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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형성과정 - 박정수 교수

Joyfule 2015. 6. 1. 21:04

 

 

 

유대교의 형성과정 - 박정수 교수

 

 II. 고대유대교의 기초: 페르시아 시대

 

1.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의 성격: 독립종교의 길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의 끝자락에서 유대교의 출현은 바빌론 포로로 인한 이스라엘의 국가체제의 완전한 멸망과 그것을 넘어선 ‘회복’이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일어나게 되었다. 멸망은 정치적 차원과 동시에 종교적 차원을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국가의 공식부문인 통치체계와 제의제도의 파멸을 의미했고, 비공식적으로는 가족과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삶의 방법(‘how to live')의 이 그 멸망의 내용이었다.

한 사회의 ‘멸망과 회복’의 전환기에는 늘 그 역사적 공백을 향한 새로운 흐름들의 유입이 가시화 되고, 그것을 주도하는 사회학적 그룹이 부각되게 된다.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의 종교사에서 그것은 옛 전승이 새로운 형태나 내용으로 등장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예언과 토라, 그리고 지혜라는 이스라엘의 전승의 흐름은 이 시기에 각각의 새로운 삶의 자리를 가지고 이 ‘공백’으로 유입하게 되었다.

 

페르시아가 제국내의 각 민족의 종교의 독립성을 장려하는 정책은 초기의 대왕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포로들을 귀환시키는 정책은 제국의 서쪽 변방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요소를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추진되었다. 여기에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귀한 공동체의 재건의지는 페르시아 제국의 정부에게는 민족주의적 열망으로 보이기가 쉬었을 것이다.

포로기에 활동한 예언자들의 예언과 시너지 효과를 거두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의 이상은 구체화되는 듯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추구하는 대열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합류하게 되었다. 귀환은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고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귀환한 사람들의 인구를 42,360명(에 2:68f; cf. 느 7:69-71)으로 본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기록은 1차 귀환(B.C.E. 538)때의 숫자만은 아니라, 당시의 귀환한 사람들 전체라고 보는 관점이 우세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어떤 독립된 정부의 건설이라는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고, 단지 ‘이방인의 지배’하의 자치권만이 주어졌다. 그러기에 그것은 독립된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현대의 ‘시오니즘’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귀환민의 지도자 스룹바벨이 다윗 가문에 속하였기에 그들을 중심으로 한 이상은 늘 ‘다윗 왕조의 회복’이라는 국가적 회복에 대한 향수와 연결되기는 어렵지 않았다. 성전건축이야 말로 그러한 회복의 비전을 부채질 하는 것이었다.

 

학개와 스가랴(1-8장)의 예언은 그러한 ‘회복’의 비전을 성전과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이상으로 대신했다. 그들이 꿈꾸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자신들만이 고대 이스라엘의 유산의 합법적 후계자라는 확신과 유일신 야웨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한 유다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목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는 사회사적으로 포로기 이전의 왕정체제와는 다른 형태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제국 하에서 왕정은 허락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지배구조는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었을까?

 

R. Albertz는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 사이에 존재했던 여러 집단간의 정치적 관계를 기본적으로 페르시아에 충성하려는 관리들과 이집트의 세력을 얻어 페르시아로부터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민족주의적 집단과의 긴장관계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사역은 이 긴장관계에서 친 페르시아 정책을 팔레스타인에서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유대인의 자치 기구를 페르시아식 지방 행정조직으로 마련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자치정부는 귀환과 사회통합과정에서 만들어진 씨족 집단(tAba-tyb 스 2:59=느 7:61 cf. 느 4:7 tAxpvm)에 따라 구성되고 있는데, 우선 평신도 계층에 속하는 족장들로서 유다의 장로들과 같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장로들의 회의’, 다음으로는 이들과는 다른 제사장들과 레위인, 그리고 성전 직원들로 이루어진 ‘제사장 학교’ 집단, 마지막으로는 이 지배집단 하부에 비상시적인 ‘회중의 모임’(lhq 스 10:1,12; 느 5:7,13)이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포로기 이후의 유다 사회가 ‘tAba-tyb’라는 가족 단위 개념이 귀환 공동체의 핵심적 사회단위가 된다는 것에는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교의 모체가 된 페르시아 시대의 유다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씨족 관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R. Albertz는 이 ‘씨족’으로서의 성격이 포로기 전후의 유다 공동체의 사회사적 성격을 각인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을 정확히 보고 있다.

그것은 유다 공동체가 이스라엘의 지파공동체의 ‘하나의’ 구성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자신들의 야웨 신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함으로 전체 이스라엘의 유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무엇보다도 역대기 사가의 관점이었다. 이것은 이후 고대 유대교가 ‘종파화’된 성격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유다 공동체가 이스라엘의 땅과 전통의 계승자가 되었을 때 ‘참다운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신앙고백적인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최초의 역사적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소유권 주장은 이것의 한 예가 된다. 포로기 이후의 구약성서의 문헌들은 유다의 멸망이후 팔레스타인에 남은 자들인 “그 땅의 백성”(#ra-~[ mwld=#rah ma)과 귀환공동체인 “유다백성” (;"ynb hldg"=“hdWhy-~[”)간의 종교적 사회적 대립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땅의 소유권 문제에 대한 갈등은 가장 첨예한 양태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유다 귀환 공동체가 야웨신앙을 지켜온 자들이고, 그 땅에 남은 자들은 야웨 신앙을 저버린 자라는 신학적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유다 귀환 공동체의 땅의 소유권에 대한 주장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유배에 대한 신학적인 재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즉, 유다의 죄악으로 인해 그 땅이 오염되었고(렘 3:1-5; 16:18; 23:15 cf. 창 15:16), 지금은 이방인들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는 것이다: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로 명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에스라 9:11) 그러므로 유다 백성의 바빌론으로의 유배는 그 백성을 정결하게 유지하기 위한 야웨의 한시적 심판과 동시에 구원행위가 된다.

야웨는 그들을 “뽑아”내었으나, 이제 돌이켜 각 사람을 그 고유의 기업과 땅으로 보내 다시 옮기어 심고자 하신다.(렘 12:15; 30:3) 여기에서 귀환공동체가 팔레스타인 공동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반목이 초래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염된 땅에 거주하며 야웨신앙을 알지 못하는 부정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에 의하면 “저들은 비천하고 어리석을 뿐 아니라, 야웨의 길, 야웨의 법을 알지 못한다.”(렘 5,4 cf. 12,14-15; 24,8-10 사 42,24f) 그것은 팔레스타인에 남은 사람들의 신앙이 혼합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슥 6,21f; cf. 겔 11,15-18 단 11,31; 12,11)

이러한 갈등은 성전재건에서 고조된다. 에스라 4,1-4에서는 성전재건을 중심으로 한 귀환공동체와 팔레스타인 공동체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북왕국이 멸망한 이후 자신들도 이곳에 정착하여 지금까지도 야웨를 예배하였다고 한다: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스 4:2) 그러나 귀환공동체는 그들이 성전 건설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의 국면에서 예언자들은 야웨의 우주적 통치를 성전 재건과 결합함으로써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이라는 민족주의적인 사회통합의 이념을 다시금 부흥시키려하였다.

 

특히 학개와 스가랴의 노력은 한편으로는 당시 제사장 계층의 이익과, 페르시아의 후원을 받고 있는 지배층들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국가 회복의 실패로 희망을 잃은 대중들에게도 유토피아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성전건축과 연결 지음으로써(학 1:2-11; 2:3-9; 슥 4:6-10) 어느 정도의 열매를 거두었고 성전은 완공되었다(약 BCE 520-515).

 

결국, 귀환공동체의 야웨신앙과 회복된 성전은 이후 나타날 ‘고대유대교’라는 이스라엘 종교의 새로운 형태를 결정짓게 된다. 이것은 하나의 씨족으로서 귀환한 이 공동체가 자신들이 신앙을 통하여 고대 이스라엘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획득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이제 ‘유다 공동체’로 자신을 정의하게 되고, 팔레스타인에서 페르시아 제국하의 자치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유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단순히 인종학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F. Crüsemann의 견해에 동의할 수는 없다.

 

귀환 공동체가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도록 했던 것은(스 10장) 단지 ‘참다운 이스라엘인’이 되기 위한 혈통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포로기 이전에는 족내혼(族內婚)이 일반적이었으나, 그렇다고 족외혼(族外婚)이나 외국인 여자와의 결혼이 전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명기 7:1-4에 나오는 가나안 일곱 부족과 23:2-9절에 나오는 암몬과 모압 부족을 제외하면, 결혼을 통한 이스라엘로의 편입은 일반적으로 열려져 있었다.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의 그러한 혈통적 자기정체성의 추구는 오직 마카비 시대의 혈통주의적 민족주의의 등에서 가장 고조 되지만, 그 이후 유대교에 자리 잡은 개종(改宗)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무너지는데, 개종은 이방인에게 이스라엘인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제도화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의 이방인과의 혼인 금지는 주로 범세계적인 문화에 다시 젖어든 제사장 귀족 계급들에 대한 개혁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역대기 사가(대상 1-9장)와 에스라(2, 8, 10장)와 느헤미야(7, 12장)에게 족보가 중요했던 것은 그들이 “거룩한 자손”(에스라 9:2)으로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종교적 유산의 수용과 새로운 해석의 주체로 내세우는 것이었지, 결코 혈통적인 정체성의 구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포로기 이전처럼 국가적 정체성으로 유지될 수 없었고, 오직 종교적 정체성으로서만 유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외세 치하의 독립 종교로서의 길이야 말로 포로기 이후 유대교의 현실적인 선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R. Albertz가 S. Talmon의 견해를 인용하며, 헬레니즘 시대에 일어난 유대교의 종파의 형성의 기원을 ‘유다 공동체’가 이루어 낸 이 ‘신앙고백적 지위’와 연관시키는 것 역시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포로기 이후의 사회사에 각인된 그러한 신학적 투쟁의 산물이야말로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페르시아 시대의 이스라엘 종교가 헬레니즘 시대의 ‘고대유대교’로 형성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