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도와 그의 영성
2) 이용도의 생애
(1) 초기- 신학생 이전 시대
이용도는 1901년 4월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음주벽이 심한 이덕흥 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다 부친의 무절제한 생활과 모친의 독실한 기독교의 경건생활은 자연히 충돌을 일으켜 항상 가정불화가 그치지 않았고, 모친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모친의 눈물의 생활은 기도의 생활로 변했고, 눈물의 기도는 셋째 아들인 이용도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가 13세 되던 해 벌써 기도생활을 시작하여 어떤 때에는 교회의 종각에 올라가 여러 시간 혹은 밤을 새워 가며 기도를 드린 일이 있을 정도였다. 그의 소년시절은 곧잘 울기도 하고 잔병에 시달리기 일쑤여서 자연히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시변리 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때에는 우리의 국권이 빼앗긴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기 때문에 나라를 잃은 설움이 이용도의 가슴속에 뼈저리게 스며들었고, 더구나 학교에서 자행되는 기독교 신자에 대한 탄압은 날로 심해져 마침내는 학교에 퇴학원을 내기도 하였다. 교장의 만류로 학교를 계속하기는 하였으나 이때부터 그의 영적 생활에는 뚜렷한 모습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신앙은 이와 같이 생활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고 그의 영적인 면에도 보여 벌써 열서너 살 때에 마귀를 만나 물리친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1915년에는 개성 한영서원에 입학했는데 그의 중학시절은 고민과 눈물로 채워진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4년제인 이 학교를 9년 만에 졸업한 사실만으로도 그의 어려웠던 시기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1919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서너 차례나 체포되고, 징역형을 받아 3년 동안 복역하기도 하였다. 그가 형을 마치고 출감했을 때는 이미 동료들의 졸업식이 끝난 지 6개월이 지난 후였다. 독립운동은 그의 애국심을 새롭게 자극하여 1924년 봄 그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5년 동안 네 번이나 투옥되었는데, 그가 감옥에서 보낸 기간은 모두 3년 이상이었다. 1923년 8월에 석방된 이용도는 당시 송도교보 교장이었던 왓슨의 권유로 이듬해인 1924년 협성신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2) 중기- 신학생 시절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그의 애국적인 열정은 식을 줄 몰라 신문이나 잡지, 법률, 정치서적을 탐독하고 논쟁과 이론투쟁을 일삼는 문제 학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그는 마음의 안정을 찾기에 노력하여 얼마 후에는 유년주일학교 사업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고, 동요와 연극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호빈과 이환신과 가까워져 셋은 현저동에 방을 세내어 같이 기거하기도 했다. 그들은 당시 무기력하고 점점 굳어져가는 한국교회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2학년이 끝나던 1925년 겨울에 이용도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게 되었는데 그가 폐결핵 3기라는 것이었다. 그해 겨울을 이용도는 이호빈과 이환신의 고향인 강동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 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부흥회가 끝날 때까지 이용도와 청중 모두가 성령의 강한 힘에 이끌려 감격 속에서 눈물로 부흥회를 마치게 되었다. 부흥회가 끝났을 때에는 이미 그의 몸 어느 구석에서도 병자의 형색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감동적인 신앙 체험 후 그의 신앙생활은 눈에 띄게 변하였으니 그의 온 생애를 완전히 헌신하고자 하는 결심은 물론, 신앙의 형태도 내면적이고 신비적인 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바치리라. 그저 완전히 바치리라. 주님께 완전히 바치기만 하면 내 모든 문제는 주님께서 맡아 주관하시고, 내 몸 전체도 주님께서 뜻대로 잘 맡아 사용하신다.”
(3) 말기- 목회 시작 이후와 죽음
이용도는 1928년 1월 26일에 협성신학교 제 14회 졸업생이 되었다. 이튿날 연회로부터 파송되어 강원도 통천으로 부임한 그는 신앙의 청년 박재봉과 친근하게 되어 서북쪽 금강산 기슭 백정봉에 올라가 10일간이나 금식기도를 하고 내려왔다.
이 일이 있은 후로 그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으며, 그의 기도는 시간이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산기슭이나 시냇가나 예배당 안을 상관하지 않았다.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그는 항상 엎드리기를 즐겼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힘차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여 1928년 말에는 그가 담당한 동천구역의 교회가 완전히 부흥하게 되었고, 이듬해부터는 인근의 교회에서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1930년에 이르러서 그의 활동은 눈에 띄게 늘어나 그의 발길은 덕적도 평양 등에까지 미쳤다. 기록에 의하면 그해 2월 26일부터 3월 9일까지의 평양 중앙교회 부흥회 때는 집회 때마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집하여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의 외형적인 모습은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가느다란 몸에, 뺨에는 살 한 점도 없이 노란 얼굴이 마치 마약중독자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간장을 녹이는 듯하여 특히 십자가의 사랑을 설명할 때는 천 명이 넘는 군중이 눈물과 흐느낌의 물결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는 가는 곳마다 일어났는데 그해 대부분의 시간을 각처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데 보냈다. 평양 중앙교회에서의 큰 역사는 평양 지방을 새롭게 부흥시켰고, 황해도 신천교회에서의 큰 역사는 황해도 지방에 성령의 불을 붙이기 시작한 획기적인 일이었다. 다음해인 1931년을 이용도 부흥운동의 절정기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부흥회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1931~1932년은 부흥운동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날로 높아 가는 명성과 놀라운 역사는 지방 교역자들을 크게 당황케 하였는데, 심지어 어느 수양회에서는 청중들이 다른 강사들의 강의를 모두 거부하고 이용도의 강의만 계속 받겠다고 고집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1930년 평양집회에서 크게 은혜 받은 무리들이 모여 만든 평양기도단의 출현은 기성교회의 반발을 더욱 부채질하였는데, 평양 기도단은 첫 사업으로 ‘신앙생활’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용도가 아현 성결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도중에 추방당한 것을 필두로 장로교 황해노회가 공식적으로 이용도에 대한 반대 결의안을 가결하였는데, 그 내용은 ① 이용도는 교회를 훼방한다. ② 여신도들과 서신거래를 자주 한다. ③ 불을 끄고 기도를 한다. ④ 교역자를 공격한다. ⑤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선전한다. 그러므로 무교회주의자요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니 황해노회 지경 안에서는 청하지 말 것 등이었다.
한국교회의 거센 반발과 핍박 속에서 이용도는 신학동기인 이호빈 목사에게 이러한 호소를 한다. “나의 가는 길 곡절이 많지요. 그러나 늘 기도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입니다. 최후 승리는 우리들의 것입니다........지금 나의 생명은 가련한 상태에 있습니다. 남의 포도원을 망치느라고 분주한 오 가련한 꼴! 부흥목사라는 직업간판을 붙인 자 화 있을진저. 오, 주여! 나를 숨겨 주소서"
이듬해 4월에 평양노회에서는 기도제한 법안이 통과되었는데, 이는 이용도를 초빙하는 것을 제한하고 평양기도단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같은 평양노회에서 이용도에 대한 노골적인 금족령과 인신공격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요점은 소란한 기도단체를 만들었다는 것과 교회질서를 파괴한다는 것, 그리고 거짓 예언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예수교회 창립과 우원 이호빈의 관계를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이호빈은 “이용도 목사의 신앙”이라는 설교에서 “이용도 목사가 예수를 가장 바로 알고 바로 믿었다.”라고 표현한다. “예수를 믿되 이용도 목사처럼 믿어야 하겠다.” 라는 표현은 이용도의 삶이 얼마나 진실하며 거룩한 삶이었나를 보여 주는 한 예가 될 듯하다.
이용도는 1933년 2월 해주 집회를 마지막으로 그의 공적인 부흥활동을 마쳤다. 그는 그해 10월 2일 오후, 모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찬송소리를 뒤로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길지 않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반면, 감리교회와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이라는 정죄를 받아 예수회공의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만든 화제의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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