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도와 그의 영성
4) 이용도의 신비주의 특징
(1) 고난 받으시는 예수 신비주의
그의 신비주의의 특징을 우리는 우선 고난 받으시는 예수- 신비주의로 볼 수 있다.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키운 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키운 바 되는 이 합일의 원리요, 오직 나의 눈이 주를 바라보라, 일심으로 주만 바라보라, 잠시라도 딴눈 팔지 말고 오직 주만 바라보세. 나의 시선에 잡힌 바 주님은 나의 속에 안주하시리라.”
여기 예수와 하나가 되는 신비적 융합의 기쁨이 서리어 있다. 그런데 이 예수는 고난 받으시고 수치를 당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권세의 주라든가 교의학적으로 체계화된 성부,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오로지 비운과 견딜 수 없는 형고의 길을 가는 예수의 모습만이 상징되어 있다. “33세의 한창 청년인 예수는 불쌍하게도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갖은 수치와 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가시관, 끔찍한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일에 주가 피를 흘리셨습니다. 전신의 피를 다 쏟아 놓으셨습니다.”
그는 하나의 전도자로서 고난의 의미를 실존적으로 실감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용도는 죽기 5개월 전에 어느 여인에게 써 보낸 산문시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함께 아파하고, 고난당하고, 죽임당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주의”의 극치를 노래한다.
“오 나의 자매여, 나의 사랑하는 자여, 울어라.
성자야 울어라.
성녀야
겟세마네는 어디 있어 나의 피눈물을 기다리누.......
엎어지고 쓰러지며,
십자가를 등에 지고 멸시, 천대, 비속 중에
우리 주님 걸어가던......
오, 너 예루살렘 거리여,
너는 어디서 또 나를 기다리고 있느냐.
때가 되면 외쳐 부르라, 그 길 밟을 내 여기 있으니.
성자의 살을 찢고 뼈를 으스고, 그의 선혈을 마시던
오, 너 골고다여,
너는 어디서 또 어디서 나를 기다리느냐,
아직도 네 배를 차지 않았는가.
나를 위하여 홍포를 깊는 자 어디 있는가.
가시관을 엮는 자여 어디 있는가.
지었거든 가져다가 나를 입혀라,
우리 주님 입으셨던 그 홍포니
엮었거든 가져다가 씌우라.
내 살과 피를 마신 다음에야
내가 어디로부터 왔었는지 너이가 알리라.
나를 땅에 보내신 자는 오직 내 아버지인 줄
그 때에야 너이가 알리라.
‘오, 나는 다 이루었다.’
어서 이 날이 와지이다.
이는 나의 피가 땅에 떨어지는
그 거룩한 골고다의 날일지라.
주의 음성 들은 이 몸
지금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주의 뒤를 따라가누나.
(2) 시무언의 신비주의
이용도가 “나는 성 시므온을 우러러 봅니다”라는 편지를 쓸 때에 영어표기 시므온을 시무언으로 썼다.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성령의 사람 시므온은 말없이 오랫동안 주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성령의 지시로 주님을 만날 때 한없이 기뻤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축복한 후 모든 사람에게 주님을 소개한 후 사라졌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언제나 시므온과 같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이용도가 이렇게 “말을 말아야지.”라고 몇 번이고 다짐하며 체념처럼 외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여진다.
첫째로는 그리스도와 만나는 순간의 기쁨을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신비 때문이다. “당신의 손이 나를 만지시매 나의 조그만 가슴은 기쁨으로 도를 잃어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말을 발합니다.” 그는 이 환희를 일생토록 계속하려 했고, 또 노래로 읊어 보려고 애써 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소리가 나지 않고 또 그 황홀은 짧았다. 이런 때 그는 자학하고 어쩔 줄 말라 소리쳐 운 것이다. “고요한 밤 무언의 사랑이 흐르는 그 품, 그 곳에 저를 품어 길이 쉬며 보호하심을 받게 하옵소서.” 라는 기원이다.
둘째로 그가 ‘시무언’을 좌우명으로 정한 것은 말년에 교회의 박해가 심하여질 때였다. 그에게 당시의 교회는 기독교적인 면을 송두리째 상실한 폐허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랑과 진실이 빠져 나간 형체만의 앙상한 악의 상징으로밖에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 때부터 자기의 생이 ‘시무언’이어야 할 것을 다짐했다. “나는 구역을 맡아 교회정치를 일편으로 보며, 전도를 일편으로 하는 이런 것은 나의 사명이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나는 구역담임을 내놓아야 하겠나이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한 은밀한 곳을 주어 얼마 동안이든지 주로 더불어 교통할 수 있는 곳을 내게 주시겠지요. 그것을 기다립니다.”
(3) 사랑과 신비적 합일
그의 신비주의는 예수에 대한 사랑이 압도적이라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는 ‘신앙생활’에 기고하면서 “예수보다 더 귀한 존재 나에게 없다.”나 “부하거나 죽거나 사랑할 이 예수뿐이다.” 와 같은 말들을 되풀이해서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미래의 축복이나 의인됨이나 위로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을 바라지 않는 사랑” 이다. 이 사랑, 그것이 곧 천국의 기쁨이요, “지옥도”, “주의 손의 채찍이 있어도” 그 사랑을 안할 수 없다. 그래서 다만 “주님만 소유하도록, 다만 그만을 구할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명상한다.
신앙과 고백이 의식되지 않고 소박하게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데 그의 신비주의의 특징이 있다. “기도가 있든 없든, 참회의 눈물이 있든 없든 우러러 쳐다만 보라, 이 앙모, 전부를 바치고 다만 우러러만 보는 생활, 이는 가장 진실한 영교의 생활이니라.”
여기에 강조되어 있는 것은 물로 환상이다. 신비주의 특유의 시각적 명상이다. 하지만 얼마나 그의 사랑이 예수의 모습에 집중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더 현저하게 나타난 있다. 예수의 모습을 앙모하고 그와 하나 되어 자기를 잊어 미쳐 버리는 그러한 깊이를 이 사랑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고난’의 모습으로만 이해된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예수의 고난이 세상에 보내진 구속사의 고난의 측면보다는 못을 박는 사건, 죄스러운 사상에서 이해되는 고난이다. 주의 고난을 우리가 가져다준다는 처절한 죄책감으로서의 아픔, 그것이 묘하게 반영된 그런 고난이다. 주께서 우리 위해 돌아가신 의미보다 “우리가 못 박아 돌아가게 한” 의미가 더 크다. 이것이 기막힌 현실로서 그에게 압도되어 왔다. 이것은 감사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그 속에 있음을 우리의 신앙 체험 속에 생성시킨다. 그래서 결국 그 고난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것이라는 감정을 낳게 한다. 여기에 이용도가 갖는 고난의 신비주의라는 남다른 모습이 있다. “나는 다만 골고다로만 주의 뒤를 따라갑니다. 나의 눈물이 주님의 그것같이 뜨겁지는 못해도……. 오! 주의 모든 것이 되어 지이다.” 여기 그의 고난의 신비주의의 핵심이 들어 있다.
고난의 신비주의가 갖는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다. 첫째로 주의 모든 것이 나의 모든 것이 된다는 고난체험의 합리성은 자기 자신을 고난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위협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골고다의 길이 나의 길”이라는 말이라든가, 예수의 아픔이 그대로 복사된 “내 마음이 심히 민망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하는 말들은 자기가 주 자신임을 비스듬히 비추일 수도 있는 말들이다. 둘째로 이것은 ‘모든 것’ 이라는 말의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융합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찾을 길이 없고, 다만 그것이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어 준다고 하는 한도 내에서만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융합해 그 아픔을 내 것으로 느껴서 환희와 합일에 임하는 체험은 그에게 그것 자체로서의 의미가 있었고, 그 이상이나 이하여서는 안 되었다. 그리스도와 만나 그 속에 깊이 들어가 “나 잊고”, “미쳐서” 그와 한 몸이 되는 것, 그것만이 이용도에게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었다.
그것이 이용도의 “아픔을 함께 당하는 예수의 신비주의”였다. “예수다, 우리의 신앙의 접점은 예수다.” 여기 의인론과 구속론, 그리고 삼위일체론, 이것이 결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고난의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지접 참여하는 신비주의요, 고난에 참여함으로서 하나님과의 내적인 ‘신비적 합일’을 의미하는 일종의 ‘성화의 신비주의’이기도 하다.
이용도가 이러한 신비주의적 신앙을 갖게 된 데에는 시대적 배경을 중시해야 될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일본의 식민정치에 의한 갖은 박해와 수탈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그 생명력을 잃고 기독교적인 면을 상실하여 버렸을 때, 이용도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더욱더 참여하는 길만이 참된 신앙이라고 본 듯하다. 그의 눈에는 루터가 말한 ‘이신득의’의 정통적인 신앙을 계승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심하게 표현하면 바벨탑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용도는 생의 핵심을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보고 있다. 자기와 그리스도의 합일은 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사건 사이에 아무 연속성이 없는 것이 독특한 면이다. 연속성이 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당하는 날을 ‘완성의 날’로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비통하게 십자가의 벌거벗은 몸으로 최후를 마치신 그 예수를 따라갈 뿐이다. 하여간 우리의 피 한 방울이 떨어지는 날이라야 우리의 일은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 자신이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날에 우리의 완성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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