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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상)

Joyfule 2016. 5. 22. 22:11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상)

 

 

1.   서론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을 한 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할 방법은 없다. 독자들이 이 문제를 간단한 서술을 통해 알려고 한다면 잘못된 계산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보고 경험하는 종교 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갈등들과 문제들만큼이나 쉽게 다루기 어려운 문제이다. 따라서 이 글이 좀 길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읽어야 한다.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람들이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에 대해 말할 때, 근본적인 차이점을 비교분석해 보기도 전에 겉으로 나타나는 사회 문화적인 차이들, 각 종교의 신학적인 주장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 현상들에 국한되어 있다.

 

우리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근본적인 차이점을 모른 채 다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주제들은 결코 진위를 분별하는데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점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그리스도인들도, 무슬림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글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에 촛점을 맞추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양측 신학자들의 교리에 대한 설명이나 주장이 아닌 양측 신앙의 핵심이자 근본인 경전을 살펴보는데 중점을 둔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점을 가장 근본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방법은 두 종교의 신앙적 기초가 되고 있는 경전들, 즉 성경과 꾸란을 직접 비교해 보는 방법 외에는 객관적인 자료가 없다. 성경과 꾸란의 차이점을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본인들이 직접 이 방법을 사용하여 읽어보고 비교해 보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성경의 주제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다.

 

 즉 성경의 전체 내용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 그리고 인간의 삶과 타락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 또는 멸망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서는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생각과 계획과 세상 역사에 대한 간섭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온다. 꾸란의 주제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종교로서의 이슬람이 세계의 최고의 종교라는 것이다. 꾸란에서는 이슬람 종교와 마호멭, 그리고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온다. 즉 꾸란의 전체적인 내용은 종교 토론에 관한 것이다.

 

2.   첫번째 차이점은 경전의 주인공이다.

상식적으로 경전은 신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가 누구인지를 밝히 알려주고, 피조물에 대한 그의 생각과 계획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를 어떻게 해야 올바로 섬길 수 있으며, 그의 뜻이 무엇이며, 그의 뜻과 공의로운 계명들은 무엇이며, 인간을 타락시키고 불행하게 만든 죄는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으며, 또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우주만물과 인간이 창조된 목적과 마땅히 살아야 할 길과 인간의 삶의 이유와 가치와 목적을 보여 주어야 한다.

 

성경은 정확히 이것들을 모두 제시해 주고 있다.

먼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다. 즉 하나님이 성경의 주인이다. 하나님에 대한 소개,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에 대한 계획에 대한 설명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 외에도 무수한 등장 인물들이 나온다. 거기에는 많은 위대한 선지자들의 이야기도 있다. 사도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성경의 정확한 주인공은 하나님 자신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의 종들일 뿐이다. 성경에서 사람들은 영원한 존재도 영원한 주인공도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시대에 하나님을 만났으며, 순종하며 섬겼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계시하셨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역시 이스라엘 민족 자체도 주인공이 아니다. 그들도 인류의 전체 역사 가운데서 한 동안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수납하며, 계명들과 구원의 약속을 보관하였다가 때가 찼을 때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럼 꾸란의 주인은 누구인가? 당연히 꾸란의 주인은 알라이어야 한다. 알라가 누구인지를 소개해 주고, 우주와 인류에 대한 알라의 계획과 뜻을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또 어떻게 해야 인간이 공의롭고 선하게 살 수 있는지 그 계명들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꾸란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알라가 아닌 무함맏이다. 꾸란에 나오는 알라는 자신을 절대로 자신을 드러내 계시하지 않는다. 꾸란에 드러난 알라의 인간에 대한 계획은 무서운 것들, 심판, 지옥들이다. 꾸란에서 알라는 무함맏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무함맏이 처음 아랍인들에게 제시한 이슬람 종교를 지지하기 위해서만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있다. 꾸란의 진정한 주인공이 알라인지, 무함맏인지는 독자들이 직접 꾸란을 읽고 확인해 보기 바란다. 이런 수고가 없이 그 진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있을 수 없다. 독자 여러분들이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이 글을 읽었다고 확인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직접 확인해 보는 방법 밖에는 없다. 물론 꾸란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꾸란을 완독하려면 꽤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참고하기 바란다.

 

이것은 이슬람교에서 왜 그토록 무함맏을 신성시하며 절대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해답이기도 하다. 무슬림들은 무함맏을 다른 선지자들처럼 동일한 인간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실상 무함맏을 위해 다른 모든 그 이전의 선지자들은 철저히 무시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알라의 기록이라고 보면서도 꾸란을 위해서는 성경을 철저히 부정한다. 무슬림들은 이슬람과 무함맏이 성경과 선지자들을 완성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 이전의 선지자들과 사도들, 성경과 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모두 부정된다. 왜냐하면 성경과 꾸란, 성경의 하나님과 꾸란의 알라는 서로 하나일 수 없는 철저한 모순과 대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모순이 되고 충돌되는 둘 사이에서 분명히 하나는 100% 거짓이다. 물론 그 안에 약간의 진실이 들어있다 하더라도 전체는 용납될 수 없는 거짓일 수 밖에 없다.

 

3.   두번째 차이점은 역사성이다.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은 모두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기록되지 않았다. 성경 기록은 역사적으로 필기도구가 사용되었던 모세 이후부터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 중동 지역과  로마 제국 지역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기록되었다. 하지만 꾸란은 글을 모르는 마호멭이 암송하는 것을 사람들이 그대로 암송하거나 혹은 낙타 뼈에, 혹은 나무에, 혹은 돌에, 혹은 가죽에, 혹은 야자잎에 기록하였던 것을 세번째 칼리프 때에 대대적으로 편집했던 것이다. 꾸란을 읽어보면 문맥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곳이 아주 많으며, 문법적으로 오류가 많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꾸란이 알라에 의해서 마호멭에게 하늘에서 내려보내진 것이라는 전설을 꾸며냈다. 지금도 대영박물관과 터어키 이스탄불 박물관에 가장 오래된 서로 다른 꾸란 사본이 존재하며,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것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성경의 내용은 창조주 자신의 성품과 생각과 계획과 일들을 비롯하여 우주와 인류의 시작과 인간의 타락과 저주와 불행과 죽음의 시작,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간섭(섭리), 선지자들을 통한 구체적인 구원방법의 계시와 약속,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 종말과 이후의 세계를 총망라하여 역사적인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이런 성경의 배열은 주로 이러한 역사성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과 인물들과 지명들도 주로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다. 성경의 내용을 진리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기준이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이다. '진리'란 영원히 변치 아니하는 참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꾸란의 기록 방법은 역사적인 사건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 이슬람의 역사는 기원후 570년경 메카에서 태어난 마호멭이 610년경 첫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이후에 비로소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기원후 610년 이전에는 이슬람이라는 단어도 없었고, 알라, 무슬림 등과 같은 단어 조차도 없었다. 역사가 없다는 것은 기초가 없다는 것과 같으며, 새로운 종교가 시작되기 이전의 역사와의 관련성을 설명해 줄 수 없으며, 창조주와 우주 및 인류 역사의 시작과 진행의 성격을 설명해 줄 수 없다. 이슬람은 처음 창조부터 수천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자신을 선지자로 스스로 주장한 마호멭에 의해 생겨난 종교이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인 공백을 메꿀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공백을 마호멭의 아내 유대인 여자 카티자와  그의 사촌이 제공해 주었다. 카티자의 사촌 바라카 나우팔은 무함맏이 모세오경에 예언된 "그 선지자"라고 말해 주었다.

 

그 후부터 모하멭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대-기독교인들의 성경에서 찾았고, 자신이 새롭게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종교의 기초와 배경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마호멭이 꾸란을 통해 유대-기독교의 역사적인 기록들 외에 더 추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고, 실제로 꾸란의 내용들을 살펴 보면, 꾸란 이전에 이미 기록이 완성된 성경과 많은 상충과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숙제를 풀기 위해 무슬림들은 이전에 기록되어 있었던 성경이 오염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다양한  곳에서 발견된 수 만 권의 성경 사본들은 하나같이 일치하고 있다. 오히려 이슬람은 자신들에게 없는 과거의 역사를 짜맞추기 위해 여러 가지 전설을 꾸며냈다. 예를 들면, '이슬람은 아담 때부터 있었다", "알라에게는 책의 어머니가 있으며, 꾸란은 알라가 직접 마호멭에게 하늘에서 내려 주었다" 히브리인이었으며 성경에서 모든 민족의 아버지로 불렸던 "아브라함은 (꾸란에서 말하기를) 유대인도 아니었으며, 그리스도인도 아니었다. 그는 참 무슬림이었다" 등등 말도 안되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슬람의 역사성에 대해서 언급한 만큼 이 주제를 좀 더 심층적으로 다루어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불교는 신의 계시에 기초를 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인간이 인간의 삶의 고통스러운 문제를 보고 그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고통스러운 묵상의 과정을 거쳐 인간(싯다르타) 스스로 그 원인과 해결책을 제공하면서 시작되었다. 불교가 인간의 공통적이고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동기로 삼아 자연스럽게 시작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제공하는 해결책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마음을 열고 불교를 받아들였다. 불교의 가장 큰 맹점은 창조주 자신에 대한 지식과 창조주 자신의 계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무지하다는 점이다. 또한 인간 자신을 발견하는데 있어서 창조주 안에서 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자신과 인간의 깨달음이 기준이 되고 있다. 한편 이슬람교는 마호멭이 그 당시에 이미 여러 민족들 가운데 존재했던 종교들과 자신의 아랍 종교를 비교해 보았을 때, 철저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저등한 자기 민족의 종교를 볼 수 있었다.

 

마호멭 당시에 메카의 카바신전에는 이미 오랫 전부터 섬겨오던 360개의 우상들이 있었고, 마호멭 자신도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 전에는 그 종교의 일들에 가담하였었다. 마호멭이 꾸란에 기록된 것처럼 "새로운 종교"를 아랍인들에게 초래하고, "알라의 종교는 이슬람이다"라고 선포했을 때, 아랍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던 옛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마호멭의 새로운 종교를 전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반대는 나중에 대단히 심해져서 마호멭과 그를 따르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었으며, 결국 메디나로 이주(하지라)하게 된다. 메디나에서 여러 지도자들이 마호멭에게 가세하게 되었고, 그 이후 최초의 이슬람의 시발점이었던 메카를 무력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이후의 모든 이슬람의 확장은 무력에 의한 정복에 의한  것이었다.

 

이슬람의 확장은 불교나 기독교의 확장과는 전혀 다른 무력에 의한 것이며, 오늘날까지 이슬람을 유지하는 최고의 방법은 강제에 의한 것이다. 물론 꾸란은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그대로이다. 이슬람을 메카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꾸란을 객관적으로 통독한 사람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듯이, 마호멭의 모든 주장이 역사적인 사실이나 진리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하였기 때문이었다. 꾸란에 기록된 마호멭의 말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메카 사람들의 주장일 뿐만 아니라, 그와 논쟁을 했던 유대인들, 그리고 기독교인들 모두의 주장이었다.

 

예를 들자면, 아담이 낙원에서 흙으로 창조되었다가 타락하여 이 세상으로 쫓겨났다는 주장(여기에서는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지만 꾸란에서 이 내용은 20 가지가 넘는 논리적인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함께 메카에 와서 카바 신전을 고쳤다는 주장,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에 이스마엘을 제물로 드렸다는 주장,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칼로 죽여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데 마귀가 비난하고 조롱하여 이스마엘을 죽이려던 행동을 멈추고 함께 마귀에게 7 개의 조약돌을 던져 쫓아버렸으며,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계속해서 이스마엘을 죽여 제물로 드렸다는 주장, 이슬람이 있기 아주 오래 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같이 이슬람들 거부했던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돌을 비처럼 내려 거역하던 도시들을 폐허로 만들었다는 주장 등 모든 내용들이 역사적인 사건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메카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거부는 당연한 것이었으나 무함맏은 자신이 새롭게 만든 종교가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종교"라고 주장하였다.

 

무함맏은 선지자들에 대해 잘 모르는 아랍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성경의 여러 선지자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였다. 수라 26:40에서 모세와 마술사들 간의 대결도 종교적 대결이었다고 말한다. 모세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만일 마술사들이 승리하게 된다면, 우리가 그들을 따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술사가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어쨌든 마술사를 따를 수도 있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 나중에 이들 마술사들은 모세에게 패배하여 알라를 믿고 무슬림들이 되었다. 따라서 모세도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이집트에 있었다는 것이다. 수라 40:26에서 이집트 왕 바로는 모세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가 우상숭배를 옹호하는 자들의 대표, 즉 왕이었고, 무함맏을 두렵게 하고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메카의 우상숭배자들을 예표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모세는 무함맏의 예표가 되는 듯이 이집트인들의 종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폭군에 의해 반대를 당하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무함맏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선지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종교를 사람들에게 확증시키기 위해 소위 무함맏이 말하는 모세의 종교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함맏이 과거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이용하자 아랍 우상 숭배자들은 선지자의 표적으로 기적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선지자는 자신의 말을 입증할 어떤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라 28:48-49 “이제 언젠가 그들에게 우리의 면전에서 진리의 (선지자가) 와서는 그들이 ‘그에게도 (즉 무함맏에게도) 모세에게도 주어진 기적들이 주어진다면, (우리들이 그를 따랐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에 모세에게 주어진 기적들에게도 불신자가 되지 않았느냐? 그들은 ‘(타우랕과 꾸란이) 서로 서로를 이용하여 힘 있게 하는 두 마법사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두 책 중) 모두에게 불신자이다’ 라고 말한다.”

 

무함맏은 성경을 통해 자신이 성경의 하나님이 약속한 선지자라는 것을 확증하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함맏 당시의 아랍인들을 비롯하여 모든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한결같았다. 그런데 성경과 꾸란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오늘날 모든 무슬림들은 그 동일한 성경이 꾸란과 무함맏에게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은 타락했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의 어떤 부분과 어떤 내용이 타락했으며 변질되었는지,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시를 하지 못한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는 이슬람 종교가 무함맏에 의해 생기기 벌써 오래 전부터 수 많은 사본들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수한 사본들은 손으로 베껴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정교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 사본들에 대해서는 수 많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이미 잘 연구되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