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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구약이해와 기독교의 구약이해

Joyfule 2019. 12. 9. 20:01


 

      유대교의 구약이해와 기독교의 구약이해

 


 들어가는 말

 

창조의 주요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우리 인간 역사 속에 성육하셔서 우리 인간구원하려 하셨고 지금도 그 구원의 역사는 결코 중단됨 이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다.

 

이 사실은 성서가 증언하는 불가항력적인 진리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널리 주지되어 온 흔들릴 수 없는 신앙이다. 그러나 이 신앙은, 그 무엇보다도, 히브리 성서(TaNaK), 즉 “구약성서”를 통하여 증언된 것이다(렘 31:31, השׁדח תירב LXX의 렘 38:31,διαθήκη καινή; 고후 3:14παλαιὰ διαθήκη→고후 3:6 καινὴ διαθηκή ; Cf. 고전 11:25; 갈 3:19; 히 8:6-13; 9:15; 12:24). 즉 이 사실은,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실제적(본질적)으로는 “신약성서의 구약인용”으로부터 비로소 확인되기 시작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구약성서의 본래적 구속사(救贖史)에서부터 신약성서의 구속사에로 나아가는 그 길 도상에서 확인된 진리라고 하겠다.

구약성서는 신의 “약속”(“땅, 후손, 축복”에 대한 약속,창 12:1-3)과 더불어 시작한 책(βίβλος)이다. 그러므로 그 “신의 약속” 주제는 그것의 “성취”를 향한 긴 신의 구속사 섭리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성취”의 구속사는 성취 지연의 긴 수난의 과정을 거친 후 마침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잠정적으로는”(=모범적으로는) 이루어진 듯하였다(6경). 그러나 <약속-성취>의 그 구속사는, “참 성취”를 아직도 여전히 기대하면서, “옛것들”(“리쇼놋”, תונשׁאר; 출애굽, 시내산 계약, 다윗 왕조 등) 저 너머에 있는 “새로운 신의 사건들”(“하다숏”, תושׁדח; 새로운 출애굽, [예레미야의]새로운 계약, 새로운 다윗과 새로운 신정[神政] 등)을 향하여 앞으로 계속적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 <약속→성취의 구속사>라는 역사 선상의 결정적인 정점에 예수 그리스도의 토라 재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 등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고/약속된 그 신의 구원사의 성취(cf. 눅 4:21; 24:27)로서의 “새 것”(“하다샤” השׁדח )으로서 나타났던 것이다. 바로 이 사실에서부터 비로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불가분리적 통일성이 확고하게 수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속사의 그 절정점 또는 중심점(mid-point)에 예수 그리스도가 서 있다는 신앙을 그 핵으로 하고 있는 기독교는, 그러한 이유로, 유대교 및 이슬람과 함께 히브리 성서(구약성서)를 그 존재의 기반(경전[經典])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막스 베버(Max Weber)는 구약성서의 존재 의의를 다음과 같은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 바가 있다: “[히브리] 민족의 종교적 발전이 세계사적 의의를 갖게 된 것은 「구약성서」를 만든 것에 그 이유가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 구성의 중심축인 구속사의 의미를 해석하고 이해하며 실천하는 그 관점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그 길을 달리 하였던 것이다.

 

1. 유대교의 구약 이해

 

유대교의 출발점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조국 귀환(기원 전 538년)을 할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즉 포로기 말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토라”(Torah, הרות, 오경)를 가지고 귀환한 에스라와 예루살렘 재건의 책임을 가지고 귀환한 유다 총독 느헤미야가, 그 중에서도 특히 에스라가 페르시아 정부의 허락 하에 “토라”를 경전적인 권위를 가진 “규범서”(規範書;“카네” הנק, “카논” κανών→canon)로서 합법적인 선포를 하기 시작한 그 때(기원 전 약 44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에스라”는, 비록 역대기역사 학파의 강한 영향 때문이라고는 하더라도, 이 때문에, 유대교의 조상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고 유대교도 또한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법의 종교”(religio licita)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유대교는 기원전 4-3세기의 그 모호한 시대를 거쳐서 주전 2세기 초반 무렵 마카비 상․하와 같은 자료들이 나타나면서야 비로소 그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이 포로기 이후의 유대인 공동체인 유대교는 결코 단순히 포로기 이전의 그 “이스라엘 민족제의”가 복원된 체제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유대인공동체가 이전의 것과 전혀 단절된 “다른” 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로서 등장한 것인 것도 또한 역시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거기에는 ①포로기가 준 좌절의 고통을 통하여 철저히 “정화된 남은 자들”이라고 자처하면서, 그러므로, 자신들만이 배교자인 사마리아 공동체와는 구분되게 야훼 공동체의 상속자들이라는 배타적 확신을 갖고 있는 자들이 거기 있었다는 것과, ②이러한 “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적절한 기반”은 전적으로 ⓐ“토라 준수”와 ⓑ“성전재건”이라고만 믿는 “엄청나고 지나친” 확신이 또한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교”가 출발한 그 초기의 정체성이었다. 실로, “토라는 유대교였고 유대교는 토라였던 것이다!”


이러한 유대교의 발전 과정에 대한 정보는 포로기 이후의 정경 자료들과 후기 페르시아와 희랍-로마 시대까지의 비(非) 정경자료들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데, 이들을 통하여 추론할 수 있는 바에 의하면, 유대교는 한 마디로 반(反) 사마리아적인 신정이념(神政理念)에 기초하여 “토라의 절대화를 배타적으로 지향하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유대교의 “특유성”은 오경 편집자로 추론되는 사제 신학자(P)에 의하여 기안되고 역대기 역사가(chr.)에 의하여 첨예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 정체성의 절대적 토대였던 “토라”에 대한 유대교의 이해와 응답이 우리의 주요 논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토라의 절대화는 그 실현이 현실적으로도 물론 불가능하였지만, 토라의 왜곡 해석에 의한 “율법주의” (νόμism → legalism)라는 기형아도 또한 산출해 내기도 하였다.


(1) 유대교의 구약성서는 토라의 “반복적인 준수”(keeping)만을 엄격히 요구하는 신언(神言)이었다.

“토라”(הרות, torah)는 본래 “야훼 하나님의 가르침, 지침, 지시”로서 법적이고도 동시에 계약제의적인, 그러므로 야훼와의 인격적인 계약관계에 철저히 기초한 “계약 공동체의 규범 서”라는 정체성(“하나님-인간관계”를 바르게 이끄는 “길”[ךרד, λόγος, ὁδός]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토라”의 본래적 의미는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교가 페르시아, 희랍, 로마 등의 인본주의적 세속주의와 맞부딪히면서는 점차적으로 그 본궤도를 이탈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토라”는 모세를 통하여 받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영원 전부터 존재해 온 절대적 가치로서 절대화되었고 그러므로 토라의 요구는 태고의 시대로까지 소급되어 안식일 준수의 요구는 심지어 천상의 천사들에게까지도 부여하였고 이스라엘의 선택사건은 천지창조 때 이미(!) 선언된 것으로 간주하였으며(요벨서 2:15-33) 레위기의 정결법은 하와의 경우에도 적용되는 것(요벨서 3:8-14)이라고까지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이 모든 계명들은 하늘의 서판에 기록되어 있다(요벨서 3:10; 4:5; 5:13 등)고 신비화시키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토라우상화”(율법주의)에 저항하는 반유대주의 이념(anti-Judaism)이 예수와 그의 사도(특히 바울)들 사이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토라”는 비록 미드라쉬(midrash)의 교육과 그리고 “미쉬나”(mishnah)에 대한 탈무드적인 교육에 따라서는 그 의미가 다양하게 전수(傳授)될 수 있다고는 할지라도, 그것은 대체로 단순하게 법적 효과만을 얻기 위한 형식적이고도 규제적인 제의규정과 생활규정의 관례라는 의미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 마침내는, 하나의 무미건조한 조문 나열 형식(고후 3:6)의 엄격한(!) “법률”(아람어의 “다트”תד, 그리고 LXX의 “노모스”νόμος가 지닌 부정적인 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토라”의 본질이 가진 높은 가치와 그 “토라”에 대한 그들의 열렬한 충성심으로 미루어 본다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그렇게, “유대 종교”를 단순하게 “형식주의 종교”의 대명사로만 일괄 매도하여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의 토라 사랑은, 그 죽음을 불사하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오직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데에(in keeping/observing) 집중되었고 그 대신 “토라”에 대한 내적인 마음의 태도나, 사랑을 베풀어 토라를 실천하는 일에 집중되지는 않았던 것이다(not in performing). 예컨대, 안식일 계명에 대한 유대교의 해석학적 태도는 그 계명의 진정한 의미(인간 해방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기초로 하여 안식일 정신을 실천하는데 열중하게 하기 보다는(not in performing) 그 계명 조문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데에만(but in keeping) 열중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안식일 준수 요구는 심지어 천사들에게까지 부여하는 후기 유대교의 억지(요벨서 2:15-33)가 터 닦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성서에 대한 유대교의 “토라” 이해와 기독교의 “토라” 이해 사이의 일종의 “분기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자신의 모든 특징적인 구성 요소들을 조직할 때 모든 것을 “토라”의 잣대에 따라 편성하여야 하였고 따라서 “토라”에 대한 해석이 내린 규제가 포로 후기 유대교 구성에 최고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처음 등장한 “토라”가 “모세 오경”이었고 이 모세 오경이 포로귀환 공동체 안에서 에스라의 노력에 의하여 처음으로(기원 전 621년에 있었던 신명기에 대한 경전적인 권위 부여는 신명기에 한한 것임) “정경”(正經)의 최고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토라”의 문자적 준수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성전제의”의 문자적 준수란 포로기가 끝난 이후의 제2 성전건축(기원 전 520-515년)이 완성된 이후라고 하더라도 거의 그 실현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한 증거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대교의 해석학적 오류를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한 대안으로서 나타난 <“회당 제도”에 의한 토라 교육의 출현>이었다고 하겠다.


회당(會堂; οἶκος συναγωγῇς[=συναγωγῄ], προσευχή)은 어디까지나 바벨론 포로기와 같은 성전제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시기에 생겨난 하나의 사회적 변화현상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하겠다. 에스겔 11:16의 탈굼(Targum)은 이방에 흩어진 이스라엘을 위하여 잠시 동안 <나의 성소를 대신하는 회당>이 되어 주겠다고 야훼 하나님께서 예언자 에스겔에게 약속하신 것이라고 본문을 고쳐 읽었는데, 이것은 바벨론 포로기를 회당제도의 기원으로 보게 하는 한 좋은 예라고 하겠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기와 같은 그런 역사적 대 격변이란, “율법주의”의 교조라는 것은 생명력이 없다는 것(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 고후 3:6)과 성전제의의 항구적 보존이란 현실적으로 실현불가능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변화들이 곧 “토라”의 그 진정한 본질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깨닫게 해주는 하나의 “신의 섭리”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달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일한 구속사적 대망 속에 살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전개된 이후까지도 그러한 역사적 각성을 이룩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즉 그들은 여전히 “토라”의 문자적 준수(keeping)에만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토라”(오경)가 본래(!) 지향하는 구속사적(救贖史的) 증언에 대한 관심이 그들의 최우선의 과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2) 유대교는 신정정치에 대한 헛된 꿈에 매달려서 구약성서를 “현상 유지” (status quo)를 지지해 주는 신언(神言)으로 오해하였다.

회당 제도에 의한 유대교의 열렬한 “토라 교육”에도 불구하고 “토라” 속에 담긴 신의 구속사적 의지에 대한 올바른 판단에 이르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들의 그 해석학적 오류 이외에도 그들이 갖고 있었던 신정이념(神政理念)의 구현에 대한 그들의 그 지나친 집념과 미련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실로, 민중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종말론적 희망”이 호되게 시련을 겪었었던 그 극단적인 수난에도 불구하고, 별의 아들 "바․코흐바"(Bar Kochba)의 그 장엄한 출현은 한낱 “허위의 아들”이 준 “헛된” 메시아적-종말론적 희망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한낱 고고학 문서조각이 되어 사해 가까운 곳의 무라바아트(Murabba`at) 동굴 속에 버려진 채, 역사의 배후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코흐바의 죽음은, “통곡의 벽”(Klagemauer)에 서려 있는 고통스러운 전승과 함께, 성전 제의와 사제를 중심으로 한 신정정치 건설에 대한 후기 유대교의 꿈이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증언해 주었던 것이다. 예컨대, 신정제의를 주재하는 자는 대 제사장이었지만, 점차로 그 “신정을 이끄는 사제의 기능”은, 유대교 사회에서는, 그 공동체의 “세속적 군주”의 기능으로만 변질 되어갔다는 것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도 또한 “토라”에 대한 해석학적 오류에서부터 기인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상, 이스라엘의 구속역사(救贖歷史)는 지상 위에 있는 한 특수 민족의 신정(神政) 체제(사제에 의한 것이든, 왕에 의한 것이든)를 세우는 데에 그 목표로 둔 것은 그 출발 때부터(창 12:1-3;) 결코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포로기의 각성이 있은 이후의 정화된 “선민”(選民) 이스라엘을 향하여 구약성서 최대의 신학자인 제2이사야(포로 말기의 익명의 예언자)가 영감을 받아 선포하였던 그 말씀(사 49:6)이 잘 말하고 있듯이, 참 선민(選民) 이스라엘이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열국[이방나라들]의 빛”이어야만 하였을 뿐이다. 분명히 이것은 선민의 특권을 공인해 준 말이 아니라 “열국의 빛”이라는 것은 “선민에게 특별히 지워진 과제”를 가리키는 말일 뿐, “선택되었다는 것”은 곧 포로 귀환민인 이스라엘에게는 하나의 “보다 큰 새로운 과제(=임무)”가 지워졌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은, 포로에서부터 해방되어 돌아오는 그 순간부터, 즉 유대교가 출발하는 그 순간부터 스스로 자신만이 “참 이스라엘인”이라는 배타적인 독선적 의식과 함께 그 특수주의적인 성향(tendency)을 고집스럽게 견지하였기 때문에 그 본래적 의미를 크게 훼손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이방인과의 격리주의라는 형식을 띠고 “유대교 문학”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격리주의는 이방인들에게는 물론이고(토비트 4:19 “어느 민족이나 다 그런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민족에게만 친히 온갖 좋은 것들을 베풀어 주신다. 주께서 원하지 않는 민족은 여지없이 멸망시키신다.”) 유대인 동족이라고 할지라도 또한 “율법주의 족쇄”(신정 이념의 사슬)에서부터 일탈을 하는 경우에는 동정을 주지 않고 여지없이 “격리의 대상”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시편 119:53,113,158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 “내가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을 미워하나이다.”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된 자들을 보고 내가 슬퍼하였나이다.”)

이러한 성향의 악성(惡性)을 표출시킨 그 대표적인 예로서 우리는 <북 이스라엘을 “참 이스라엘 역사에서” 제거한 역대기 역사서의 역사가가 취하였던 역사기술>의 그 행동과 에스라 귀환 활동과 더불어 활성화된 후 신약시대에까지도 거두어들이지 않았던 그 <사마리아 공동체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의식(敵對意識)>, 그리고 “야훼의 날”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민족주의적 선민사상과 결부시킨 것(사 61:2b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 cf.슥 9:9f.) 등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배타적 특수주의(particularism)는, 그러나, 예언자들의 보편주의(universalism)이념과 야훼 유일신 신앙의 탈 민족주의, 그리고 종말론적 신앙의 묵시문학적 성격에로의 변환, 등등과 같은 탈(脫) 특수주의 성향과의 긴장관계는 포기하지 않았다는 면도 있었으나, 그러나 이 모두의 탈 특수주의 성향 속에도 민족주의적 색채는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 신앙”이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종교”라는 제도권 속에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참 종교이기 위하여서는 그러한 “민족주의적 기반”은 깨끗이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야비스트(not Elohist)가 지향하였던 것이고 기원 전 8세기 예언자들로부터 제2이사야에 이르기까지의 정경 예언자들도 한 결 같이 추구하고 호소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부터 줄곧 열렬히 “토라 중심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그 민족주의적 특수주의는 사두개파, 바리새파, 열심당파(Zealots)에서는 물론이고 엣세네-쿰란 종파의 수도원적-이원론적 영성운동 속에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이것은 분명 포로 전기 히브리 종교(구약성서)의 이념세계로부터는 상당히 퇴보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 역시 구약 정경에 대한 유대교의 해석학적 오류에서부터 기인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유대교는 구약종교의 미래를 미드라쉬-탈무드의 전통(the Midrashic-Talmudic traditions)을 따라 무기한 성취 없는 세계로 연기시켜 간다.

경전 이해에 있어서 중심 되는 문제는 역시 “해석학”의 문제다. 이러한 사실의 중요성에 대한 파악은, 특히 구약성서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후기 유대교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예수 운동에 기초한 신약성서 종교가 그 뒤를 따랐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후기 유대교가 구약(히브리 성서)에 대한 “해석 전통”을 이토록 광범위하게 확대하여 갔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토라”의 절대적 가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해석학의 전통을 수립하여 천년 세월이 넘도록 토라 교육을 시행하였으나, 그러나, 토라의 진정한 의미가 유대교 안에서 밝혀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미드라쉬-탈무드”의 해석전통이 히브리 경전(구약성서)에 대한 실패한 해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지는 못하고 단지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도덕교훈”(Methilta' 2:25)을 반복하여 되풀이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서 본문의 어휘와 구문론(syntax) 설명, 그리고 당대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현대적 풀이를 하는 것과 그 설명된 본문을 “반복해서 명료하게 발음하는 것” 등에 주로 그 교육목표를 두고 경주(傾注)하였을 뿐이다. 미드라쉬가 설명하고 해석해 준 바에 의하면, 히브리 성서가 전하는 바는 다음 세 주제로 해석되고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1)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본질을 그 속성에 따라 설명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한 경외감에서 비롯된 것일 뿐, 그 해석학적 강조점은 신명기 6:4와 그 유사구절에 대한 강조가 그 중심이 되므로 하나님의 “유일신 되심”에 대한 강조와 이원론/다원론 및 우상숭배에 대한 배척이 그 전부였다. 이것은 해석학적 관찰에 의하면 재해석되어야 할 매우 부족한 주석이며 그 정경의 가르침의 진의에서는 멀다고 하겠다.


(2)둘째는 “이스라엘”에 대한 해석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에스겔 20:30-44에 언급된 바의 반복으로 일관된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계약을 맺었으므로, 비록 그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재난 징벌들을 통하여서도 결국은 회복의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이라는 말의 미드라쉬적 해석은 “너희가 이 해석에 귀 기울이지 아니하면”이라는 경고를 되풀이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도 해석학의 여지는 없다고 하겠다.


(3)셋째는 “토라”에 대한 해석이다. 토라에 대한 미드라쉬적 해석도 어디까지나 지칠 줄 모르는 “토라 공부 권유”의 기계적 반복으로 일관된다. 여기에도 또한 해석학적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토라”로 대변되는 “구약성서”(히브리 성서: TaNaK)를 철저히 “구속의 주”(救贖의 主)를 대망한 구속사(救贖史)의 책(βίβλος)으로서 “해석”하는 기독교는 구약성서를 유대교와는 다른 해석학적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