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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9.28 수복(중앙청 태극기게양)

Joyfule 2006. 9. 29. 01:10
인천상륙작전


 1950. 9. 15 유엔군 제7합동기동부대에 의해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총 7만여명의 병력과 261척(미국 225, 영국 12, 캐나다 3, 호주 2, 뉴질랜드 2, 프랑스 1, 네덜란드 1, 한국 15)의 함정이 참가한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적의 후방 병참선을 차단, 수세에서 공세로 일시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국군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과 15척의 함정 해병대 3개대대 및 육군 제 17연대가 참가하였다



서울탈환작전

인천시가를 평정하고 경인가도를 거쳐 적의 서울 외곽 방어선인 104고지와 연희고지를 탈환한 해병대는 1950년 9월 25일 북아현동, 영천동, 마포방면으로부터 시가로 일제히 진출하여 26일 오후에는 제2대대가 시청에 태극기를 올리고 다시 전진하여 27일 오전 6시경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감격을 누렸다. 이어서 29일 중앙청 중앙홀에서 역사적인 환도식(還都式)을 거행하였다.

 

  '수도 서울 탈환작전 비화'
1950년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 해병대는 해안교두보를 확보하고 지역내 잔적을 소탕한 다음, 익일부터 공격기세를 늦추지 않고 동북방으로 진출해 김포비행장을 탈취하고 수도 서울로 진격해 나갔다. 그리하여 19일에는 주력이 영등포 서쪽의 고지들을 점령하고, 일부는 행주 나루터를 확보한 다음 야간 강습도하작전을 감행했다.


인천상륙작전 1주일째인 9월 21일 오후 맥아더는 안양 서쪽에서 작전 중인 미해병1사단을 방문, 사단장 스미스 소장의 노고를 치하한 다음, 가죽점퍼 속에서 은성훈장을 꺼내어 그의 가슴에 달아주면서 "빠른 시일 안에 서울에서 만나자"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기고는 일본 하네다 공항으로 날아갔다. 맥아더는 숙소인 주일 미대사관에서 오랜만에 부인과 1박하는 동안 부산으로 전화를 걸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가까운 장래에 각하를 서울로 모시도록 서둘러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여 기쁨을 안겨 주었다.

 

  9월 22일, 미8군은 총반격을 개시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기 시작했는데, 25일까지는 상륙군인 미10군단과 서울 남쪽 오산에서 합류할 계획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철상(slash)'과 망치(hammer)작전'으로서 한반도의 적을 인천 상륙작전으로 양단 격파함으로써 북진하는 유엔군이 이를 포위·섬멸한다는 것이다. 한편, 미해병대 제1연대는 영등포로부터 한강을 건너 서울 서남으로 진입하고, 미해병대 제15연대와 한국해병대 1대대는 일산,수색 쪽으로 접근하며 인천에 대기중인 미해병대 제7연대는 북한산 경유 미아리 쪽에서 남으로 압박함으로써 서울을 9월 25일까지 점령할 계획을 했다. 그러나 서측으로 접근한 미해병대는 당인리, 와우산, 인왕산을 연하는 험준한 고지일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공격이 돈좌됨으로써 23일까지도 서울 서대문을 돌파하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었다.


2일간의 악전고투끝에 공격기세를 회복한 한·미 해병대는 연희고지를 탈취하고 서대문으로 진격 중 9월 25일 아침 북한군의 역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으나, 당일 저녁에 겨우 서대문 형무소를 점령했을 때, 수용되어 있던 미군 포로 4백여명은 북한군이 도주하면서 대동 월북한 후였다.

  익일 9시를 기해 미해병대 제1사단장이 서울 중심가 진격명령을 내리자, 작전구역별로 시가전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배속된 한국해병대 제2대대는 새벽부터 벌써 행동을 개시하였다. 서울 탈환은 누구보다도 한국군이 선두에서 성취해야한다는 열망을 미해병대 지휘관이 묵인해 준 것이다. 미해병대 복장을 한 한국해병대 장병이 서울역으로 진격하는 동안 공산치하에서 3개월간 신음하던 시민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환호하였다. 서울역 청사 안에는 북한군 일부가 남아 완강히 저항 하였으나, 해병대원이 화염방사기로 전원을 소사시켰다. 이날 오후 동경에서 맥아더 원수는 '서울이 다시 유엔군 수중에 들어왔다'는 성급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서울시내는 아직도 시가전이 산발적으로 전개되고 있어 완전탈환은 못한 상태였다.


박정모 소위가 이끈 한국 해병대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는 서울시청을 점령하고 시청사 안에 걸려 있던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박살내었다. 그리고 시청 옥상에 휘날리던 인공기를 내려 불태우고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그러나 이때 인근의 각국 대사관 옥상에는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9월 26일이 저물어갈 무렵, 한·미 해병대가 확보한 서울시가지는 겨우 절반도 안되었으며,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호텔에 본부를 둔 한국 해병대 제2대대는 대대장 김종기 소령이 중대장과 소대장들을 불러놓고 다음날 작전계획을 설명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박성환 종군기자가 "중앙청은 미해병대 제5연대의 목표이나 우리 동포의 손으로 태극기를 올려야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분부가 있었으며, 상금 3천만원이 걸려있다"는 것을 귀뜸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박정모 예비역 대령은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상금이 아니라, 태극기를 꽂을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집념이었다."

  박소위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고 중앙청 돌진허가를 상신하였다. 대대장은 신현준 연대장의 승인을 얻은 다음에 박소위를 격려하였다. 박소위는 9월 27일 새벽 3시경, 호텔 보이를 시켜 구해놓은 대형 태극기를 몸에 감고 소대를 진두지휘, 중앙청으로 접근하였다. 세종로 일대에는 군데군데 북한군이 구축해 놓은 사낭진지로부터 간헐적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그는 수류탄 공격으로 수개의 진지를 격파하고 2시간 만에 연기가 자욱한 중앙청에 도착하였다. 우선 청내의 잔적을 소탕, 제압한 다음, 2개 분대를 중앙 돔입구에 배치하고, 1개 분대를 근접호위케 하여 2m길이의 깃봉을 든 최국방 견습수병과 양병수 2등병조를 대동하고 돔 계단으로 올라갔다.


철제 사다리는 폭격으로 절단되었고, 끊어진 와이어 로프 일부를 사용, 꼭대기로 기어오르다 떨어져 부상을 당할 뻔하였다. 부득이 호위 분대원들의 허리띠를 모두 회수하여 연결한 다음 천정에 매달고서 천신만고 끝에 돔창문까지 접근한 다음 태극기를 봉에 달아 창밖으로 비스듬히 내걸고 고정시켰다. 이 때가 9월 27일 새벽 6시 10분이었다.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지 꼭 89일 만에 다시 중앙청에 태극기가 새벽의 포연 속에 휘날리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양병수 이등병은 이 공로로 미동성무공훈장을 받았으며, 상금 3천만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태평양 전쟁시 최대의 격전지 유황도 상륙작전에서 4인의 해병이 성조기를 세우는 장면인 아링톤 국립묘지에 있는 전쟁기념비는 미해병대의 상징이다. 서울 탈환에 앞장 선 미해병대는 곳곳에 성조기를 꽂고 승리를 기념하였으나, 국권의 상징인 중앙청만은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올리도록 아량을 베품으로써 형제 해병대의 혈맹관계를 확인하였다. 9월 28일 한·미 해병대는 서울의 잔적을 거의 소탕하게 되었으며, 익일 거행될 이승만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참석하는 서울 수복기념식 준비를 하는 사이에, '수도 완전 탈환'이라는 제하의 대형활자 신문호외가 이날 오후에 전국에 배포되었다.


예년처럼 1996년 9월 28일에도 중앙청에는 태극기를 게양하는 기념행사를 해병대 주관으로 가진 바 있다. 일제의 총독부를 철거함에 따라 이것이 이곳 마지막 행사가 될 것이기에 격전지에 세워진 104고지 전적비 추념식과 함께 당시 도하작전을 상기하는 해병대 철인3종 경기가 양화동 한강 시민공원에서 펼쳐져 해이된 국민안보의식 고취에 일조하였다.

 


  우리는 인구 1천만이 넘는 거대도시 서울에 살면서 한국전쟁기간 중 주인이 4번씩이나 바뀌는 동안 초토화된 바 있으나 이제 세계유수의 빌딩숲을 이루게 된 것을 경탄하기도 하지만,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한다면 어떻게 생존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불과 26명에 불과한 북한군 특수요원이 잠수함으로 침투하자 이들을 소탕, 추적하느라고 무려 7개 사단이 동원, 투입되어 근 한달이나 작전을 했으나 오히려 아군과 민간인의 사상자 다수를 내면서 작전을 종결지었다. 오늘날의 우리 국민들은 수도탈환 당시의 해병대원들의 그 용맹성과 기지를 부러워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총체적인 국가안보 위기에 처하여 군의 전투력과 국민의 전의를 우려하면서 중국 고대병법에 나오는 다음 한마디를 꼭 되새겨야 할 것으로 믿는다.

 

'好戰必亡 忘戰必危'(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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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인천상륙작전/9.28수복 기록사진들


해병대, 중앙청에 감격의 태극기 게양
1950년 9월 27일 맨 처음 중앙청에 뛰어든 무적해병 제2대대 6중대 1소대의
박정모(朴正模)소위와 최국방(崔國防)수병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



인천상륙을 향해 장도에 오르는 해병대의 부산항 승선모습
1950년 9월 12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될 한국 해병대와
제17연대. 미 해병대가 부산항에 집결해 함선에 오르는 모습이 숙연해보인다.



인천 상륙작전 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9월 15일 기함 마운트 매킨리 함상에서 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모습,



포화에 쌓인 인천!



함포사격 과 폭격기에 의해 불타오르는 인천시가지!



인천상륙 직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있는 병사들
월미도 교두보를 확보한 미 해병대 용사들이 바주카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북한군의 반격에 대비하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투항하는 북한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은 패퇴를 거듭한다.
사진은 1950년 9월 26일 서울 충정로에서 투항하는 북한군.



해병대 인천상륙기념 표지석
1980년 인천 상륙작전 30주년을 기념하여 유엔 참전국 협회(회장 지갑중)는
인천지역 해변3개소에 유엔군 인천상륙지점 표지석을 세웠다.
사진은 3개 표지석중의 하나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서울역과 광화문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역과 광화문,
전쟁은 인명과 재산뿐만 아니라 많은 문화재들을 파괴했다.



광화문....



서울 도심의 시가전 모습
시가지에 남아있는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초토화된 서울 도심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미 해병대원들



치열한 시가전이 끝난 종로거리
서울 시가전이 끝난 후의 폐허가된 종로거리.
멀리 보이는것이 종각 앞, 옛날 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빌딩)이다.



덕수궁에 주둔한 미군들
덕수궁 중화전 앞에 주둔한 미군. 중화전의 지붕이 포격으로 무너지고
경내는 온통 잡초 투성이. 서울은 초토화 되었지만 그나마 덕수궁이 이만큼이라도
살아남은 것은 서울 탈환작전을 앞두고 주일대표부가 동경의 맥아더사령부를 방문,
문화재에 대한 폭격자제를 적극 요청했기 때문이다.



50년세월이 지난 오늘의 덕수궁 중화전 모습.
우리가 지켜야할 우리조국의 평화로운 모습.



해병대,중앙청 국기게양 재연/2000.9.28
서울 수복50주년을 맞아 해병대주관으로
경복궁(구 중앙청광장)에서 열린 기념행사에서 수복당시 태극기를 게양했던
박정모 소대장(예비역 해병대령.왼쪽)과 견습해병이었던 최국방(예비역하사)씨가
50년전 중앙청 국기게양을 재연하는 동안 빨간모자의
영원한 해병대원들이 국기에 대해 필승을 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