡초를 뽑고 수확을 한다. 그게 내 농사짓기의 삼박자이다. 나의 밭일은 괭이질로 시작된다. 한동안 계속된 가뭄 끝이면 밭은 마치 콘크리트 바닥과 같다. 나는 악을 쓰면서 괭이를 내리찍는다. 그러다가 덜컹 소리를 내며 미처 캐내지 못한 돌덩이라도 괭이 끝에 부딪치면, 팔목에서 팔굼치를 거쳐 어깨까지 짜릿하게 전류가 흐른다. 때로는 그 느낌이 마치 쾌감처럼 전신을 감싸기도 한다.

 

 더불어 허리가 꼿꼿하게 펴진다. 아, 그때 느끼는 마음의 여유라니! 하늘이 유난히 맑은 것은 내 속내가 환히 들여다보여서일것이다. 두 평 남짓의 밭뙈기를 서툰 농사꾼은 한참 동안 그렇게 괭이질한다. 그럭저럭 괭이질이 끝나면 이제는 괭이를 내던지고 삽을 잡는다. 그리고 괭이에 찍힌 흙을 뒤집는다. 엎어놓는 족족 갓 들어난 거무죽죽한 맨 흙이 햇살에 눈이 따갑도록 어릿거린다. 그 재미에 손에는 힘이 오른다. 그렇게 흙덩이를 삽 끝으로 부수고 또 부순다.

 

 여기서 나의 서툰 밭갈이가 다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또 다른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갈퀴를 닮은 쇠스랑으로 밭을 긁어내는 것이다. 삽으로는 미처 다 부수지 못한 흙덩이를 잘게 갈면서 밭의 표면을 골라 나간다. 쇠스랑을 밀고 잡아당기면서 밭을 훑는다. 제법 오랫동안 그렇게 정성을 들이고 나면, 밭은 금방 잘 닦아낸 마루바닥처럼 된다. 저절로 손을 내밀어 만져보게 된다. 살금살금 어루만지는 손바닥에 번지는 감촉, 어린 시절 처음으로 잡아본 여자 친구의 보드라운 손이 산그늘에서 나붓댄다. 그런 소중한 삶의 자국을 다시 되새기는 일, 그것도 밭농사가 선사하는 생生의 여유이다.

 

 이제부터 마무리지어야 한다. 새로운 고랑을 몇 줄 파서 두둑을 쌓고는 이랑을 일군다. 그건 개간이 아니라 개척이다. 비로소 나의 땅이 만들어진다. 진짜로 내 땅을 갖는 기쁨, 내 땅을 향유하는 보람이 방금 갈아놓은 흙냄새와 어울린다. 이래저래 시간은 온통 내 몫이고 내 소유다. 내 삶은 여유로 향기롭다. 내 일은 여기까지이다. 나의 밭농사는 이제 갈무리된다. 그 뒤의 일은 아내 몫이다. 아내는 흙덩이를 헤집고 부숴서 곱게 다듬기 시작한다. 마치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곱게 매만지는 것처럼. "밭도 화장하는구나." 나는 소리없이 감탄한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밭을 계속 화장한다. 가로로 작은 고랑을 낸 다음 씨앗을 묻고는 다독인다. 젖먹이를 달래듯이. 흙도 저렇게 매만져야 비로소 화답해 주는 걸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슬쩍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차를 끓여 두 개의 찻잔과 함께 쟁반에 받혀들고 다시 밭으로 나온다. "자, 차나 한 잔!"  공들여 끓인 작설잎의 진초록이 눈부시다. 잣설차에 알알이 비친 햇살이 비취 구슬 같다. 아내는 찻잔을 들고는 밭에 철퍼덕 두 다리를 뻗는다. 나도 밭사이의 흙바닥에 허리를 내린다. 둘이서 "훌짝!" 입가심하듯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휴"하고 심호흡한다. 그 숨소리에 노랫소리 같은 가락이 실리면 허공을 맴돌던 황조롱이가 합창에 가세한다. 시간도 덩달아서 기지개를 켠다.

 

 그러고는 그도 철퍼덕 다리를 뻗고 우리 곁에 앉는다. 이게 우리 내외의 일상이다. 느긋하고 유유하다. 그렇게 우리는 살고 있다. 하루 24시간을 잠자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의 4분의 1 정도는 그렇게 밭에 바친다. 무, 배추, 상추가 자란 만큼 시간도 푸르게 싱그러움을 더한다. 집 앞을 차지한 40평 남짓한 밭의 가징자리에는 비파, 종려, 두릅, 엄, 무화과 따위의 키 큰 남국의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사이사이에는 동백과 탱자나무가 버티고 있다. 참, 현관과 밭 사이로는 은 목서 목서와 금 목서가 고즈넉하게 경계를 이룬다. 초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이들은 향을 피운다. 그러니 집은 영락없는 푸른 나무의 성이다. 뜰 안이 온통 나무로 여유작작이다.

 

 밭도 4분의 3 이상은 약초밭이고 꽃밭이다. 이름을 대려면 끝이 없다. 좀작살, 패랭이, 범부채, 둥굴레, 별꽃, 접시꽃, 꽃창포 등 도시 사람들에겐 생소한 화초들 말고도 해당화, 달맞이꽃, 산나리, 개나리, 쑥부쟁이, 작약, 구절초, 도라지, 꼭두서니 등 그야말로 백화난만이다. 꽃 또한 여유만만이다. 그러ㄱ에 집 주위와 마당과 집 안까지 사철 다른 나무 향기와 꽃향기로 자욱하다. 잔 바람이 일면 집 전체가 향으로 설레기도 한다. 차 맛에, 일도 시간도 모두 잊어버린다. 옆 밭의 보랏빛 상추가 작설차의 초록빛을 시샘하는 한 것 같아서 마시다 만 차를 살짝 끼얹어준다.

 

언제부터 밭에서 우리 두 사람의 역할이 나뉜 걸까? 절로 부부유별이고 남녀유별이다. 나의 일과 아내의 일이 착착 분업이 되어 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안사람 몫이고, 흙을 뒤집어 고르고 잡초를 소탕하는 것은 바깥사람 몫이다. 국회 아닌, '가회家會'에서 헌법이라도 제정하듯이 정한 것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만 그렇게 된 것이다. 우연찮게 자리 잡은 습관이 불문율이 되고 만 것이다. 우리는 그 법을 단 한 치도 어기지 않는다.

 그리고 단 한 순간도 서두르지 않는다. 시간에 묶여서 일하는 짓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우리의 일소에 맞추어 시간이 오고 간다. 우리가 여유 있는 마음으로, 또 너붓한 손놀림으로 일을 하면, 시간도 장단을 맞추어서 천천히 느린 걸음을 옮긴다. 그러니 시간가 우리는 서로 막역한 친구이다.

 

 시간을 벗 삼아 소꿉놀이라도 하듯이 시작하게 된 밭일, 그 풍족하고 풍요로운 여유로 우리의 여생은 배추처럼 푸르고, 무처럼 말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