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완서 어른노릇 사람노릇 에서-
운명적 이중성
-박완서 에세이 에서-
★ 70, 80대들이 격량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겪은 비애를 진솔하게 기록한 삶의 역사입니다
14년전에 쓴 글 전문을 두번째로 나누어 올립니다
일본이 망할 수도 있다는 게 우리에게 희미한 희망이 되기 시작한 건
이차대전의 패색이 짙어질 무렵이었다.
그제서야 우리 부모들은 마침 징집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우리를
전전긍긍 숨기기도 하고 시골로 피난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징병이나 징용을 피할 구멍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만약 최일선에 서게 된다고 해도
일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처음으로 민족의식을 일개워주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희망과 용기가 생긴 탓도 있었지만,
그무렵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방송수신기는
비로소 외국에 있는 독립운동세력의 존재를 확신시켜 주었고,
그건 유언 비어의 형식으로 조선사람 사이에 널리 유포됐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들을가봐 쉬쉬 목소리를 죽여가며
수근수근 이승만, 김구, 김일성 이름이 오르내렸다.
한치 앞을 못 내다보고 오로지 노예처럼 기기만 하던 백성이 비로소 고개를 들고 앞을 내다보기 시작했고,
그 아득한 미래의 지평에 영웅들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때 들은 영웅들의 일화 중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게 김일성에 관한 거다.
그는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에 몇 백 리식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발치산 활동이 그렇게 과장되고 신비화된 거였다.
드디어 일본이 망하고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승리가 가져다준 선물일 뿐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건 아니었다.
그래서 절대로 안 망할 줄 안 신국(神國)을 무너뜨린 눈부신 강자들이
우리의 조국 한허리를 직선으로 두부모 자르듯이 잘라놓아도 끽소리 한마디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와 독립이란 당하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거여야 하거늘, 우리는 한 게 너무 없었다.
귀국한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이 그나마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줬지만,
그들의 세력다툼도 보기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열 살이 넘어서 스무 살이 다 되어 비로소 한글을 가갸 거겨 부터 배우는 창피밖에 뽐낼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분단은 국토에만 한한 게 아니었다.
부모자식간은 죽으나 사나 공동운명첸줄 알았는데, 연합군이 국토를 갈라놓은 것처럼
연합군이 가져온 좌우의 이데올로기가 부모자식 사이 까지 이간질시켰다.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인, 부모세대가 현실안주적이라면
자식 세대가 이상주의적이라는 평범한 세대차가 좌우의 대립이라는 사상적 갈등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이제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주제에 무슨 투철한 사상이 있었겠는가.
우리는 젊은 혈기로 우리가 안 가진 걸 원했다.
북쪽에 이상향이 있을 것 같았다.
북쪽이 단행한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건 친일파의 철저한 숙청이었다.
해방 후으 남쪽 정국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건 친일파가 여전히 거들먹거리며 요직을 차지하고,
일제의 충직한 개 노릇을 하던 악명높은 형사가
빨갱이 잡아들이는 도사로 둔갑하여 경찰 간부가 돼 있다는 기막힌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리 부모세대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어디 있느냐는 식의
편리하고 구역질 나는 아량으로 오직 미군이 베푸는 밀가루와 캔디에만 정신이 팔려 잇었다.
삼팔선을 꾸역꾸역 넘어오는 북쪽 사람들의 이북정치에 대한 증언도 우리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했다.
월남민들은 다 지주나 친일파 계급이려니 싶었던 것이다.
남북이 따로따로 독립을 하고 나서 6'25전쟁이 터지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사회주의 체제에 호감을 가졌던 우리의 꿈은 산산이 깨졌다.
이상주의란 결국은 자유주의였던 것이다.
깨진 꿈을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우리는 북으로도 끌려가고 남쪽에 남아 국군이 되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마침내 빛나는 이십대가 돼 있었고,
우리가 떠다 밀리다시피 얼떨결에 주역으로 등장한 첫무대는
불행하게도 동족상잔이라는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잔인한 전쟁터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세대는 다시 우리 세대끼리 분열하여 좌우 남북으로 편을 갈라 필살의 총부리를 겨누었다.
내 졸업 앨범을 보면 한 반에 일 할 정도가 6.25때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여고졸업생이 그 정도니 남자들은 그 정도가 훨씬 더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어떤 이민족끼리도 그렇게 잔인하게 싸우진 못할 것이다.
내 핏줄한테 총을 겨누기 위해선 그 정도로 잔인해질 수밖에 없었다.
살상은 전선에서 만 행해진 게 아니었다.
후방에서도 저놈은 빨갱이라는. 저놈은 반동이라는 손가락질 한 번으로
간단하게 남의 목숨을 빼앗을 수가 있었으니까.
우리는 그때 사람도 아니었다우, 라고밖에 그 당시에 대해 할 말을 잃는다.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고도 통일은 되지 않았다.
직선으로 그어졌던 삼팔선이 휴전선이라는 곡선으로 바뀐게 그 엄청난 희생의 대가였다
그리고나서 거칠 것 없는 이승만 독재, 반공이 국시가. 빨갱이로 모는 게 정적을 숙청하는
가장 간단한 수단이 되어도 우리는 수굿이 할말을 잃었다.
어떻든 공산치하보다는 낫다는 걸 몸소 체험한 뒤였으므로,
그런 세상에 살아남은 우리는 결혼을 하고, 자식새끼를 놓아 식구를 불리고,
자식이라도 좋은 세상 보게 하려고 마소처럼 일해서 번 돈을 교육비에 아낌없이 부었다.
4. 19가 이승만 일인 독재에 종식을 고했지만 우리 세대는 부끄러운 목격자였을 뿐 주역은 아니었다.
삼일운동이 우리에게 빛나는 전설이었을 뿐 주역은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역의 자리가 주어졌던 것은 오직 6.25전쟁밖에 없었다니, 우리는 얼마나 불쌍한 세대인가.
4.19의 감동은 목격자 노릇만으로도 벅찬 것이었자만,
그후에 목격한 좌절의 쓴 맛은, 학생운동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인 시각의 뿌리가 되었다
그후에 등장한 군사정권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숨통을 운동권에 걸면서도
내 자식만은 거기 휩쓸리지 않기를 바랬다.
어느새 우리 세대는 대학생 자녀를 거느리게 된 것이다.
최루탄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자식을 붙들고 눈물겨운 설교를 하다가도
다음날 등교하는 자식의 등 뒤에다 대고는
정 데모를 할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앞장은 서지 말아라,
맨 뒤에도 서지 말고 가운데쯤에서 얼쩡대라는 비열한 절충안을 내놓곤했다.
그건 곧 혁명에 대한 우리 세대의 본심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른 자식들이 자라서 이제 제 자식을 거느리고,
제자식 귀한 줄만 알지 부모는 쉰 밥 알듯 하면서,
일과 여가를 적당히 즐기는 한창 나이가 돼 있는 게,
우리 육십대의 한심한, 그러나 아직은 동정받고 싶지 않은 평군치의 처지이다.
일전에는 정년퇴직한 육십대의 스승님을
단체로 모시고 일본여행을 다녀온 젊은이한테 이런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 스승님들은 평소 어찌나 반일감정이 철저한지
일본을 한번도 일본이라고 제대로 부르는 걸 못 봤다고 했다.
쪽발이 아니면 왜놈이라고 불렀고, 우리말 속에 남아 있는 일본말의 잔재에 대해서도
어찌나 민감한지 그 앞에서 함부로 말하기가 겁나는 철통 같은 민족주의자들이어서
일본 여행을 권할 때도 적을 제합하려면 적을 알아야 된다는 식의
적대감을 부추겨서 겨우 성사를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말이 통한다는 걸 안 그 스승님들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의기양양해져서 제각기 개인 행동을 하려 들었다.
어느 날 밤에는 숙소에 한 명도 안 남고 다 외출을 했는데 일본인 동창을 만나러 나갔다는 것이었다.
하긴 동창에 국경이 어디 있겠는가,
거기까지는 좋은데 단체로 동창과 한 자리에 모일 기회를 마련해서 거나하게 취하자
일본 노래에다 일본 군가까지 뽑는데,
그 향수어린 감개무량한 표정은 차마 못 봐주겠더라는 것이었다.
그 젊은이는 필요에 의해 배운 일본어지만 유창한데,
노인들이 하는 일본말은 오랜만에 쓰는 거라 옆에서 듣기에 얼굴이 화끈해지는 정도건만
어디서나 그걸 써먹지못해 나서니 정말이지 민망해서 죽겠다라는 것이였다.
창피하더라도 이해해다오, 우리는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단다.
우리는 삼일운동 세대도 사일구 세대도 아니란다. 우리는 정통 육이오세대일 뿐.
그동안 너희들이 유창하게 하는 꼬부랑말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단 하나 할 줄 아는 외국어를 그렇게라도 과시하고 싶었겠느냐,
그렇다고 그분들의 반일감정이 가짜라고 비웃지 마라,
우리 세대의 운명적인 이중성일 뿐인 것을.
우리는 기꺼이 현재 너희들이 누리는 부의 밑거름이 됐으면서도,
돈의 중요성과 함께 돈의 가치의 부정적인 면을 함게 궤뚫고 있는 마지막 세대가 아니겠느냐?
그것만은 인정해다오.
소설가 박완서님은
1931. 10. 20 경기 개풍~ 2011. 1. 22 서울.
대중인기작가이면서 문학성도 뛰어난 작품을 발표했다.
1944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호수돈여자고등학교로 전학했고
해방이 되자 다시 숙명여자고등학교로 돌아왔다.
이때 한말숙 ·박명성 등과 사귀었으며, 담임교사인 월북 소설가 박노갑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50년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6·25전쟁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오빠와 삼촌이 죽자 생계를 잇기 위해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했으며,
이때 화가 박수근을 알고 그의 그림에 감명받았다.
1970년 〈여성동아〉에 장편 〈나목 裸木〉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고
이어 〈부처님 근처〉(현대문학, 1973. 7)·〈주말농장〉(문학사상, 1973. 10)·
겨울나들이〉(문학사상, 1975. 9)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76년 〈동아일보〉에 〈휘청거리는 오후〉를 연재했다.
수필집으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1977)·〈살아있는 날의 소망〉(1982) 등이 있으며
〈서 있는 여자〉(1985)·〈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등의 소설을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40세의 늦은 나이로 출발하여 20년 동안 100편 안팎의 소설을 썼으며 많은 문제작품을 써냈다.
6·25전쟁의 아픔과 분단의 사회현실을 그대로 그려내고
개성을 잃어가는 순응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980년 한국문학작가상, 1981년 이상문학상, 1990년 대한민국문학상, 1993년 현대문학상,
1994년 동인문학상, 1999년 만해문학상, 2000년 인촌상, 2006년 호암예술상을 받았다.
지병인 담낭암으로 투병하다 2011년 1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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