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의 역사 7 ⊙
10.유대인 대학살.
1929년의 세계는 대공황이라는 바람에 휩사였다. 1933년 1월 30일, 정부를 이양받아 독일 수상이 된 이틀러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반대자들을 모조리 숙청하였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계획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20세기의 신화』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한 마디로, 독일 내의 유대인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었다.
즉, 이들의 스로건은 '유대인을 처단하자'는 것이었다. 나치 정부는 유대인 지도자, 법률사 등을 체포하였으며, 유대인이 저술한 책을 불살랐고, 유대인의 상점과 공공 건물에 방화를 하였다. 1935년 6월에 독일 의학 협회에서는 의학 잡지에 『유대인과 결핵균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유대인을 숨겨 주는 모든 이들에게 결핵 감염의 위험성을 경고하기까지 했다.
1939년 11월과 12월에는 모든 유대인들은 도시의 특정 구역인 게토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첫 게토는 1940년 2월 로지에 세워졌으며, 1940년 11월 바르샤바 게토가 세워졌다.
1941년 10월에는 게토 밖에서 발견된 유대인은 모두 사형에 처해질 것을 선언하였다. 게토에서의 통치 독일에게 있어서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우선 유대인들을 감독하고, 앞으로 멸종시키기 위해 한곳으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얼마 동안 경제적 착취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대규모의 게토에서 군사 물자를 만들기도 하였고, 작은 곳에서는 도로 건설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만이 제공되었을 뿐, 인간적인 삶의 모습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1940년, 폴란드에 설치된 여러 게토에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활동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으며, 예배와 교육 등 종교 행위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음악과 연극 활동을 하였고, 카페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얼마간의 활동마저 1941년 중반에 와서는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게토 안에서의 기아와 질병, 전염병의 만연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갔으며, 생존을 위한 초인적인 노력도 허사가 되었다.
11.현대 이스라엘 독립과 그 과정.
제 2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팔레스타인의 모든 유대인들은 밴구리온이 제 21 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제안한, "히틀러와 싸우자"는 연설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히트러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유대 군사력을 위한 조직을 제안하였으며, 또 전쟁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으나, 영국 정부는 이들이 팔레스틴에 남아 줄 것을 엄격히 요구하였다.
1942년 4월, 바이츠만은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의 빌트모아에서 가진 유대 지도자들과의 화합에서, '시온주의 운동의 정치적 활동'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이를 후에 '빌트모아 계획'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선언의 내용은 ①팔레스틴으로 향한 대규모의 유대인 이민의 문을 열것. ②이민을 포함한 국가 발전을 위한 모든 관련 업무를 유대기구로 통합할 것. ③팔레스틴에 유대 독립 국가 설립을 요구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빌트모아 계획서는 1942년 11월 ,시온주의 대표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영국 처칠의 연립 내각은 유대 국가 건설을 지원 할 것과 팔레스타인에서 다수의 유대인이 정착하는 문제에 지지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1945년 7월 노동당이 재집권하였으나, 여전히 이민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유대 기구는 즉각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 설립을 요청하였으나, 외무 장관 베빈은 그 해 11월,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책을 발표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를 위한 영국의 이중 의무'를 거듭 천명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선언은 팔레스타인이 유대인 난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님을 의하고 있으며, 유대인 난민들에게 유럽에서 다시 재건설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츠만은 10월, 런던에 건너가 베빈 장관을 냉대 속에 만나 이 문제를 논의 했으나, 그는 정부의 이같은 백서는 유효하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었다. 한편, 베빈 장관은 팔레스타인 문제와 유럽의 유대인 문제를 토의할 영미 심의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여, 1946년 1월 7일에 워싱턴에서 영국과 미국의 동수(同數) 위원회가 설치 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유대인들의 토지 거래 금지법을 무효화시켰으며, 영국의 위임 통치권을 UN이 인수하는 것도 제안하였다. 이로부터 차차 대 독립을 위한 진보가 이룩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4월, 두 척의 배가 불법 이민자를 싣고 이탈리아의 항구 라스페치아를 떠나려고 하자, 영국은 압력을 가하여 이 배를 억류하였다. 그 배 안에 있던 전 유대인들은 석방될 때까지 단식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 사건이 유대인의 승리로 끝나자 더 많은 이민자가 이주를 희망하였으나, 영국은 계속하여 이민을 방해하고 금하였다. 또 불법 입국자를 잡아 텔아비브에 수감하였다.
1945년부터 독립할 때까지 약 7,000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불법으로 이민해 왔으며, 이들가운데 약 5000명은 체포되어 사이프러스 섬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이들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 올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UN이 관할해야 한다는, UN이 제안한 위임 토치권에 관한 안이 영국에 의해 거부되자,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이 수립되었다. '
모리스-그래디 안'이라 불리는 이 계획서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을 4개 지역으로 나누어 유대인(17%), 아랍인(40%), 그리고 두 영국 지역으로 분할한다는 것이다. 또, 영토 전체의 관할은 영국이 담당하고, 유대 및 아랍지역은 자치로하는 안(案)이었다. 같은 해 5월에 시작된 안보 이사회에서 소련의 대표 그로미코는 '자기 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들의 정신을 지지한다."고 발언하였다.
여기서 이사회는 UNSCOP를 발족하여 11개 국가를 선출 하였다. 급기야 1947년 11월 29일, UN안보 이사회는 팔레스타인을 두 국가로 분할하여 독립시킨다는 역사적인 결정을 33:13으로 가결하였다.
영국은 1948년 2월 1일에는 유대인 이민을 항구를 열고, 같은 해 8월 1일에 모든 군대를 철수시켰다.
UN안보리가 열리는 동안, 아랍인들은 분할 계획을 전면 반대하고 나섰다.
UN안보리의 결정 직후부터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자동차와 건물에 공격을 시작하였고, 주변 아랍 국가에서 소위 '해방군'에 들어와 이를 지원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묵과하였다. 유대인들도 이에 맞서 공격을 시작하였고, 마을 입구 초소를 경비를 강화하였다.
1948년 3월, 아랍인들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면서 예루살렘과 네게브, 서부 갈릴리의 통로가 차단되었다. 이 때까지 약 1,200명의 유대인이 죽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결의하고, 체코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선적하여 싣고 들어왔다. 이 무기를 사용하여 4월 초'나흐숀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길을 다시 열였다. 그러는 동안 키브츠 미시마르 히멕은 아랍 '해방군'들에 의해 공격당했다.
1948년 4월 중순과 5월 중순 사이에 '하가나'는 하이파, 티베리아, 사팟 등을 정복하고, 5월 13일에는 텔아비브 위성도시인 욥바를 점령하였다. 예루살렘에서는 4월 13일에 스코프 산으로 가는 의사와 간호사가 탄 버스가 영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가다가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아 전원 살해된 사고가 발생했다. UN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전쟁을 막는데 성공하지 못하자, 1948년 4월 16일, 안보 이사회를 소집하여 이 상황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이 때, UN은 UN의 결정을 곧 수행할 것을 토의하였으나, 영국이 UN 대표들의 입국을 거부하고 나서는 바람에 아무런 새로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폐회되었다.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하티크바'라는 제목의 국가가 불려진 후, 벤구리온이 독립 헌장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읽고 있었다.
이 선언은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건국의 지도자들이 알파벳 순서대로 서명 하였다. 이스라엘 국가의 정부는 임시 국민 의회에 의해 곧 비준되었다. 독립 선언 직후 미국과 소련 정부로부터 이스라엘 국가는 사실상 인정되었다.
그날 자정 1 시간 남겨 둔 시간에 영국 식민지 대표는 하이파 항을 떠났고, 다음 일요일에는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으로 하임 바이츠만이 선출되었다. 아랍군의 공격으로 전쟁은 발발하고 이러한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UN은 중재자로 스웨덴 사람인 버나도트를 파견하여 휴전을 제안 하였다.
그는 1947년 11월 29일 UN의 결의를 지켜 줄 것을 이스라엘에 요구하였다. 이 안은 얼마 후 아랍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아랍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침략하였으나, 오히려 이스라엘에 더 많은 영토를 내주게 되었다. 휴전이 끝나던 7월 9일부터 10일 동안에 이스라엘은 나사렛을 점령했고, 갈릴리와 룻다와 람레를 점령 하였다. 결론적으로, 시온주의자들의 꿈인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은 시온주의 창시 자인 헤르츨의 예언대로 50년 만에 세워졌다. 이렇게 하여 한 예언가의 꿈은 이룩되었으며, 유럽에서의 수없는 박해와 대량 학살 가운데서도 살아 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땅과 주권을 가진 새로운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국가 건설의 꿈은 많은 이들의 피흘림의 결과였으며, 아직도 산적해 있는 많은 과제들을 두고 있는 이스라엘은 어떠한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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