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대통령의 업적
글쓴이 / 김충남 박사/ 1969 서울대 문리대 졸업
1971 서울대 대학원 정치과 졸업
1978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첫째, 이대통령은 자유 대한민국의 건국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승만박사의 투철한 자주독립정신과 소련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반공이념에 힘입어 이룩된 것이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대해 관심도 없었을 뿐 아니라 새로 설립된 유엔을 통해 소련과 협력하여 평화의 시대를 구축하려 했기 때문에 소련과 타협하여 한국을 신탁통치를 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한반도에 공산위성국가를 세우려 했다. 국가건설의 전략전술 면에서 소련은 미국보다 앞섰다고 할 수 있다. 공산세력은 이념으로 무장된 지하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기존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선전 및 투쟁 수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주적 국가건설은 국민에게 자유와 권리를 주고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공산주의 국가건설은 적극적, 조직적, 전투적이었지만 민주적 국가건설은 소극적, 비계획적, 평화적인 것이었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강조하기만 했지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효과적인 대책을 갖지 못했다. 그러한 가운데 소련의 팽창정책을 우려한 처칠수상은 이미 1946년 초 “동유럽 대륙에 철의 장막이 내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정식 교수에 의하면,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에 이미 “북한지역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고 밝히고 있다. 소련군은 북한 점령 즉시 공산정권 수립에 착수했다. 1946년 2월에 설립한「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북한지역의 사실상의 정부였다. 김일성 주도하의 인민위원회는 소련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반대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조선공산당과 기타 추종세력을 통합하여 1946년 8월 북조선 노동당을 창당했으며 노동당의 각종 전위조직도 구축하여 북측지역을 완전 장악했다.
그들은 강력한 공안기구를 설치하여 주민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감시했으며 모든 은행과 주요산업을 국유화했고 언론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그들은 또한「북조선 중앙은행」창설, 토지개혁 등, 남북분단을 기정사실화 하는 정책들을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1947년 2월에 이르러 그들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북조선 인민위원회」로 바꾸어 정부수립 절차를 사실상 완료했다. 인민위원회는 그해 말부터 군사조직을 재편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는 조선인민군을 공식 발족시켰다.
러시아의 한국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는 비밀해제된 문서들을 통해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1946년 5월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을 때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우기로 이미 결정했으며 남북분단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하도록 김일성에게 지시했고 김구 일행은 그들의 술책에 속아 평양으로 갔던 것으로 밝히고 있다.
란코프는 “남북협상이 있기 1주전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평양에서 열릴 남북협상 문제를 논의하고 남북협상을 통해 남한의 선거를 반대하고 선거 결과를 부정하며, 외국군 철수와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라”고 김일성에게 지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구 일행이 아직도 평양에서 협상중인데도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전체회의를 열고 북한의 헌법초안을 승인했으며, 이후 최고인민회의 소집 등 정권 수립에 필요한 절차와 일정을 일일이 결정하여 김일성에게 지시했다.
통일정부가 수립되지 못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당시 소련이 받아들일 수 없는 통일정부 수립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군과 김일성집단은 북측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실시를 거부함으로서 분단을 고착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북한에 공산기지를 건설하고 그 다음 남한을 공산화하려 했다. 따라서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단독정권을 먼저 세운 것은 소련과 북한이었다.
이승만박사의 민주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확고한 의지가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신탁통치가 되었거나 김구의 주장처럼 김일성과 타협하여 좌우합작정부를 수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소위 진보세력들은 이 대통령을 비난하며 김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김구는 신탁통치는 반대했지만 좌우합작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으나 그렇게 했다면 신탁통치를 한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 분명하다.
2차대전 후 동유럽 국가에서 소련의 지령 하에 좌우합작정부를 수립했지만 모두 공산화되고 말았다. 소련군이 점령한 나라치고 공산국가가 되지 않은 나라가 없다. 소련은 한반도에 공산정부가 아닌 어떤 정부도 거부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밝혀지고 있다. 소련은 미국을 설득하여 한반도에 좌우익 연립정부를 세운 후 동유럽 국가들처럼 공산세력이 연립정부를 완전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이승만박사는 가능한 한 빨리 독립된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지만 그가 원했던 것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부이었지 어떤 정부라도 세우려 한 것이 아니었다. 미․소 공동으로 추진했던 신탁통치하의 좌우익 연립정부 수립계획에 대해 이승만 박사의 단호하고 끈질긴 반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둘째, 이 대통령은 가장 어려운 여건에서 건국의 사명을 완수했다.
70대 중반의 망명객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이처럼 어려운 나라를 이어받았다. 건국 당시 나라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정치․행정적, 경제적 바탕은 너무나 취약했기 때문에 강력한 리더십이 아니고는 나라의 기초를 잡기 어려웠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서구 국가들의 식민통치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잔인했다. 프랑스는 한반도와 비슷한 인구를 가진 인도지나에 3천명의 공무원으로 통치했지만 일본은 한반도에 2개 사단의 주둔군 외에 5만 2천명의 공무원들을 두어 철저히 장악했고 한국인에게는 최소한의 자치도 허용하지 않았다. 한반도에는 일본인이 70여만 명이나 와 살면서 금융과 산업의 90% 이상을 독점했다. 그리고 한반도는 8년 동안이나 일본제국의 대동아전쟁을 위해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했기 때문에 해방당시 한국은 그야말로 파산상태였다.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자원과 공업시설은 대부분 북쪽에 있었다. 당시 북한은 전력의 96%를 생산했기 때문에 북에서 송전이 중단되면서 남한은 암흑천지가 되었고 몇 개 안되는 공장도 모두 멈추었다. 남한에는 인구의 3분의 2가 있었고 해외에서 3백만, 북쪽에서 백 50만 이상이 몰려오면서 인구는 갑자기 20%나 늘어나 주택은 말할 것도 없고 먹고 입을 것조차 크게 부족했다.
그리고 식민통치 기간 중 일본에 종속되었던 경제는 해방 후 일본과의 경제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면서 경제는 완전붕괴 상태에 빠져 정부는 세금을 걷어 들일 것이 별로 없었고 따라서 재정이 빈약하기 짝이 없어 정부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건국당시 정부는 형식뿐이었고 경험을 가진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신생국가들의 국가건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움이 많지만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등 우리나라가 겪어야 했던 시련은 다른 어느 신생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던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에도 이 대통령은 불굴의 정신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본으로 하는 현대국가의 제도를 구축하여 오늘의 한국이 있게 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소련식 모델을 받아들여 북한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민족의 3분의 1을 파멸과 절망에 빠뜨려 놓고 말았다. 중국에서만 지낸 김 구 선생은 서방세계와 현대국가를 잘 몰랐으며 당시 대부분의 지도자들도 그러했기 때문에 이 대통령이 아닌 다른 지도자가 건국을 주도했다면 그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셋째, 이승만대통령은 단호한 반공정책으로 나라를 지켰다.
반공지도자로서 처칠과 장개석이 잘 알려져 있지만 처칠은 철의 장막을 경고했을 뿐 한국전쟁 당시 전쟁이 확대될까 우려하여 조속히 휴전하도록 트루먼에서 압력을 가했던 장본인이고 장개석은 국공합작으로 중국본토를 빼앗긴 역사의 죄인일 뿐이다. 한국은 분단되고 나라의 기초도 허약하여 공산주의를 막아내기가 더욱 어려운 처지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반공지도력으로 나라를 지켰던 것이다.
이 대통령은 공산주의는 인간 본성을 거역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패망하고 말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공산주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기 때문에 40년간 일본의 노예로서 고통 받아 온 우리민족이 또 다시 공산세력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공산세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고집불통이며 비타협적이고 비민주적인 지도자라고 국제적으로 비난받았지만 이대통령의 예측대로 공산체제는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이승만박사는「독립정신」에서 러시아를 청나라와 다름없는 야만적인 후진국이지만 한반도에 대해 일본에 뒤지지 않은 야욕을 가진 위험한 나라로 경계했다. 러시아에 대한 그의 경각심은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반공사상으로 바뀌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면서 소련의 팽창야욕에 대한 그의 우려가 되살아났다.
특히 1945년 여름 소련이 동유럽 국가들을 점령하여 위성국으로 만드는 것을 보고 이 박사는 소련이 아시아에서 같은 정책을 쓰리라고 예견하고 절대로 소련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미국 관리들에게 역설했던 것이다. 이 박사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동안 스탈린 치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소련국민은 자유를 잃고 집단농장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하며 고통 받고 있었고 2천만 이상이 처형되는 비참한 현실을 생생히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으로부터 북한의 남침 시까지 1년 반 동안 공산세력의 공산화 책동으로 남한은 내전상태에 있어서 오늘의 이라크상황을 방불케 했다. 많은 지역이 낮에는 대한민국이었지만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었다. 공산세력은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를 무산시키기 위해 제주 4.3무장폭동을 일으켰고 정부수립 직후에는 여수반란을 통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당시 국민들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잘 몰라 그들의 기만적인 선전선동에 쉽게 속아 넘어갔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긴박한 실정을 간과한 채 민주주의만이 공산주의를 막는 최선의 길이라는 막연한 주장을 했던 반면 소련의 스탈린은 한반도 공산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김일성정권에 대대적인 군사 경제적 지원을 했다. 더구나 미국은 이승만 정부도 장개석 정부처럼 공산세력에 패망하고 말 것으로 판단했으며 이 대통령을 “작은 장개석”이라 조롱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1948년과 1949년에 걸친 공산세력의 총공세를 국가보안법 제정, 토지개혁 등, 효과적인 반공정책으로 이를 막아냈던 것이다. 당시 동유럽에서 공산세력이 연이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거대한 중국이 공산화되었고, 동남아지역에서 공산세력이 빠르게 팽창하고 있었으며 한국은 공산세력에 둘러싸인 섬과 같았다. 그래서 당시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기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넷째,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중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한국서적을 보면 6.25전쟁 중 대통령과 정부가 무었을 했는지 제대로 연구되고 기록된 것이 별로 없다. 미국 자료들을 보면 더욱 한심할 뿐이다. 이것은 미국의 전쟁이었을 뿐이고 한국의 역할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이 대통령의 이름이 한두 번 거론되고 있지만 휴전반대 등, 부정적인 시각에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6.25전쟁은 민족사에서 최대의 비극이었다. 미국은 3만 여명이 전사했지만 한국군은 그 열배 이상인 32만 명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었고 민간인도 남한에서만 백 50만이상이 죽었으며 온 나라가 잿더미로 변했다. 또한 전쟁 당시 전선의 3분의 2는 한국군이 담당했을 만큼 한국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이 어떤 역할을 했고 정부는 무었을 했으며 국군은 어떻게 싸웠는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최악의 상황 하에서 뛰어난 전쟁지도력을 발휘했지만 그것은 전혀 평가되지 않고 있다. 그는 미국의 정책결정 과정을 미국인들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고 영어에 능통했으며 뛰어난 외교전략가였기 때문에 전쟁 중 맥아더 장군을 위시하여 미국 지도자들과 전쟁수행 문제를 긴밀히 협의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 분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이 대통령은 70대 중반의 고령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비슷한 나이였다. 오늘날 고속도로가 발달되어 있고 대통령 전용 비행기와 헬리콥터도 있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활동은 여의치 못했습니다.
전쟁당시 대통령의 전용비행기나 헬리콥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도로사정은 포장은커녕 차량이 다닐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엄동설한이나 삼복더위 할 것 없이 모든 전선, 모든 부대들을 찾아 장병들을 격려했기 때문에 장병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터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대통령은 부상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병원마다 찾아다녔고 피난민 천막촌, 고아원, 그리고 학생들의 배움의 현장을 찾아가 격려했던 것이다. 또한 전쟁피해를 복구하고 있는 전국의 철도, 항만, 공장, 학교, 마을을 일일이 돌아보고 격려했다. 이처럼 이 대통령은 전쟁 중 한국의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훌륭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석을 가진 야당은 전쟁 중인 1952년 헌법개정을 통해 이 대통령을 축출하려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인들은 강을 건너는 동안 말을 갈아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2차대전 중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4선 대통령으로 선출했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인 10년간 국회의원 선거도 중단하고 전쟁을 위해 국력을 결집했던 것이다.
다섯째, 이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하여 안보의 울타리를 튼튼히 했다.
한미방위조약의 쟁취는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역사적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한미방위조약이 없었다면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에서 공산세력이 남한공산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쉬웠을 것이다. 또한 과도한 국방비부담으로 국민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고 공산세력은 이를 부추겨 경제성장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나라에 대해 미국은 원조조차 꺼려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조속히 휴전하겠다는 서방국가들의 조바심을 역이용하여 단독북진 주장과 반공포로석방 등으로 휴전회담을 반대하면서 휴전의 조건으로 한미방위조약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 또는 소련과 정면충돌을 피하려 했으며 그래서 한국은 미국의 안보전략에서 수호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단코 한국과의 방위조약을 반대했다.
이대통령의 휴전반대에 대해 트루먼, 아이젠하워, 처칠 등 서방 지도자들이 입을 모아 그를 비난했고 미국은 이대통령을 제거하려는 계획까지 수립했으며 세계 언론은 이 대통령을 정신이상자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국가의 생존과 번영이라는 결정적 국가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강대국들의 압력에 단호히 맞서 결국 방위조약을 쟁취했던 것이다. 그는 국제정세와 미국의 정책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허약하고 어려운 지경에 처한 나라의 지도자였지만 초강대국 미국의 전략과 정책까지 바꾸게 하면서 한미방위조약을 끝내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미 방위조약 서명이 끝난 후 이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우리 후손들은 대대로 이 조약의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이대통령의 예언대로 전개되었다. 이 조약이 없었다면 한국의 안보는 언제나 위협받았을 것이며 월남처럼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과중한 안보부담으로 경제발전이 어려웠을 것이며 외국인들도 한국에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미동맹이 있었기에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의 경제발전을 돕기 위해 미국시장을 개방했다.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한일수교도 불투명했고 일본기업들이 한국에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며 월남 참전으로 경제개발에 절실할 달러를 벌어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의 안보우산이 없이는 한국의 민주발전도 어려웠을 것이다. 요컨대, 한미동맹은 지난 반세기 한국 안보와 번영과 자유의 초석이 되었다.
휴전협정이 얼마나 위험하며 한미방위조약이 왜 중요했는가는 월남의 경우를 보면 분명한 것이다. 미국과 공산측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은 지 2년 만에 월남은 공산화되고 말았다. 키신저는 평화조약을 맺은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지만 미국은 이 조약을 빌미로 월남에서 철군했고 그래서 공산군은 마음 놓고 월남을 점령했던 것이다. 만약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없이 휴전협정이 채결되었더라면 한국은 월남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왕조는 은둔의 왕국으로 국가안보를 중국에 의존하며 명맥을 유지했으나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하면서 주권을 지킬 수 없었다. 한반도는 세계 주요 열강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곳으로서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뛰어난 외교력 없이 나라의 안위와 이익을 수호할 수 어렵다. 따라서 외교적 역량은 한국의 대통령 자질로서 필수적인 것이다.
다행히 이 대통령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국제정세에 대한 남다른 혜안과 역사의 흐름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서 건국과 6.25전쟁에서 놀라운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다. 김구 선생을 위시한 당시 어떤 지도자도 결코 이 대통령과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이대통령은 ‘외교의 귀신’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리나라가 그처럼 탁월한 외교전략가를 가졌다는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 대통령은 교육입국을 통해 국가발전의 핵심적 기초를 마련했다.
해방당시 우리국민의 78%는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었다. 이 대통령은 청년시절부터 나라가 쇠퇴하여 주권을 침탈당하게 된 것은 국민들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스스로 신학문을 배웠으며 감옥에서도 글을 가르치고 신문에 논설을 쓰는 등 온갖 방법으로 국민을 계몽시키고자 했다. 그의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철학은 하와이에서 한인계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하면서 씨를 뿌리기 시작했고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열악한 제반 여건에도 불구하고 6년제 의무교육을 채택하는 등 혁명적인 교육정책을 실시했다.
바닥난 국가재정에도 불구하고 수천 개의 교실을 새로 짓고 수만 명의 교사들을 양성해야 했으며 국사, 국어 등을 각급학교 교과서를 역사상 처음으로 편찬했던 것이다. 교육예산이 국방치안비 다음으로 많았다는 것은 이 대통령이 교육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국민의 교육열은 불같이 타올라 전쟁 중 한 겨울에도 천막교실이나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했으며 군부대, 직장, 마을에서도 성인들을 위한 교육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50년대 말에 이르러 국민 95%가 글을 읽게 되었고 신문을 보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0년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 중에서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로 평가받았으며 그리하여 잘 교육된 국민은 급속한 경제발전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육혁명은 한국 민주화의 씨앗이었고 한강의 기적의 뿌리였다고 할 수 있다. 대다수 개발도상국과 한국의 차이는 교육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분이 초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그 같은 교육혁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정부 왜곡의 분석
이승만 대통령이 최악의 상황에서 건국을 하고 공산침략으로부터 나라와 국민을 수호한 역사적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집단과 남로당 세력이 조직적으로 조작하고 왜곡 선전했기 때문이다.
북한공산정권은 생존을 위해 남한정부를 파멸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이승만만 제거하면 공산통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선전선동 수단을 총동원해서 이승만과 대한민국정부를 분단을 주도한 정부, 친일분자들이 득세하는 정부, 국민을 탄압하는 독재정부, 그리고 미국의 앞잡이 정부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김일성은 친일파를 청산했는데 이승만정권은 친일파를 옹호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김일성은 공산독재체제 수립을 위해 친일파뿐만 아니라 동조하지 않는 세력은 모조리 숙청했다. 그러나 건국 직후 사정은 공산세력의 위협을 막는 것이 더 시급했다. 당시 제주는 좌익세력의 무장폭동으로 무정부상태였고 제주사태를 진압하러 가라고 명령받은 여수주둔 14연대는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처럼 군대와 경찰을 비롯한 정부 주요기관에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침투해 있었다. 치안과 국방을 담당할 군대와 경찰에서 좌익분자를 제외하면 일본 군대나 경찰에 있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친일분자를 제거했다면 치안과 국방은 좌익세력이 장악하게 되었을 것이고 나라는 공산세력에게 넘겨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또한 당시 지식인층 대부분이 친일인사였는데 이들을 다 제거해 버리면 전문인, 교사, 기술자가 모자라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둘째,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에서 이승만을 그들의 정책에 방해가 되는 고집스럽고 비합리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독재자라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세계전략 또는 동아시아전략 차원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한국의 이익을 등한시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전쟁의 목표나 휴전문제는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로 판단했기 때문에 미국과 정면 대결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이승만정부가 인권을 침해하고 대통령권력을 남용했다고 비난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대통령은 “우리는 경제든 그 무엇이든 언제든지 재건할 수 있지만 나라를 지키는데 실패한다면 모든 것을 가졌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건국초기 특히 공산침략을 받았을 때, 그리고 북한의 위협이 심각했을 때, 반공과 국가안보가 최우선 가치였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오늘의 기준으로 결코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952년 부산에서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하여 두고두고 비판하고 있지만 장개석 정부는 1949년부터 1988년까지 계엄령 하에서 통치했다. 지구 저편에 있는 워싱턴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직후인 1950년 12월 15일 한국전쟁 때문에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우리의 가정, 우리나라, 우리가 신봉하고 있는 모든 것이 위기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기본권을 제한하고 전시총동원체제로 전환했으며 1952년 4월 철강노조 파업 시 무기생산의 차질을 우려하여 상무부로 하여금 철강회사를 접수하여 직접 운영하도록 대통령 명령을 하달했던 것입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의 한사람으로 칭송되고 있는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초치를 남발했다. 그는 국회동의 없이 군사작전을 명령했고, 징집을 기피하거나 반대하는 사람, 적대세력을 지원하거나 호의적으로 대한 사람들은 모두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했으며, 자신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천 명을 재판 없이 투옥했고 비판하는 신문사 발행인들을 체포했으며 군인들을 선거에 개입하게 했고 야당의원들을 의회에서 추방함으로서 언론에 의해 독재자 또는 폭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라가 있고나서 헌법이 있다면서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헌법을 위배할 수도 있다”고 선언하고 “평상시 헌법에 위배될지 모르지만 그 같은 조치들은 나라를 보위하고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1주일 전 윌슨 대통령은 “전쟁에 임하면서 우리는 잔인하고 무자비해야 한다. 그 같은 정신은 의회, 법원 등 사회 모든 부문에 적용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미국의 전쟁에 이기지 못한다면 헌법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언론과 집회의 자유도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1차대전 기간 중 미국 연방정부는 2천여 명을 간첩혐의로 체포하여 그중 절판정도를 투옥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2차대전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여 4선 대통령이 되었으며 2차대전 당시 그는 갖가지 비상대권을 발동했다. 물가와 임금을 통제했고 수천억 달러의 예산을 지출했으며 수백만 명을 징집했다. 언론 검열을 실시했고 10만 명 이상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수용소에 격리시켰다. 이 같은 조치들이 “평시에는 헌법에 위배되며, 비민주적이고 그야말로 독재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미국인들은 이를 수용했던 것이다. 2001년 9월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이 있고 나서 부시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인권을 제한하고 있다.
한국처럼 긴박한 안보위협 하에 있는 이스라엘에서는 건국 후 15년 동안 안보우선의 권위주의통치를 경험했다. 초대 수상 벤구리온은 "민주적 독재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 나라는 헌법과 법률에 국가안보를 우선적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인권과 자유를 제한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민주국가”라 불리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자유보다 안보가 우선입니다. 따라서 나라를 구한 이 대통령을 인권을 침해한 독재자라고 비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
넷째, 계속되는 정치적 격변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대통령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따라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을 시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는 장교를 길러내는 사관학교에서도 역사교육은 대한민국 이전의 역사만 가르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책을 보면 절반은 대한민국의 건국인데 혼란과 갈등을 부각하고 있는 반면 절반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일사불란한 발전과정을 수록하고 있다. 정부기관에서 발행한 자료가 이 모양이니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제대로 평가한다는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역사학자들은 현대사에 대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고 그 결과로 일반국민들도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역사교육은 이미 오래전에 암기과목으로 전락했고 그것도 선택과목이 되어 역사인식은 한심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젊은 세대들이 역사에 대해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책임이요 정부의 책임이다.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국민이 어떻게 위대한 역사를 개척할 수 있겠는가?
이같이 된 데는 지식인들이 브루스 커밍스와 같은 외국 수정주의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커밍스는 다분히 친공(親共)적인 입장에서 한국역사를 해석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정부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폄하했지만 김일성과 북한 공산정권의 스탈린식 가혹한 탄압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그 이유를 커밍스는 남한에는 국민의 저항이 있었지만 북한에는 모두가 김일성을 지지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
김일성이 그렇게 인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선정을 베풀었다면 왜 해방당시부터 1947년 중반 사이에 매일 평균 4,000 여명이 남하했으며 북한인구의 17%에 해당하는 백 80만 명이 남쪽으로 내려왔는가?
마지막으로 과거 지도자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잘못되었다.
부시 대통령이 오늘의 이라크에 가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선진 민주주의의 잣대를 가지고 한국의 과거 지도자를 평가하면 모두 잘못된 지도자로 볼 수밖에 없다. 또한 학자들은 과거 지도자들을 연구하려 해도 권위주의 지도자를 옹호한다고 비난받을까 우려하여 연구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정치학자들도 이승만대통령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4.19세대를 비롯한 한국 지식인들과 야당정치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는데 치우쳐 그의 역사적 공로는 묻혀버리고 부정적인 인식만 보편화된 실정이다.
저는 지난 10여 년간 대통령을 연구하면서 민주주의가 제도화되고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국민교육 수준이 높은 서구의 리더십 평가기준을 개발도상국에 그대로 적용하면 개발도상국 지도자는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자, 또는 독재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저는 리더십 환경이 다르면 리더십 전략과 스타일이 다르지 않으면 성공하는 리더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저는 국가발전 단계에는 선진국과 달리 달성해야 할 과제가 세 가지 있다고 보고 있다. 첫째로 국내외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며 둘째는 경제적 바탕을 마련하는 일이고 그 두 가지 바탕위에서 민주주의는 서서히 발전된다고 본다. 개발도상국의 한정된 경험과 능력으로 안보, 경제, 민주주의 세 가지를 한꺼번에 달성할 수 없고 단계적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시대적 과제인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데 성공했다고 보며 그런 점에서 그는 역사적 사명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본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의 철학과 업적을 올바로 평가하여 그분의 역사적 위상을 공고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면 나라 전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조지 워싱턴과 아브라함 링컨 등을 신화적 존재로 부각하여 교육시키고 있다.
또한 모든 전직 대통령을 위한 기념관과 도서관을 건립하고 곳곳에 기념물을 세우고 거리와 건물, 학교, 항공모함, 공항 등에 대통령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직 대통령은 존경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국민들의 단합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다.
저는 1993년 초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와 기념사업을 필요성을 말씀드리고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기념사업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김영삼대통령은 취임직전 김구선생 묘소를 참배했고 그 며칠 후인 3.1절 기념식에서는 문민정부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법통을 바로 이어받았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 후 대통령들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기념관이나 동상이 하나도 없는 나라는 아마도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은 완전 파멸상태에 있지만 곳곳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과 기념물이 서있다. 한국에도 각계 지도자들을 위한 동상이 많고 특히 김구, 서재필, 안창호, 윤봉길, 안중근, 안익태 기념관 등, 독립운동에 기여한 지도자들을 위한 동상과 기념관이 모두 있다. 그런데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공공장소에 하나도 없고 그분의 건국이념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해방 당시 북한은 모든 면에서 남한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 북한은 완전히 파멸상태에 이르렀고 한국은 자유와 번영이 넘치고 있다. 그 근본적 이유는 우리는 이승만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제도를 도입하여 계승 발전시켰지만 김일성은 수천만의 인민을 죽이고 국민을 노예로 만든 소련식 국가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에 그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한국인은 세계 어디를 가도 대한민국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말 할 수 있지만 지도자를 잘못 만난 북한은 세계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세계사의 추세를 볼 때, 남북한의 엄청난 국력격차를 볼 때 그리고 남한인구가 북한의 두 배가 넘는 것을 고려할 때, 한국주도로 통일이 이루어 질 것이 멀지 않았으며 그것이 역사적 순리이다. 이것은 이 대통령이 그토록 열망했던 민주통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통일시대의 역사를 준비하려면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이념을 바로 세우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민주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남산 위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과 기념관을 세워 후손들이 민족 최고지도자로 숭상하고 기리게 해야 할 것이다.
국민정신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국민정신 확립을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 정통성의 계승 발전을 위해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이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기념사업을 함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여 그분의 애국애족정신과 건국이념, 그리고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연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청소년들에게 알리고 교육하는 활동을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저희 우남 이승만박사 숭모회에서는 그러한 방향으로 꾸준히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바이다.
[귀하께서 자발적으로 정치에서 은퇴함으로써 귀하의 나라가 귀하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게 되었는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히 상기하게 됩니다. 1945년 한국의 재탄생은 오랜 세월에 걸친 귀하의 끈질기고 피나는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대한민국이 공산군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귀하께서 보여 주신 확고한 결의와 용기는 모든 한국인들은 물론 전체 자유세계의 존경과 감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때부터 귀하의 영도 하에 한국은 전쟁의 깊은 상처를 회복하였으며 그것은 일생에 걸친 귀하의 노력에 대한 기념탑이 될 것입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편지. 1960.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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