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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형성과정 - 박정수 교수

Joyfule 2015. 5. 31. 20:29

 

 

 유대교의 형성과정 - 박정수 교수

 

 3. 용어의 정의

 

포로기 이후 형성된 유대교의 명칭에 대한 이러한 모호성은 이 시기에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 유대교의 역사적 상황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이해하는 한 유대교의 명칭은 적어도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유대교-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초기 유대교-형성기의 유대교)-랍비유대교-근대유대교.

우선 그 변천을 일반적인 연대기로 나눈다면, 고대 유대교(Ancient Judaism), 그리고 중세와 근대의 유대교(Middle Age & Modern Judaism)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연대기적 구분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고대 유대교의 말기에 형성된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가 중세와 근대의 유대교의 근본 틀을 유지하며, 현대까지 정통 유대교로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고대 유대교를 지칭할 때 그것은 랍비 유대교가 형성되기 이전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도들 조차 이 구분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본다. 그것은 랍비 유대교의 형성을 어느 시점으로 잡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랍비 유대교의 기원에 대하여 이제까지 알려졌던 것은 요한난 벤 자카이(Johanan ben Jakkai)의 활동을 들 수 있다. 바리새파의 지도자로 알려졌던, 그는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의 함락 직전에 이 성을 빠져나와 야브네에서 종교와 학문 활동을 하면서, 이 곳을 유대교의 입법, 사법, 행정의 기능을 하는 산헤드린의 중심지로 세워나갔다. 그에 대한 많은 랍비문헌들이 전하는 전설들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90년 이 곳에서 토라,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로 구성된 39권의 구약성서, 즉 “타낙”(Tanak)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는 것이다.

 

고대의 유대인의 삶과 신앙의 핵심이 되는 정경의 확정은 결코 사적인 차원에서 규정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의를 이끌어 가면서 탄생한 것이 “랍비 위원회”(Rabbinate)였다. 이 랍비위원회는 팔레스타인 중심으로 일어났던 유대교의 마지막 저항이었던 바 코흐바(Bar Kokhba)의 봉기(C.E. 132-135) 이후, 본토와 디아스포라의 유대교 전체는 랍비들을 중심으로 한 제도적 협의체로 자리잡아갔다.

이른바 “랍비유대교”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랍비”들은 미쉬나의 편집시기인 약 200년경부터 팔레스타인의 탈무드(약 400년경 완성)에 이어 완성된 바빌론 탈무드가 완성된 500 년경에 이르기 까지, 유대교의 방대한 문헌 형성의 주체가 된다. 이것은 후기 고대시대의 유대교의 본질인 이른바 “책의 종교”가 랍비 유대교의 특징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의 세계에서 “랍비 유대교”의 형성은 주후 1세기 말까지는 아직도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랍비 유대교의 중심에 서 있는 “타낙”의 해석에 결정적인 길을 연 미쉬나의 편찬시기를 랍비유대교 형성의 결정적인 단계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쉬나는 대략 B.C.E. 50년 이후부터 행해진 랍비들의 재판 기록과 율법에 대한 해석을 담은 것인데, 학자들은 미쉬나가 약 C.E. 200년경 당시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ha-Nasi = patriarch)격이었던 “랍비” 유다("Rabbi" Judah)가 셋포리스에서 편찬하였다고 본다. 그러므로 유대전쟁으로 인한 성전의 파괴이후 미쉬나의 편집시기까지의 고대 유대교는 근대 이후까지 유대교의 골격을 이루게 된 시기로서, 랍비 유대교가 형성되는 과도기의 유대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유대전쟁 이후 유대교에 있어서 또 한번의 대대적인 반로마 봉기가 일어났던 바 코흐바의 반란까지, 즉 C.E. 70-135년 까지는 유대전쟁으로 인한 성전 파괴가 유대교 전체의 구조에 대한 심각한 위기를 만났던 것은 틀림이 없었다. 이 시기의 특징에 대하여 이제까지 널리 퍼져왔던 일반적인 설명은 이런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중엽 하스몬 왕조의 팔레스타인 지배부터 구체화된 유대교의 “종파화”는 기원 후 1세기 가 유대전쟁으로 인한 유대교의 성전의 멸망과 함께, 바리새파의 주도권 하에서 새로운 형태의 유대교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요새퍼스가 언급했던 당시의 유대교의 4개의 “종파들”(ai`re,seij 유대전쟁사 2,119-166; 유대고대사 18,11-25)가운데서 바리새파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파들은 모두 유대교의 주류(main stream)에서 멀어져 갔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쿰란-엣센 종파는 결정적으로 마사다에서 로마인들의 공격에 죽음으로 저항한 이후 역사에서 점차 사라져갔고, 제2성전기 초기부터 성전을 중심으로 한 대제사장의 권력을 독점하였던 사독계열의 후예인 사두개파는 그 성전의 소실로 몰락의 길을 걸어감으로서 유일하게 바리새파만이 유대교의 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후 성립되었던 랍비 유대교는 결국 이들 바리새적 유대교가 기초를 놓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19세기 종교사학파 이래에 구축된 이러한 관점과는 대립되는 관점이 그 이후에 제시될 수 있었다. 그것은 성전파괴로 인한 유대교의 재편성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유대교의 여러 종파가 심각한 변화를 경험했다할 지라도, 그것이 바리새파를 제외한 모든 종파의 소멸과 바리새파의 전적인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 후 적어도 유대교에는 아직도 다음 세 가지 흐름을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a. 성전의 파괴를 깊이 탄식해야 했던 에스라 2서와 바룩 2서와 같은 그룹,

b.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마 9:13=호 6:6 e;leoj qe,lw kai. ouv qusi,an\)를 주장한 Johanan ben Zakkai와 같이, 성전 없이도 가능한 유대교의 “실용주의”적인 노선, c. 그리고 요세퍼스가 언급한 혁명적 세력인 이른바, “제4의 종파”는 유대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팔레스타인의 주변부에 남아있어 132년의 바 코흐바의 봉기에까지 연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유대 전쟁 이후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해 온 초기기독교 공동체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논의가 진행된 것은, 무엇보다 유대전쟁 이전의 자료들과는 달리 이 시기의 역사적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로마의 역사가나 기독교 역사가들의 글을 단편적으로 재구성하여 추론된 가설의 역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기(C.E. 70-135년)를 유대전쟁 이후 바 코흐바 봉기로 더 이상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던 팔레스타인에서, 유대민족이 이른바 “후기 종파시대”로서 여러 종파들의 재형성기로 존재하였던 시기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는 아직 랍비유대교라는 정형적인 틀이 구축되기 이전의 유대교로서 이른바 “형성기의 유대교”(Formative Judaism)이라고 명해도 좋겠다.

 이 “형성기의 유대교”는 무엇보다도 초기기독교의 형성기와 정확히 대면하고 있기에 기독교와는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즉, 이 시기에 복음서가 기록되었고, 후기 바울서신과 그 밖의 신약성서가 기록되었으며, 고대 교부들의 저작은 모두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좀 더 정확히 다루어야 할 몫으로 남겨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