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석 칼럼]
이슬람과 무슬림은 어떤 차이가 있나
‘이슬람포비아의 실체를 진단한다’ 세미나에 대해 [2009-01-28 11:27]
작년 12월 한국의 청어람아카데미, 바른교회아카데미는 ‘이슬람포비아의 실체를 진단한다’는 주제로 공개 세미나를 열었다. ‘포비아’(phobia)라는 말은 공포증 혹은 혐오증을 의미하는 단어다.
이 세미나에서 한 발제자는 “이슬람은 전혀 공격적인 움직임이 없는데도 일부 인사들은 마치 그들이 한국을 점령하기 위해 오고 있다든가 혹은 이슬람의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는 전투적인 표현을 사용하면서 한국교계를 소란케 하며 이슬람에 대한 혐오감(이슬람포비아)을 부추기고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태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논조를 합리화하기 위해 교계 신문에 게재되었던 칼럼들에 인용된 통계 수치의 근거가 희박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를 들면 한국에 들어와 있는 무슬림의 숫자가 몇 명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국에는 출입국 신고서에 종교를 기재하지 않는데 그들의 국적만 가지고 무슬림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이슬람 국가에도 기독교인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이슬람에 대한 공포심을 부풀려 조장한 사람들은 한국교회에 사과하고 회개해야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특히 그가 거론한 자료들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소위 CIA 자료라고 하는 것의 출처를 폭로한 것이었다. 이는 CIA 자료에 따르면 무슬림 세력이 국민의 1% 미만일 경우에는 평화를 가장하지만 규모가 점점 커질수록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 내용은 CIA 자료가 아니라 피터 하몬드라는 사람의 책에 언급된 내용이라는 것을 밝혀 낸 것이다. 그는 이런 자료들을 언급하며 지금까지 한국에 이슬람 확산의 위험성을 이야기해오던 사람들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내용의 사실 여부가 아닌가 생각한다. 자료의 출처는 부정확했지만 무슬림이 실제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지구촌 곳곳에서 엄연히 발생하는 일들이 증명하고 있다.
이슬람권 선교를 전문으로 한다는 단체에서 대표라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이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슬람의 정체를 밝히고 그 위험성을 알리는 사람들은 사랑이 없고 오히려 이슬람에 대해 공포증과 혐오증을 유발시켜 선교를 방해하는 편협한 사람들이라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했다는 것을 들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비둘기파’라고 칭하면서 이슬람에는 지극히 소수의 과격한 무리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무슬림은 평화를 사랑하고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무슬림이 우리나라에 많이 오는 것은 선교의 기회이며 환영할만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물론 다문화사회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무슬림이 다양한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오는 것을 이젠 아무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소위 이슬람권 선교단체의 대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슬람이 무엇이고 무슬림이 무엇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이란 무엇인가. 이슬람은 인류를 십자가를 통한 영생의 길에서 근본적으로 차단시키고자 하는 영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각각 다른 근원에서 왔다. 그 근거는 아래와 같은 코란의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이슬람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코란5장75절)
둘째, 이슬람은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있다.(코란4장171절)
셋째, 이슬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한다.(코란5장17절)
넷째,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을 부인하고 있다.(코란4장157절)
다섯째,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고 있다.(코란4장158절)
여섯째, 이슬람의 예수는 무함마드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온 선지자라고 주장한다.(코란61장6절)
일곱째, 이슬람은 기독교인들을 친구로 사귀는 자는 불신자라고 말한다.(코란5장51절)
여덟째, 이슬람의 예수는 무슬림이었다고 한다.(코란2장136절, 최영길역 코란1299쪽)
아홉째, 이슬람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할 때마다 기독교인들과의 단절을 선언한다.(코란1장7절의 ‘방황하는 자들’이란 기독교인들을 말함)
열째,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인들은 지옥의 불속에 떨어져 영원히 형벌 받을 자들이며 피조물 가운데 가장 사악한 자들이라고 선언한다.(코란98장6절)
열한째, 이슬람은 예수가 아담처럼 흙으로 지음 받았다고 한다.(코란3장59절)
열두째, 코란의 예수는 나의 주님인 알라만을 경배하라고 말했다고 한다.(코란43장63~64절)
이러한 코란의 구절들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십자가의 고통과 피 흘리심을 감내하신 눈물겨운 예수님의 사랑을 거짓과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다. 즉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근거로 본다면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정하고 인류구원을 원천봉쇄하면서 기독교의 근본을 뿌리부터 잘라버리고자 하는 영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을 품자’는 말은 기독교의 핵심을 부정하는 영을 용납하자는 것이므로 잘못된 말이다.
이슬람과 무슬림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무슬림은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이슬람이라는 거짓 영에 속은 피해자들이며 우리의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다. 무슬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의 형제요 자매들이다. 그들이 우리를 원수로 여긴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자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인 것이다. 무슬림은 이슬람권에서 태어났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평생 제대로 복음을 들어보지도, 하나님의 참 사랑을 경험해 보지도 못한 불쌍한 사람들이다. 아니,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어도 듣기를 두려워하는 환경 속에서 자란 그들의 영적 비참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슬람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9·11 사태 때 죽은 사람들도 아니고 이슬람의 잔인한 테러로 희생된 사람들도 아니다. 이슬람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열어두신 유일한 구원의 길인 십자가를 부인하도록 교육 받았기 때문에 영생의 길에서 차단당한 대부분의 무슬림일 것이다. 무슬림을 불쌍히 여기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섬김으로 그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참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사명인 것은 분명하다.
혹자는 이슬람의 정체를 밝히는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이슬람포비아를 부추기는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정죄한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을 가장하여 사람들을 기만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독사의 새끼들’(마23장33절)이라는 가혹할 정도의 혐오스런 단어를 사용하여 정죄하셨다. 이런 표현을 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은 사랑이 없는 분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도 가증한 것들이 있고 혐오스런 것들이 있다. 오늘날 무슬림을 구원의 길에서 차단하고 있는 이슬람의 영을 예수님께서 보셨다면 또 다시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슬람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품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우리는 이슬람과 무슬림을 구분하여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무슬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되 그들을 속이고 있는 이슬람의 적그리스도적 영은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이슬람의 정체를 모르고 무조건 품다가 무슬림이 된 선교사들과 목사들이 한두 명이 아닐진대 하물며 평신도들이 무방비로 이슬람에 노출될 때 당할 위험을 생각한다면 이슬람의 정체를 알리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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