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장기려의 역지사지 - 김경재

등록 : 2014.11.13 18:39 수정 : 2014.11.13 20:42
꿈에도 그리는 아내와 가족을 어찌 만나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아픔을 함께 느꼈다. 상대편 처지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은 인격적 성숙 단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역지사지 능력과 작은 실천이 곧 그 사람의 인간품격과 그 국가사회의 격을 결정한다.
간암 수술의 명의 장기려(1909~1995) 박사가 타계한 지 내년이면 20년이 된다. 그의 인격의 향기가 세월을 넘어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의 아호는 성산(聖山)이요, 평생 맑고 인자한 맘과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살고 간 한국의 슈바이처다. 1950년 12월 한국전쟁이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치열해지던 때, 모친과 아내와 다섯 자녀를 남겨둔 채 평양에서 야전병원 구급차를 빌려 타고 중학생 둘째 아들과 남하한 지 45년 만에 이산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타계하셨다.
인술을 베푼 의사로서의 봉사활동, 한국 최초 의료보험조합 창설, 고신대복음병원 설립, 여러 의과대학에서 외과교수로 후진 양성 등 초인적인 봉사의 삶을 기려서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1979)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공적과 명예 훈장들도, 역지사지하는 그의 고운 맘이 드러나는 다음의 실화 앞에선 모두 빛을 잃고 우리들의 양심은 숙연해진다. 그의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품성이 어쩌면 우리 민족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그는 북에 남기고 온 가족을 애타게 그리워했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재회의 날을 기다렸던 그는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라고 보낼 길 없는 편지에서 여든살 순정을 밝힌 순애보적 남편이었다.
북한에서 심각한 식량위기가 발생함에 따라 쌀 15만t을 동포애로써 전달하던 김영삼 정부 때 있었던 작은 가족사 이야기다. 경직되어 왔던 남북 관계가 노태우 정부 시절에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을 제정(1990)함으로써 남북 긴장관계가 다소 풀려가려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이산가족 상봉 사업은 아직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다. 장기려님의 제자들 중 미국에 이민 간 많은 의사들이 주축이 되어 은사님의 북한 가족 상봉 기회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부산에 계신 은사님에게 미국의 제자들은 준비된 평양 방문 기획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기려님의 응답은 보통사람들이 납득하기엔 쉽지 않은 것이었다. “1000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는가?”라는 답신이 미국 제자들에게 갔다. 스승의 의외의 응답에 백방 노력하고 준비한 제자들은 놀라고 한편 서운했지만, 은사의 성품과 인격을 잘 아는지라 고뇌 끝에 내렸을 스승의 결단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장기려님은 생전엔 끝내 고향을 방문하여 가족 상봉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5년 후 아들 장가용 교수가 이산가족 자원봉사 의료요원 자격으로 2000년 8월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내 아들은 평양에서 어머니(당시 89)를 상봉하고 생전에 전달 못했던 아버지의 절절한 순애보 편지와 유품을 전했다.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젖가슴을 만진 뒤에야 어머니를 만났음을 실감했다”고 환갑도 훨씬 넘은 아들의 모자 상봉 소감의 인터뷰 기사는 신문 독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위 실화는 이산가족 중에서 발생한 가족사의 한 작은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이렇게 삭막하게 만들고, 남북관계를 세계인들 앞에서 이렇게 부끄럽도록 만드는 근본 원인은 물질이 부족하거나 군사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유는 오직 한가지, 우리 모두가 성산 장기려님이 보여준 인간성의 역지사지의 능력을 상실했거나 마비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장기려님인들 꿈에도 그리는 아내와 가족을 어찌 만나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저명한 인사라는 사회적 신분 덕에 미국 제자들의 호의와 특혜를 받아 북한 가족을 만나고 오면 그렇지 못한 처지와 형편에 있는 수많은 이산가족들 마음에 생채기를 내어 그들의 슬픔이 배가되고 고통스러워할 것을 염려했다. 그들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낀 것이다. 그 맘이 바로 입장을 바꾸어 상대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하는 마음이다.
역지사지할 수 있음은 놀랍고 신비한 인간다움의 특징이다. 역지사지 능력이 곧 휴머니즘의 본질이다. 고등동물에게서 우리는 감정의 교류 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아예 입장을 바꾸어서 상대편의 자리와 처지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은 인격적 성숙 단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역지사지의 능력은 사람이 높은 학력을 가졌다거나, 사회적 신분이 높다거나, 교육자나 종교인이라고 해서 당연하게 가능한 인간 능력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겐 감정이입 감수성, 창조적 상상력, 문화적 유전자(memes), 그리고 인간으로서 집단적 무의식 때문에 어느 정도 다른 사람의 처지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역지사지 행위에서 처지를 바꿔 생각한다(思)는 것은 이해한다(解)는 것인데, 소를 잡아 칼로 각을 떠 분해하듯이, 단단한 ‘갑을관계’의 입장을 실천이성의 칼로써 분해하는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의 의지를 전제한다. 언더스탠드(understand)라는 영어단어가 의미하듯이, 상대편 자리에 내려가 아래에 설 때 이해가 가능하다. 역지사지는 상대방에 관한 정보지식만으로는 안 된다. 열린 감성과 소통 의지, 타자 존재성과 차이의 존중, 생명의 연대성 자각, 그리고 인간의 본능적 이기심에 대한 연민의 마음까지 총동원될 때 발현되는 능력이다.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 발생도 처지와 입장을 바꾸어서 상대편을 이해하는 능력이 거의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 민주화가 물 건너가고, 사회에서 각종 갑을 계약관계가 항상 분쟁거리가 되고,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정부의 방조 때문에 남북고위급접촉 외교가 무산되고, 주권국가 국민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하는데 한-미 방위조약 관련해서 ‘전작권’ 환수 시기를 정부가 쉽게 연기해 버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역지사지하는 인간 품성을 상실했기 때문은 아닐까? 오로지 생존보존과 자기번영만 위해 고층건물 사닥다리 오르는 경쟁적 삶을 당연시하는 세상 풍조와 그것을 정당시하는 통치철학 때문이다.
한민족은 진정 약속을 지킬 줄 모르는 민족이던가? ‘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 남북공동선언’ 등이 결국 휴지에 불과하단 말인가? 남북 국가대표가 악수하고 서명날인한 문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 약속을 쉽게 뒤집는 성실성 없는 국민이라고 세계인들에게 멸시당해야 하는가? 민족의 양심이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부끄럽고 분하고 슬프다. 그러나 역지사지 능력이 우리 세대에 온통 상실되어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를 좋은 방송드라마에 몰입하여 공감하는 시민들의 시청자 반응 현상에서 확인한다. 예를 들면, 요즘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방송드라마 <미생>에 대한 호평과 시청자들의 반응 능력에서 인간의 역지사지 능력은 겉으론 은폐되어 있을 뿐 건재하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하기야 무릇 문예작품에 대한 이해와 공감 자체가 인간의 역지사지 능력 때문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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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목사·한신대 명예교수 |
역지사지 능력과 작은 실천이 곧 그 사람의 인간품격과 그 국가사회의 격을 결정한다. 세계 종교들은 사람과 짐승의 구별점이 역지사지 능력과 실천에 있다고 한입으로 말한다. 생명계의 실상은 고층건물 같은 구조가 아니라 그물망 같은 구조라고 강조한다. ‘갑을관계’에서 갑이 을의 입장을 역지사지할 수 있을 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갑이 을의 자리에 내려와 뒤틀린 생명질서를 아픔으로 느끼고, 고통을 분담하면서 고통의 원인을 함께 해결할 때, 갑과 을은 세속 한복판에서 함께 초월을 경험한다. 그러한 초월 경험은 인간성을 되찾은 기쁨, 자유, 행복한 뿌듯함을 갑을 모두에게 선물한다.
장기려 박사의 백년해로(百年偕老)
장기려 박사의 생애
장기려박사는 (1911년~1995)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으며,
송도고보와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그후 외과의사 백인제 박사의 제자로서 수련하였다.
당시 병원에 입원 중이던 문학가 춘원 이광수가 장기려 박사를 알게
되어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로 삼았다는 설이 유력하나,
장기려 박사 자신은 이를 부인한다.
1940년 나고야 제국대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47년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냈다.
장박사의 월남과 그의 활동
그는 1950년 12월, 6. 25 동란 중,
평양 의과대학부속병원 2층 수술실에서 밤새워 부상당한 n국군장병들을 돌보다가 어쩔 수 없이 국군 버스를 타고서 차남 장가용과 함께 황급히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인 김봉숙 여사와 다섯 자녀와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1월 부산 서구 암남동에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을 무료진료하면서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인술을 베풀었다.
그후 서울대학교, 부산대학교, 서울 카토릭대학, 인제의대 외과 교수 및 병원장등으로 인술을 가르쳤다.
1968년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였고, 장미회(간질환자 치료모임) 창설, 부산 생명의전화 설립, 장애자 재활협회 부산지부 창립에도 앞장섰다.

장기려박사는 1943년 우리나라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데 성공하였고,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 절제술에 성공하여 미개척 분야인 간장외과의 발전과 의료 인재 양성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노년에는 병고(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백병원 명예원장으로서 집 한칸 없이 협소한 사택에서 지내면서 마지막까지 가난과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한국의 성자로 칭송 받고 있다.
장기려 박사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별세하였고, 묘지는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 내에 있다.
장기려 박사의 천생연분
그는 늘 빛 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계속 혼자 살았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재혼을 권유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하면 그는 이런 말로 완곡하게 거절했다.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으로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다가 끝내는 만나지 못하고
86세 되는 해 1995년 성탄절 아침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