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완서 어른노릇 사람노릇 에서-
운명적 이중성
- 박완서 에세이 에서 -
★ 70, 80대들이 격량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겪은 비애를 진솔하게 기록한 삶의 역사입니다
14년전에 쓴 글 전문을 2회로 나누어 올립니다
우리 60대들이 모이면 흔히 하는 말이 우리처럼 시대를 잘못 만난 세대도 없을 거라는 한탄이다.
비록 남북이 분단된 불완전한 평화이긴 하지만
근 반세기 가깝게 전쟁없는 세상을 다리 뻗고 누리다보니,
소년시절부터 청년기까지 한창 좋은 나이를 중일전쟁 이차대전, 6'25남침 등
쉴새없이 겪은 전쟁의 공포와 궁핍이 우리 세대만의 불공평한 불운처럼 느껴져서 억울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한탄 속에는 일말의 자긍심 또한 내포돼 있는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여름엔 쉰 밥을 씻어먹고, 겨울이면 구들장 밑에 살인가스를 깔고 자도
윗목에서는 걸레가 어는 추위를 견딘 우리 세대로서는 도무지 실감이 안 나는
만불시대의 풍요가 다 뉘 덕인 줄 아느냐?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견딘 내핍과, 초인적인 노동과,
지칠 줄 모르는 교육열 덕이라고 은근히 뽐내고 싶은 것이다.
그래 그런지 우리 육십대들은 할 말이 많다.
나만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늦게 등단하게 된 이유를 물으면
오백 년은 산 것 같은 체험의 부피 때문에 쓰지 않을 수가 없었노라는 대답을 흔히 해왔다.
그건 궁핍과 풍요, 전쟁과 평화, 식민지 시대와 자주독립국가시대를 두루 경험한
우리 세대 공통의 시간 감각하고도 또 다른, 나만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조금도 과장없는 진실이다.
농경시대의 수공업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산골 벽촌에서 태어나서
오늘날 천만 인구의 수도 서울 첨단의 아파트촌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나라는
개인을 스쳐간 문화의 부피가 나로서는 그렇게 버겁게 느껴진다는 얘기이다.
사실 내가 태어난 마을과 비슷한 이웃마을에서 태어나 우리 마을로 시집와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우리 할머니의 육십 평생과 나의 육십 평생의 경험의 부피를 비교해 볼 때,
오백 년이라는 어림짐작도 과장은커녕 과소평가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많은 걸 보고 듣고 겪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풍부하고 특별난 경험에서 얻어진 지혜가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하고
때로는 귀찮아하고 천대까지 받는다는 게 우리 세대의 자격지심이자 비애이다.
우리세대의 가장 큰 자부심은 가난을 극복한 주역이라는 것,
바로 그점이 우리 시대의 약점이 될 줄 어찌 알았을까.
아무리 공치사를 안하려고 조심을 하느라고 하건만도 워낙 가난의 기억이
우리 의식 속에 강력하게 늘어붙어 있는지라 어느틈에 그 티를 내고 만다.
그건 곧 구박을 자초한 결과를 가져온다.
자식들이 멀쩡한 가구나 가전제품을 바꾸는 걸 예사록게 보아 넘기지 못하고,
먹다 남은 음식을 그 자리에서 쓰레기통에다 버리는 걸 보면
천벌이 내릴 것 같아 기어코 한마디 하고 만다.
그래서 아들 며느리한테 구박을 받고 손자들은 아예 상대도 안하려 든다.
내 친구 중의 하나는 멋쟁이 며느리가 계절이 바뀔 때마도 한 보따리씩 버리는 옷이 아까워서
몰래 집어다 두었다가 파출부한테 선심을 썼더니,
파출부가 할머니한테 무시당하기 싫어 그만 다니겠다는 통고를 해왔다면서
서럽고 억울해서 울먹이며 친구들한테 전화를 해댔지만
아마 집에서 며느리한테는 한 마디도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 사촌벌 되는 동갑내기 오라버니는 딸네 집에서 며칠 유하러 갔다가
딸이 식탁에서 아버지가 남긴 음식을 곧장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보고
딸이 그음식을 께적지근하게 여겨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큰소리로 호령을 하고 나서
하룻밤도 안 자고 아들네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의 며느리 역시 먹던 음식은 자식이 먹던 거건 부모가 먹던 거건 다시 상에 올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인데
다만 안 보는데서 그렇게 한다는 것만이 딸과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그 며느리 역시 시아버지 보는 앞에서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버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대단한 시집살이처럽
일가친척 한테 풍기고 다닌다는 걸 그 노인이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며느리는 그후 시아버지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신경안정제를 상습적으로 복용한다고 했고
시아버니는 아직도 며느리로부터 봉양을 받는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우리 세대가 받고 있는 효도라는 게 실은 이렇게 위태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 가정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우리 육십대는
소시적에 거의 다 노부모를 모신 경험이 있고,
전쟁중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노부모와 한방을 쓰는, 기막힌 신혼시절을 겪은 이도 적지않다.
그러나 지금은 완벽하하게 개인 생활이 보장된 아파트나 단독주택의
가장 인기없는 방 한 칸을 내주기만 해도 효자소리를 듣는 자식 밑에서 눈칫밥을 먹고 산다.
더 기막힌 사실은 우리는 우리의 윗대처럼 경제적으로 전적으로 자식한테만 의존하지는 않으려고
나름대로 준비를 해왔건만도 그런 열악한 지위를 감수한다는 사실이다
대가족제도의 장단점과 돈의 중요함을 일찍부터 터득했을 뿐 아니라,
산업사회화가 생활의 여유와 함께 여권신장 핵가족화 등
노후를 위협하는 징후를 충분히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퇴직금이나 자기 명의의 집 한 채 정도는 움켜쥐고 있는 게,
중산층 60대 들이 그 윗대들과 다른 점이다.
마음만 먹으면 따로 나와 생활을 즐길 수도 있으련만 자식하고 같이 사는 게
남보기에 좋다는 순전히 외관상의 이유로 속으로 곯는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흔히 한국사람을 부정적으로 말할 때 내실보다는 체면을 중시하고,
내가 어떻게 느끼나 보다는 남이 어떻게 볼까를 더 중하게 여긴다고 말하는데
그 대표적인 세대가 60대가 아닌기 싶다.
60대의 또 하나의 슬픈 특징은 자랑거리가 없는 세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제시대하고도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술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시기에 태어났다.
특별히 의식있는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라면 모를까,
보통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는 일본이 우리 조국인줄 알았다.
신사참배하면서 진심으로 일본이 승리하길 빌었고 궁성을 요배할 때는 가슴이 울렁거렸고,
미국과 영국은 사람의 탈을 쓴 귀축(鬼畜)인 줄 알았다.
우리의 할아버지대만 해도 조선왕조의 추억이 있고,
우리 아버지대는 3.1운동의 찬란한 긍지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구전으로라도 우리에게 물려줄 엄두를 못 냈다.
보통의 소심한 식민지 백성에 불과했던 그들은 조선이 독립할 수 있으리라는 걸 감히 상상도 못했고,
자식대라도 갈등없이 일본화되어 일본 사람과 동등한 삶을 누리길 바랬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이북 어린이들이 땅을 치고 통곡하는걸 보면서 어떻게 아이들이 저럴 수 있나,
필시 살기 위한 연극일 거라고 비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일제를 격은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수도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비인간적 독제체제가 국민을 외부와 고립시켜 길들이기로 작정을 하면,
인간을 얼마든지 바보나 꼭두각시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길러질 뿐이라는 걸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게 바로 우리 육십대의 가장 큰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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