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되는가?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까지 수많은 사건들이 지나갔지만, 어느 하나 정확하게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는, 어떤 것이 거짓이고 어떤 것이 사실이라고 확언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역사는 누군가의 주관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이다. 과거에 위대하게 취급받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악한 사람으로 평가받는가 하면, 과거에 악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의로운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과거에 역사책에서 중요하게 배웠던 사건들이 지금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거나, 역사책에서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서 전도서 2:16은 『이는 현명한 자에 대한 기억이 어리석은 자에 대한 기억보다 영원히 더 남아 있지 못하며 지금 있는 것이 장차 올 날들에는 모두 잊혀지게 됨을 볼 것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역사에 있어서도, 과거에는 6월이면 중요하게 취급되는 사건으로 6.25전쟁을 들었는데, 오늘날에는 6.29선언을 들게 된다. 이는 정권이 바뀌면서 일어난 현상이지만, 바로 이것이 역사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역사를 주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역사가 얼마든지 왜곡되어 왔고, 또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분명한 것은, 역사가들의 수많은 고증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더 왜곡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왜곡된 역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슬람에 대한 역사이다. 이슬람에 대해서는 그래도 과거에는 제대로 알려진 바였으나, 현대에 이르러 크게 왜곡되어졌는데, 이슬람의 교리와 그들의 호전성이 그것이다. 이는 오늘날 미국의 테러와 대 이라크 전 등을 겪으면서 이슬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반미감정이 고조되면서 상대적으로 이슬람의 긍정적인 면들이 부상한 것도 원인이 되고 있다.
예를들어 이슬람의 포교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과거에 이슬람에 대해서 알고 있던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명제가 오늘날에는 한갖 “편견”으로 취급되고 있다. 과거에는 모두가 그렇게 알았다. 역사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무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 교과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일찍이 서양인들은 이슬람의 정복 사업을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표현을 써서 이슬람의 호전성과 강압적인 포교 방식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코란에는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를 강조한 부분이 없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진실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오히려 “이슬람 교의 철저한 평등주의는... 이슬람 교도 내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면서 피정복민의 자발적인 개종을 유도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이 이론을 따르고 있다. 모든 학생들은 이 이론을 배운다. 이것을 시험에 낸다면, 이렇게 답을 해야 점수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강요된 왜곡이다. 사람들은 이슬람의 문화를 바로 알자는 취지 속에서 이슬람을 연구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이슬람 교도들이 자기들의 피의 역사를 왜곡하여 선전하는 내용에 속게 된다. 엄청난 기만이다. 이 세상의 신인 마귀는 이 분야에 있어서도 자기의 전공을 여실히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마귀에게 속은 세상 사람들은 이슬람을 참으로 관대하고 평화적인 종교로 알고 있다. 반대로 부시 대통령을 지지하는 근본주의자들과 연관해서, 기독교를 호전적인 종교로 인식해 가고 있다. 그들은 호전적인 무슬림들이 휘두르는 시퍼런 칼날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초기 칼리프 시대부터 현대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에 이르기까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이 관대한 종교인가? 이슬람이 평화를 사랑하는가? 몇몇 이슬람 교도들은 타 종교인들에게 관대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코란에 충실한 정통주의자들이 아니다. 몇몇 서구화된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타 종교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으로 타 종교들에게 물리적인 힘을 가할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과 똑같다. 카톨릭 세력이 크지 않은 곳에서는 평화와 공존을 외치지만, 카톨릭 세력이 커서 대부분이 되면 타 종교, 특히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해 극심한 탄압을 가하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공산주의와도 일치하고 있다.
그들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코란을 봐야 한다. 코란이 사랑과 평화를 말한다면 이슬람은 사랑과 평화의 종교이다. 그러나 코란이 전쟁과 폭력을 말한다면 이슬람은 전쟁과 폭력의 종교인 것이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코란에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말이 없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이슬람의 호전성에 대해서는 코란이 증명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현세를 내세와 바꾸고자 하는 이들을 알라를 위해 싸우게 하라. 알라를 위해 싸우는 이가 누구든지, 그가 죽임을 당하거나 그가 승리를 거둔다면, 우리는 곧 그에게 놀라운 보상을 해줄 것이다...”(수라 4:75-77) 그 보상이란게 무엇인가? “줄줄이 놓여 있는 보좌들에 기댄 채, 너희가 행한 일로 인해 기쁘게 먹고 마실지라. 그러면 우리가 순결하고 아름다운 이들(처녀들)을 동석케 하고...”(수라 52:19-20)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낙원에서 그 “순교자”를 기다릴까? 자그마치 72명이나 된다고 모하메드는 말했다.
혹자는 말하기를, “성경에도 하나님을 위해 싸운 자들에게 낙원에서의 보상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할 지 모른다. 하지만 성경은 영적 전쟁을 말하고 있지, 실제적인 전쟁을 통한 기독교 국가들의 확장을 말하고 있지 않다. 로마 카톨릭만이 그와 같이 오해하고 있을 뿐,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코란에서 말하는 전쟁은 분명히 물리적인 전쟁을 통한 이슬람 국가의 확장이다. 코란의 구절들 중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이라는 문구는 없을지라도, 코란은 실제적으로 그것을 주장하고 있다. 코란은 실제로 유대교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적으로 간주해 놓고, 그들을 죽이면 낙원에 간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과거 칼리프 시대와 술탄 시대에(A.D.7-16세기) 포교를 위해, 혹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을 죽이기 위해 전쟁을 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멈추는 것이니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이라는 말은 정확한 말 아닌가?
과거 이슬람 세계에는 “지즈야”(Jizya)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인두세”(人頭稅), 즉 사람의 숫자대로 내는 세금을 말하는데, 소득이나 부의 정도에 따라 내는 세금이 아니라, 각 사람마다 일정한 금액을 낸다고 하여 인두세라 불렀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백성에게 걷는 세금이 아니라 특정 계층의 백성, 예를들면 예속민이나 준 노예상태의 백성들에게 걷는 세금이다. 그런데 마호메트는 이 세금을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걷었다. 즉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정복하고, 그들이 개종을 거부하면 다 죽여야 하나 모두 죽이기에는 역부족이고, 또 활용할 가치가 있기에 그들에게 인두세를 부과하여 살려준 것이다. 즉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예속민으로 삼아, 그들의 통치권, 군사권 등을 빼앗아버리고, 그들을 노예처럼 취급해 버린 것이다.
이 “지즈야”는 후에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외에도, 이슬람을 제외한 타 종교들에 모두 부과되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차별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마호메트의 비하발언은 매우 저질스럽다. 그는 유대인들이 생쥐들이 되고 또 돼지들과 원숭이들이 되었다고까지 말한다(하디스)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은 코란과 하디스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이 “지즈야”가 이슬람 통치자들의 관용과 자비라고 추켜 세운다. 즉 피정복민들이 개종하지 않을 시 그들을 죽이는 대신 약간의 세금을 부과하고, 그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는 대신 그들의 영토를 지켜주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관용이 아니다. 이슬람 통치자들의 탄압의 상징인 인두세가 어떻게 관용의 상징으로 둔갑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보통은 그 세액이 1인당 1년에 금화 한 닢으로, 매우 적은 액수라 하지만, 인두세를 걷는다는 것 자체가 차별정책이요, 탄압이다. 오직 무슬림이 아니라는 이유로 세금을 낸다는 것은, 오직 무슬림이 아니라는 이유로 손해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세금의 양은 그렇게 적지 않았다. 규정은 그렇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엄청난 세금이 부과되었는데, 인도에서는 바로 이 지즈야 때문에 항쟁이 일어났고, 왕국이 무너지기까지 했다(17세기 인도의 무굴제국). 18세기 이후에는 공식적인 지즈야가 폐지되었지만, 개별적인 지즈야는 여전히 행해졌다. 20세기 후반에도 이집트에서는 이슬람 과격 단체들이 이집트의 콥트 교인들에게 인두세를 걷었으며, 인두세를 내지 않을 때 상점과 가정, 거리 등에서 폭력과 살인, 방화를 자행하곤 했었다.
또한 국방의 의무를 면제해 준다는 미명하에 군대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 평화요 관용인가? 그것은 그 민족을 완전히 칼로써 지배하겠다는 말이다. 도데체 이슬람이 평화와 관용의 종교요 평등의 종교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말인가? 이러한 탄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이슬람 교로 개종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코란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포교 방식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렇게 강압적인 방법으로 포교했다면 어떻게 이처럼 오랜 세기 동안 그 종교가 존속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발적이지 않고는 그럴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보라, 오늘날도 이슬람은 여전히 폭력적이지만 이슬람 교는 확장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 유일한 해답은 바로 “마귀”이다. 마귀는 역사상 유래없는 거짓말쟁이다. 그가 무엇을 못속이겠는가?
오늘날 지도를 펼쳐 놓고 이슬람 국가들을 보라. 주로 중동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인도 북부에 편중되어 있다. 아라비아 반도는 원래 이슬람의 발상지이다.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왕조가 이동한 곳이니까 당연히 이슬람 교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터어키인들은 이슬람 왕국을 정복한 사람들이지만 이슬람 교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들의 호전성과 이슬람의 호전성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며, 또 이슬람 왕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려면 그 종교를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정치적인 목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였다. 인도 지방에서는 오늘날까지 힌두 교와 이슬람 교가 싸우고 있다. 결국 이슬람 교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파되었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이슬람은 분명히 호전적인 종교다. 그것은 마귀의 종교다. 유대교와 기독교를 주적으로 삼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특히 중동 지역의 지도를 보면,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그 둘레가 모두 이슬람 국가들이다. 이 상황을 구약 시대의 상황과 맞춰보면 아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구약 시대에 그 지역들은 모두 바알 숭배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적국, 곧 하나님의 원수들이었다. 당시의 이스라엘 주변과 오늘날의 이스라엘 주변이 어쩌면 이리도 일치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다.
이사야 13-23장, 예레미야 46-51장, 에스겔 25-32장, 아모스 1,2장 등에는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왕국들에 대한 심판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 내용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 왕국들에 이루어질 심판에 대한 예언이다. 그 심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과거나 오늘날이나 동일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어야 한다. 그 상황은 역사상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바알 대신 알라가 등장한 것 외에는 없다. 이슬람은 그들의 호전성으로 하나님의 성도들을 대적하다가, 정말로 “호전적인” 왕이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지역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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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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