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본질에 집중하라.
필자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아버지께서 사업에 실패하신 후유증으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래서 학비를 벌어야 했다. 1학년 때는 중고등학생들을 상대로 과외알바를 해서 학비를 벌었는데, 전두환정권이 들어서면서 대학생 과외금지를 시행하면서 알바자리마저 없어졌다. 그래서 1학년 겨울부터 졸업할 때까지 우유배달을 해야 했다. 그 때는 종이팩이 드물었고 죄다 무거운 병우유였으며, 오토바이가 아니라 짐자전거로 매일 새벽 100Kg가 넘는 중량을 싣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우유배달을 해야 했다. 그래서 늘 시간에 쫒기고 피곤에 절어 살았다. 게다가 3,4학년 때는 R.O.T.C.를 지원해서 훈련을 받느라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은 대가는 혹독했다. 성적이 시원찮아서 대기업에 원서를 내기 어려웠다. 그나마 장교로 군에 가서 시간이 여유가 있었기에, 제대할 때까지 피터지게 공부한 기억이 새롭다. 이유가 무엇이든, 모름지기 학생은 공부해야 한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끼며 인생 등록금을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9:59.60)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솔직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사건의 전말을 이렇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급한 기별을 받았다. 그래서 이 제자는 예수님에게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오겠다며 허락을 해달라고 하였으나 거절당했다는 얘기이다. 만약 당신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떤 생각이 들것인가?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장례식에도 가지 말라고 하는 스승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승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느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을 법하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해놓고,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가지 말라고 한 스승에게서 진한 배신감과 표리부동의 역한 냄새가 나지 않은가?
그러나 그 스승이 예수님이라면 수렁에 빠진 곤혹스런 느낌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요구하셨을까? 필자도 한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문화나 인본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성경적인 관점을 가져야만 예수님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예수님의 결정은 인생의 본질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이 얘기는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슨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대한 정체성을 잊지 않아야 비로소 해답을 알아낼 수 있다. 아시다시피, 당신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으신 존재이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하는 게 인생의 목적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였기에, 지금도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필자의 칼럼을 읽고 있는 중일게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지식으로 알고 있더라도 삶에 적용하려면 날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기도와 말씀으로 동기부여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이유에 대해 망각하며 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에게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가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효도하고 공경하여야 하지만, 이미 돌아가셨다면 자식으로 해야 할 의무는 없다.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는 것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아버지의 영혼은 이미 이 땅을 떠나 천국이든 지옥이든 갔을 것이다.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관 앞에서 슬피 우는 행위는, 고인에 대한 자식들의 도리이거나 사회적인 관습, 혹은 조문객들을 위한 의례에 불과하다. 사회적인 문화나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상관없이, 자식이 장례를 치르는 것은 아버지의 영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비본질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장례식의 참석이 무의미하다고 여기시고 참석을 불허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삶을 살아가면서, 매일처럼 본질적인 일에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본질은 다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충실한 행위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으며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이다. 물론 생계를 위해 직장에도 다니며, 가정을 꾸렸기에 살림이며 육아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활에 필요한 행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당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집중되고 있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그래서 교회의 예배의식을 비롯해서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이라고? 아니, 필자는 교회에 와서 하는 신앙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인생의 목적에 부합되게 살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필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도 곤혹스러워했을 것이 분명하다. 필자가 떳떳하기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날마다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기에 묻는 말일 뿐이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피조물은 본질을 추구할 수가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성경에 비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추구한다. 즉 타락한 옛사람의 죄성이 요구하는 대로, 탐욕과 방탕을 추구하는 삶을 따라가고 있다.
우리가 눈만 뜨면 새벽처럼 돈을 벌기위해 직장에 나가야 하고,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도는 삶의 수레바퀴에 끼어 살다보니 자신의 정체성을 잊고 살아가기 일쑤이다. 주일에 성경책을 끼고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십일조를 내고 교회 봉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혹시라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죄의식과 두려움 때문에 의무적으로 혹은 마지못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일 뿐 아니라 평일에, 교회에서 뿐 아니라 직장이나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시다. 부족하고 연약한 육체를 입고 있기에, 하나님의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되게 살지는 못해도, 적어도 그런 사실을 잊지 않아야 중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하실 정도로, 자신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본질을 추구하며 살라고 하신다. 종교적인 예배행위와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무한 반복하고 있더라도, 당신이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출처 : 다음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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