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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영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

Joyfule 2014. 9. 22. 09:00
 
인생은 영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3.
신앙의 과정은 첫 번째 애굽에서의 은혜의 시기,
 둘째 광야에서의 훈련과 굴복이 이루어지는 시기, 
그리고 세 번째로 가나안에서 신부되신 주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친밀한 교제와 정복전쟁이 이루어지는 시기입니다. 
가나안에서는 천국에 가까운 은총을 누리며 신부와 용사, 
즉 친밀함과 승리의 열매를 누리게 됩니다.
가나안에서는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주님의 깊은 은혜가 부어집니다. 
광야의 죽음을 통과할수록, 육신의 욕망과 자아의 욕망, 
자존심이 무너질수록 주님에 대한 미칠 것 같은 갈망, 사모함이 일어나게 됩니다. 
순결한 삶에 대한, 사랑하는 삶에 대한 욕망이 한 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 많은 밤들을 기도로 보내게 됩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의무가 아니라 기도와 말씀, 
주님의 임재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이 없이는 도저히 살 수가 없으며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살고 자기 취향으로 사는 것에 아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며 
오직 모든 순간에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의 원하심을 이루고 싶은 갈망이 점점 더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들이 가나안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일들 중의 하나입니다.  
자기의 영이 어느 곳에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가치관, 의식, 성향, 지식, 소원.. 등의 모든 것들이 전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식들의 성향과 변화들은 타고난 기질이나 성향이 아니라 
훈련과 과정의 이수함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들입니다. 
은혜의 시기, 훈련의 시기, 성숙한 시기.. 
이 과정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생 동안 경험하게 되는 신앙의 여정입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은혜에 대해서 충분히 배우고 경험해야 하며 
보혈을 힘입어 애굽을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삶의 훈련을 통해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빨리 깨닫고 굴복하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빨리 광야의 훈련을 통과해서 다음 단계로 가야합니다. 
주님께서 애굽에서 백성을 부르신 것은 광야의 척박한 삶을 위하여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영광스러운 삶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가나안은 단지 기도의 달콤함과 신비함에 빠져서 취해 있는, 그러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도피하여 자기만의 세계 속에 빠져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해야 할 아름답고 놀라운 상태입니다. 
그것은 천국에 합당한 신자가 되는,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초청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나아가야 할 목표이며 천국의 실제를 맛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아직도 애굽에 있습니다. 
애굽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역이 아닙니다. 
그곳은 마귀가 지배하는 영역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에서 나와야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보호가 없습니다. 그곳은 들어가서는 안 될 영역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애굽의 문화에 빠져 있습니다. 
애굽의 백성들이 경배하는 우상의 문화에 같이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에게는 아직 훈련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정화의 단계와 가르침이 오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보혈로 씻김을 받고, 애굽을 나와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아무 훈련도 없습니다. 말씀도 거의 임하지 않습니다. 
어둠의 장소에 있을 때 주님은 그곳에서 말씀하시지 않고 
먼저 그들을 그곳에서 나오도록 인도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주의 음성을 듣고 예언을 합니다. 
은사도, 음성도, 예언도 이 세 가지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각자의 영이 성장한 수준에서 메시지를 받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영역에서는 은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격려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두 번째의 영역에서는 정화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세 번째 영역에서는 주님이 맡기신 사역에 대해서, 
그리고 그 친밀감의 정도에 따라서 메시지가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신자는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의 귀한 사람이다] 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이들은 
[나는 너의 삶에 **을 원하지 않는다. 너는 그것을 내려놓지 않겠니?] 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들은 좀 더 개별적인 메시지와 사역에 대한 메시지를 받습니다. 
이와 같이 음성을 들어도 처음부터 사역적인 것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음성도, 감동도, 메시지도.. 각자의 성숙 단계에 따라 받게 됩니다. 
나는 한국교회의 많은 신자들에게 은혜의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까.. 애를 씁니다. 
혈연적인 애정, 자아적인 애정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들은 아직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기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보혈을 의지하며 보혈로 인하여 죄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 메시지가 충분히 심령 깊은 곳에 가라앉아야 합니다. 
표면적인 이해는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잠깐 울고 흥분하는 것은 우리의 깊은 곳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메시지가 우리의 의식 내부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가야 합니다. 
이들은 충분히 은혜의 메시지를 듣고 그 다음에는 애굽을 나와야 합니다. 
자기의 삶 속에 주님이 싫어하시는 영역이 곧 애굽입니다. 
거기서 나와야 거룩을 향한 훈련이 시작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애굽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징계가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징계를 받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고 함부로 살아도 징계를 받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시편 73편에서 아삽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순간적으로 낙심하여 한탄합니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시73:3-4) 
나사로와 같이 언급된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다가 편안한 상태로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잘 먹고 잘 살면서 징계 없이 편안하게 죽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무서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