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을 위한 ━━/이스라엘자료

유대교의 형성과정 - 박정수 교수

Joyfule 2015. 5. 27. 09:54

 

 

 

유대교의 형성과정 - 박정수 교수

 

I. 서론

 

1. 관점과 위상

유대교를 연구하는 기독교 신학도로서, 나는 먼저 나 자신과 내가 속한 종교적 전통이 유대교에 대한 배타적이고도 공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성찰하는 것이 옳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유대교와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개개의 종교적 전통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도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찰이 자신과 자신이 서있는 전통의 위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속의 한 개체의 자기정체성의 표현이야 말로 다원화된 세계의 진정한 가치가 될 수 있다. 거기에서 비로소 우리는 상호간의 대화와 이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조차 말할 수 없다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없다면, 그리고 유대교인으로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해서나 토라의 본질조차 말할 수 없다면, 둘의 대화나 서로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하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한국과 같은 이천년 기독교 역사의 끝자락에 서있는 극동 아시아의 ‘젊은 기독교’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미국의 기독교에서 조차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사회적으로는 몰라도, 종교적으로 그리 큰 이슈가 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천년 기독교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는 유럽은 상황이 다르다.

유럽인 들에게 유대교라고 하면, 단지 저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유대인 수전노나, 늘 그들의 사회 한 구석에서 매우 독특한 삶의 방식을 취했던 “종교적 민족”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서는 오히려 좀 히스테릭한 차원이 더 부각된다. 그들은 유럽역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반셈족주의(Antisemitism)와, 무엇보다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오래되지 않은 과거 유럽의 아픈 자화상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근대시대의 기독교의 유대교에 대한 적대적인 관계는 중세 이후 유럽에서, 유대교인들이 무역업을 통한 부의 축적과 그것을 기초로 한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의 유지의 노력이라는 전역사(前歷史)를 가진다.

 

유대교인들은 중세 이후 유럽에서 기독교도들의 끊임없는 박해를 견뎌내며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해 나가는데 정말 많은 대가(代價)를 지불해야 했다. 중세의 기독교는 이슬람 세력의 성장으로 그들과의 세력다툼이 번져 십자군 전쟁까지 이르게 되는 와중에, 유대교는 그야말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었다. 중세 이후의 유대교의 양대 산맥으로 아슈케나짐과 스파라딤이 존재하는데,

아슈케나짐은 동유럽의 비교적 안정된 유대교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스파라딤은 스페인에 뿌리를 둔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스페인에서 기독교도의 영토회복 운동으로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추방과 함께, 이교도들로 낙인찍혀 이단재판과 추방으로 내몰려 북아프리카와 중동 터키 일대로 이주했고, 더 나아가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중남미에 까지 퍼지게 되었다.

 

왜 유럽에서는 미국이나 아시아의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교와 그토록 기나긴 종교적 논쟁의 시기와 사회적 갈등을 경험해야 했을까? 그것은 단지 기독교의 역사가 그만큼 길었다거나, 기독교인으로서 국가에 종교세를 내었던 유럽이 가질 수 있는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이라고 간단히 치부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와 유대교가 가지는 동질성 때문일 수 있다. 두 종교는 같은 뿌리, 즉 고대 이스라엘 종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유일한 한 하나님이신 야웨를 함께 섬기고, 고대의 종교적 유형 가운데에서는 매우 독특했던 이스라엘의 예언자적 전통에 함께 서 있다. 둘은 모두 고대에서는 처음으로 경전을 갖는 종교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게다가 기독교적 가치는 유대교적 가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 둘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 공동체에 있어서의 정의와 사랑과 같은 삶의 가치의 근본을 공유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신들의 삶의 영원한 패러다임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대교와 기독교는 서로 평행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중세 이후의 유대교나 기독교의 역사도, 근대 이후 그들의 정치적 역학 관계나 반셈족주의도 아니다. 내게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기독교적 전통에 속하여 신학과 신앙을 실천하고 있는 우리가 유대교와 공유하고 있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를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기독교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삶을 내용으로 하는 구약성서와 함께, 예수의 생애를 그것의 성취로 이해한 초기 기독교의 해석과 삶이 담긴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대교는 히브리 성서와 함께 그것에 대한 해석과 실천의 집대성인 미쉬나와 탈무드를 가지고 있다.

 

고대의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스라엘 종교라는 그들의 공통의 유산에 대한 각자의 해석과 실천이라는 틀에 형성되었다. 그 만큼 양자의 가장 초기의 형성기는 매우 역동적으로 연관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넓게는 포로기 이후에 등장하는 귀환 공동체가 이룩한 페르시아 시대의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를 포함해서, 알렉산더 대제에 의한 인류의 최초의 거대한 동서양 문명의 복합체로서 드러난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와, 유대전쟁(C.E. 66-70) 이후에 본격화된 초기기독교와 ‘랍비유대교’의 형성기를 포괄한다. 고대 이스라엘 종교가 재형성되는 거대한 용광로서, 본인은 고대 유대교의 형성과정을 내적으로는 포로기 이후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의 확립으로, 그리고 외적으로는 이 시기의 이스라엘의 이민족과의 상호교류를 통한 사회문화적 정체성의 확립으로 파악하려 한다.

 

초기기독교에 관하여 말하고자 할 때는, 적어도 그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유대교 내부의 종파운동 가운데 하나로 시작하였음을 전제로 하여야 할 것이다. 이시기 종파운동의 본질은 이방인과 이방의 문화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후예인 자신들이 누구이고, 그들의 신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그 안에는 여려 형태의 힘의 스펙트럼이 존재하였지만, 궁극적으로 이시기의 유대교는 이스라엘 전통을 전적으로 유일신에 대한 신앙과 토라의 준수로 수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대교가 고대 이스라엘의 전통을 종교적 사회적 차원의 새로운 틀로 형성함으로써 완성해 가는 것이었다. 유대교 안의 힘의 프리즘에서 볼 때, 초기기독교가 갖는 의미는 민족종교와 보편종교의 긴장을 보편종교로 이전하고자 하는 내적인 활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토라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 ‘은총의 종교’인 기독교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우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이러한 매트릭스에서 어떠한 요인을 발견하고, 또 거기에서 “예수 운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예수는 유대교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또 그를 따르는 일군의 무리들로부터 시작된 초기기독교 운동은 거대한 고대 유대교의 형성의 용광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