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의 형성과정 - 박정수 교수
3. 용어의 정의
우선 유대교라는 명칭에 대해서 살펴보자. 유대교라는 어휘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마카비하 2,21과 8,1과 14,38이다. “그들은 유대적인 것( vIoudaismo,j)을 위해 용감히 싸웠다.”(2,21) 여기서 “유대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 말은 히브리어로 옮긴다면 예후도트(twdwhy)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종교의 변화와 깊이 연관된다. “유대적인 것”은 그 어근이 보여주듯이 유다(הדוהי), 그리스어로 유다스(VIou,daj)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원래 지역적 명칭으로 유다의 통치의 관할권이 지배하는 “유다의 땅” 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유다인( vIoudai/oj)은 그곳에 거주하는 거주민을 의미한다.
K. G. Kuhn은 이 말이 팔레스타인의 랍비 문헌에서는 극히 드물게 사용되었지만, 바빌론의 유대인 랍비들의 문헌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율법의 준수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적인 것”을 매우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James D. G. Dunn이 랍비 문헌들의 사용례를 통해서 잘 지적하였듯이, 유대인이 자신들의 보편적인 칭호를 표현할 때, ‘이스라엘’이라고 하지 결코 ‘유대인’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유대인이라는 용어는 비유대인과 자신을 구별하려 할 때만 사용하는 배타적인 의미의 용어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은 (유대인을 포함한) 관찰자의 관점을, ‘이스라엘’은 참여자의 관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유대적인 것”의 형성과정에서 ‘유다’는 유대교 신앙의 주체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으로는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전승에 대한 주도권 경쟁과 연관되고, 사회정치적으로는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인들과 팔레스타인에 잔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이른바 “#rah ma"(“땅의 사람들”)과의 갈등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갈등은 귀환 공동체의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단지 정치적인 권력의 획득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유산 전체에 대한 점유권을 의미했다. 남왕국 유다의 예언자들조차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예언자로 인식하였던, 이스라엘 종교의 유산은 이제 유다의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바빌론으로 유배된 유대인을 중심으로 반성된 신앙과 삶의 규범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한 귀환공동체의 종교적 사회적 승리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에 대한 신앙은 이제 바빌론에서 야훼 신앙을 보존했던 귀환공동체의 신학과 삶의 형태에서 그 정통성이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이 “유대적인 것”은 역사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시대를 넘어 헬레니즘 시대에 비로소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역사 속에 자신을 규정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유대적인 것”은 앞에서 설명한 팔레스타인 공동체와 귀환 공동체의 내적인 갈등을 통과하고, 헬레니즘이라는 범세계적인 문화의 혼합주의와의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유대교로 완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카비후서 4,13에서는 “유대적인 것”( vIoudaismo,j)이 “헬라적인 것”( `Hllhnismo,j)의 대립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카비서의 배경이 되는 “유대적인 것을 위해 용감히 싸우는”(2,21) 마카비 형제들의 행동이 본질적으로 “유대적인 것에 머무는 자들”을 대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카비서가 보도하고 있는 에피파네스의 칙령, “모든 자들은 자신의 규범을 포기하라”(마카비전서 1:41ff. cf. 마카비 4서 4,26)은 유대적인 것들을 따라 사는 자들이 범세계화의 요구에서 커다란 위협 속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비유대적인 외부의 힘의 강제에 대한 ‘저항적 의미’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저항의 단초는 마카비 가문의 봉기(B.C.E. 167년)와 하스몬 가문을 주축으로 한 독립국가 형성(B.C.E. 132년)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들은 포로기 이후 처음으로 외세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것을 넘어 자신의 힘으로 유다의 영토를 남으로는 이두매인들의 지역까지, 그리고 북으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군사적인 정복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복지의 주민들에게 물리적 강제를 통하여 “유대적인 것”을 따르게 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행해졌던 이 시기의 강제 할례는 “유대적인 것”이 ‘비 유대적인 것’에 대한 저항의 힘으로 역류하여 그것을 “유대화”(ivoudai,zein)하는 동력으로까지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유대교는 “유대적인 것”으로서 비유대적인 것에 대한 저항을 넘어, 유대 민족의 강력한 민족주의적 “열심”(zh,loj)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민족적 “자존심”의 발현으로 보려는 M. Hengel의 견해는 정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대인의 이 민족적 자긍심은 로마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가 시작된 B.C.E. 63년 이후에도 지속되어왔으며, 그것은 유대전쟁(C.E. 66-70)을 통해서 매우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트라야누스의 헬레니즘적 강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제2차 유대인 봉기(C.E. 115-117)를 지나, 결정적으로 하드리아누스의 계속된 강요로 일어난 바 코흐바의 제 3차 유대인 봉기(C.E. 132-135)에서는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영토를 가진 민족으로서 존립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여기서 유대교에 대한 학문적 명칭에 대하여 좀 더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유대교는 역사적 변천과정에 따라 여러 가지로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에 따른 유대교에 대한 명칭은 상당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우선 19세기 종교사학파는 헬레니즘 시대 이후에 발전된 유대교를 에스라-느헤미야에 의해 추진된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와 구분하여 “후기 유대교”(Spätjudentum=late Judaism)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 이 표현은 G. F. Moore, C. Klein, J. Wellhausen, E. Schürer, W. Bousset, M. Smith, J. Jeremias, L. Goppelt같은 기독교 학자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었는데,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는 그 이전의 예언자적 종교의 활력과 역동성을 상실한 “뻣뻣한” 돌출물 같은 것으로 여겼다. 이 포로기 이후의 “후기 유대교”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바리새적 유대교”이고, 이 바리새주의야 말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종교의 본질보다 외연을 치장하는 위선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유대교의 밑그림은 물론 신약성경의 “반유대주의”(Anti-Judaism)의 영향아래서 진행되었다. 적어도 19세기초반부터 2차대전까지의 유대교 연구는 이러한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유대교 연구 자료는 거의 신약성서와 기독교적 자료를 원천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쿰란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들과 비문들의 연구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했고, 무엇보다도 이전에 사용되었던 유대교의 외경과 위경들을 역사적으로 해석하게 됨으로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적으로 “편향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 다른 표현은 이시기의 유대교를 “성경과 미쉬나” 사이의 시기라고 규정하여, 이른바 "Post-Biblical Judaism"이라고 쓰기도 한다. 이것도 정경으로서의 히브리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시대이후, 그러니까 최대한으로 늦추어 잡아 에스라 느헤미야의 귀환과 개혁시기(대략 B.C.E. 458년) 이후의 유대교를 지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시기의 유대교를 외적으로 상징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성전중심의 유대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기의 유대교를 “제 2 성전기의 유대교”(Second Temple Juda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성전재건(B.C.E. 515 )에서 파멸(C.E. 66)까지 대략 550년간의 유대교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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