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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형성과정 - 박정수 교수

Joyfule 2015. 6. 4. 08:43

 

 

 

유대교의 형성과정 - 박정수 교수

 

 II. 고대유대교의 기초: 페르시아 시대

 

3. 고대유대교의 종교적 현상

역사적으로 페르시아 시대에서 헬레니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즉 이스라엘의 종교사적으로는 고대유대교가 형성되는 기틀을 제공한 포로기 이후의 괄목할 만한 변화의 특징을 한편으로는 신학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사적으로 요약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성전 재건이후 예언자들의 활동은 위축되면서, 이스라엘의 종교사에서 예언은 어떠한 위기와 변형을 겪게 되었는가? 둘째,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가 지향한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이 실패로 돌아간 후, ‘종교적 회복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참다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하였을까? 셋째, 이러한 변화의 상황이 이스라엘의 종교사에서 ‘고대유대교’의 형성을 위한 어떤 사회사적 기초를 제공하였을까?

 

이스라엘의 종교사에서 초기유대교가 형성되는 이 시기, 그러니까 페르시아 시대에서 헬레니즘 시대로 넘어가는 이 포로기 이후의 괄목할 만한 변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문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스라엘의 종교사에서 줄기차게 이어져 왔던 예언은 어떠한 변형을 겪게 되었던가? 둘째, 포로기 이후 유다공동체가 ‘종교적 회복’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하려 하였을까? 셋째, 그것은 초기유대교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1) 예언의 종말과 묵시의 등장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특징적인 것은 성전의 재건이후 예언 활동이 거의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에스겔을 통한 회복의 메시지는 제2이사야를 통해 계속되었다. 그리고 성전재건을 회복의 한 형태로 해석했던 학개를 통해서 계약신학으로 구약신학을 서술하려는 Bernhard W. Anderson는 그의 저작에서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종교의 변화의 한 줄기를 ‘예언에서 묵시로’ 파악하였다. 묵시는 “새로운 어법으로서의 예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묵시문학이 과연 예언으로부터 나온 것인가?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가장 큰 반론은 von Rad에 의해 제기되었다. 묵시문학의 기원은 예언이 아니라, 지혜문학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논쟁의 역사를 자세히 다룰 수는 없다. 다만 포로기 이후의 묵시문학을 깊이 다룬 배정훈 교수의 최근의 논문은 한국의 학계에서 이 문제에 대한 연구사를 가장 잘 다루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J. Welhausen은 그의 고전적 저서, 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Ancient Israel에서 이스라엘 종교사를 포로기 전과 후로 구분하여 포로기 이후의 특징을 유대교의 형성으로 서술하며, 묵시운동을 구약의 예언서와 페르시아 문헌들의 모방으로 생각했다. 그는 문헌연구를 통해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이는 향후 묵시문학에 대한 연구의 두 가지 길을 열어놓은 것이었다. 그 하나는 묵시와 예언의 연관성이고, 다른 하나는 묵시문학을 주로 사회정치적 운동으로 규정하여 연구하는 방향에 대한 비판적 경향을 열어놓았다. 두 번째 방향은 이미 H. Gunkel이 사용한 양식비평을 통해서 개진되었는데, 그는 묵시적인 상징의 신화적인 요소가 바벨론의 갈등신화들 속에서 발견된 요소와 동일하다는 견해를 보인다.

 

Wellhausen을 뒤를 이어 묵시문학을 연구한 학자는 R. H. Charles였다. 그는 묵시문학에 대한 문헌적인 연구를 통하여 묵시현상과 그 메시지가 구약의 예언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경향은 더욱 H. H. Rowly와 D. S. Russel에게서 발전되어 나갔다. Rowly는 묵시와 예언에 있어서 동일하게 역사는 이스라엘의 신실한 자들에게 수여될 ‘새롭고 결정적인 날’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구로 학자들은 묵시문학을 예언서 내에서 찾아보려했고, 그 열매는 대표적으로 H. Gese, Paul이나 D. Hanson과 같은 학자들을 통해서 이사야 24-27장 56-66장 스가랴 9-14장 등에서 이른바 묵시사상의 기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Hanson에 의하면 묵시문학의 기원은 예언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즉, 지혜에서 묵시문학이 나온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기원전 3-2세기경에 묵시문학에 지혜의 요소가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언급한 예언과 묵시 그리고 지혜의 상호연관성을 전승사적 연관으로 구체화하여 나열한 것이다. Hanson은 이사야서에서 예언이 묵시로 변형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전통적인 예언인 이사야 1-39장과 40-55장까지의 회복의 예언과 56-66장의 묵시적 예언은 이러한 변화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두 번째 예언은 포로기 이후에 야웨의 통치하심에 대한 우주적 환상을 정치적 현실에서 해석하려 하지만, 이러한 낙관주의적 예언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고, 도리어 귀환공동체 내에서 그러한 예언자들이 억압을 받는 현실로 인하여 결국 비관적인 역사에 대한 인식을 초래한다. 이것은 ‘원묵시’(protoapocalyptic)의 형태로서 이사야의 세 번째 예언과 같은 묵시적 종말론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스가랴 9-14장 역시 그러한 전승사적 고리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R. Albertz는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 예언에 대한 실패가 예언의 형태를 변형시켜, 예언을 ‘종말론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는 이 예언의 종말론적 변형이 헬레니즘 시대에 번성하게 된 묵시문학의 뿌리가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것은 묵시문학의 기원을 포로기 시대를 넘어 포로기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려는 Paul D. Hanson의 견해를 거칠게 반박하는 것이기도 하다.

 

R. Albertz는 묵시의 기원을 예언의 ‘종말론화’와 연결시키는 것을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즉 종말론적 예언과 묵시사상의 삶의 자리를 사회학적으로 동일시하거나 연속성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승사적으로 가장 후대의 예언이라 할 수 있는 슥 9-14장이나 사 24-27장과 같은 이른바 ‘후기 예언’은 3세기 말경에 비로소 정경으로 완성되었지만, 가장 초기의 묵시라고 볼 수 있는 에녹1서(에디오피아의 에녹서)의 경우 3세기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묵시적 성격이 강한 다니엘서의 아람어 부분도 이미 3세기 말에 완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종말론적인 예언 전체를 4세기 이전으로 돌림으로써 초기 묵시적 작품들이 그것을 이어가고 있다는 Hanson의 견해를 반박하며, ‘후기 예언’과 초기의 묵시가 동시대적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더 나아가 Albertz는 초기의 예언과 묵시의 배후에도 서로 상이한 사회학적 집단이 존재했던 것으로 본다. 즉 ‘후기 예언’은 국가 회복이 좌절되고 사회경제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하층민들에게 접촉함으로써 이들에게서 종말론화 되어갔지만, 이것과는 다르게 초기 묵시는 상층부의 지식인들, 그중에서도 제사장 계층이라기보다는 서기관 계층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전적으로 본문의 전승사에 의존하고 있는 것인데, 주지하듯이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학자마다 매우 큰 편차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언활동이 그치기 시작했다는 것과 전승사적으로 묵시라는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언과 묵시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역사에서 이 새로운 운동의 흐름이 왜 일어났고,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K. Koch의 통찰은 중요하다. 그는 포로기 이후 역사에서 예언 활동이 종말을 고하게 된 이유 중 하나를 페르시아 시대 이스라엘은 더 이상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종교적인 ‘예언’의 행동이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결과를 초래하였고, 예언의 삶의 자리는 정치적인 현실이었다는 그의 관점에 기초한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에 집중되고 있었으나,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이 더 이상 독립적인 정부로 존속할 수 없었고 하나의 독립 종교로의 길을 가게 됨으로, 예언 전승이 자신의 삶의 자리를 잃었다는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