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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기다리는 성격, 못 기다리는 성격 .

Joyfule 2021. 2. 14. 23:54

 

 

  

  잘 기다리는 성격, 못 기다리는 성격 .

 

 

기다림이라는 말을 접하면 내게 떠오르는 것은 미국 네바다 주 그랜드 캐년이다.

지금은 해외여행이 용이하여 숱한 사람들이 수시로 그랜드 캐년을 단 코스로 다녀 오는 것을 본다.

그러나 30년 전만 해도 해외여행 자체가 쉽지 않아 대도시와 떨어져 오지에 있는 그랜드 캐년을 본다는 것은 꿈과 같은

일이었다. 사흘 밤낮을 자동차로 달려가 그 앞에 섰을 때 나는 말문이 막혔다. 오직 “오!” 하는 소리뿐이었다.

그만큼 캐년의 장대한 풍광은 20대 나의 혼을 흔들어 놓았다. 시간의 시작과 끝이 하나의 정점을 이루고 영원이라는

침묵의 표상이 되어 캐년 위에 멈춘 듯했다. 빙하기의 수만 년이라는 지질학적 설명과 숫자는 잊어 버렸다.

그러나 캐년의 그 장엄함 속에 고고히 흐르고 있는, 시공을 초월한 하나의 현상으로 존재의 의미를 꿰뚫는 듯한 침묵 앞에 나는 20대 나의 실존의 무릎을 꿇었다. 그 기억은 아직도 새롭고, 그 경험은 내 삶의 구비 구비에서 좌표가 되었다.

침묵하라. 기다려라. 그리고 세 번을 더 찾아갔다. 매번 캐년의 침묵이 토해내는 기다림, 기다림이 토해내는

침묵 앞에 내 실존의 옷깃을 여미고 말없이 돌아서 왔다.


잘 기다리는 성격, 못 기다리는 성격

살아가면서 기다림의 양상은 얼마나 다양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 또한 얼마나 다양한가?

 때로 성격심리를 가르치다보면 잘 기다리는 사람과 못 기다리는 사람의 심리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기다림의 심리적 기저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는 때가 있다. 먼저 기다림에 있어 잘 기다림과 못 기다림이 있기보다는, 많은 경우에 기다려야 할 때와 기다리지 않고 행동해야 할 때를 구별할 줄 아는 분별력이 중요함을 본다.

이러한 분별력은 성격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우선 외향 판단형들은 성미가 급해서 ‘선행동 후사고’를 하므로 기다린다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다. 그리고 내향 인식형들은 ‘선행동 후사고’이므로 표면적으로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행동할 때를 놓치는 수가 많아 기다리는 습관이 불편을 야기할 때가 많다.

그러나 성격과 더불어 성취지향적이고 자기주도적인 것을 요구하는 시대적 가치관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유해야 성공적인 삶이라는 구도 하에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개념을 잊어가고 있다.

내향 인식형들처럼 유유자적하며 기다림이 생활의 습관처럼 되어 있는 사람들도 상대적 실패감 때문에 엄청나게

성취지향적으로 움직여 가고 있다. 따라서 어느 성격이든 간에 기다림이 삶에 안겨주는 여유를 상실하고 있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앞차에게 경적을 울리고 앞사람의 매표작업이 진행 중인데도 자신의 신분증을 창구로 밀어 넣는 등

빨리 빨리 진행되어야만 안심하는 조바심에 몰리고 있다.

기다림이 주는 삶의 여백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치자꽃이 피면 초여름이 오고있고 과꽃이 피기 시작하면

여름이 물러가면서 가을이 올 채비를 하고 있음을 바라보는 여유를 자꾸 잊어간다.

등하교길에 도란거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미소 짓고 손을 흔들어주는 여유가 없다.

꽃도 과일도 우리는 제철을 기다려 주지 못하고 철없는 꽃과 과일을 만들어낸다. 이렇듯이

우리 아이들에 대해서도 기다려 주지 못하고 철없이 조숙하거나 철없이 미숙한 아이들을 만들고 있다.


심리적 욕구의 역동와 기다림

기다려야 할 때를 분별하는 법을 잊어 가는 현상은 개인이 지닌 심리적 욕구와 관계가 깊다.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충족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안정, 소속, 인정, 통제의 욕구다.

성장과정에서 기본적인 이 욕구들이 원만히 충족되는 환경에서 자란 개인들은 대체로 삶이 요구하는 기다림의 의미를

알고, 기다릴 때와 행동할 때를 분별하는 능력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일생을 원만하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데 밑바탕 힘이 된다.

여기서 원만이라는 말은 욕구의 충족과 결핍의 조화를 의미한다. 즉 충족과 결핍 양쪽을 적절히 체험하면서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욕구가 갈등 없이 너무 쉽게 항상 충족되어진 사람과 항상 결핍된 사람은 삶이 요구하는 기다림을

버텨내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들은 쉽게 방종하고, 쉽게 좌절하며, 쉽게 분노하고 저항한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 하고 불렀을 때 “응, 나 여기 있어” 하는 엄마의 그 한 마디가 지니고 있는 공간의 충만성은

자라고 있는 한 아이의 안정과 소속의 욕구를 채운다. 한 어린아이에게 엄마의 의미는 전 우주다.

엄마가 늘 함께한다는 안정감은 어린아이에게 전우주의 충만이고 따라서 자기 존재의 안정과 인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안정과 소속감은 어지간한 물질적 결핍을 상쇄하는 상대극의 힘을 키워준다.

그리고 세상을 실험해 나가는 통제의 용기를 준다.

 

적절한 결핍의 체험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버틸 수 있는 힘을 준다.

구슬 하나 혹은 마음에 드는 학용품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 협상도 하고, 뺏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뺏기기도 하며,

안되면 ‘어디 두고보자’ 하면서 씩씩거린다. 이러한 경험들 역시 생을 살아가면서 뜻대로 되지 않거나,

욕구 충족의 지연을 기다리고 다스릴 줄 아는 힘이 되어 준다.

물질적인 소유는 쉽게 이루어졌으나 보이지 않는 심리적 욕구들이 지나치게 충족 내지는 결핍될 때 가슴이 허한

아이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가슴이 허한 아이들은 정체불명의 정서, 즉 결핍감정에 늘 시달린다.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아이들 말이다. 이러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 안에

가슴이 허한 어린아이를 하나씩 품고 살아간다. 이러한 내적인 어린아이가 내면에 있을 때,

그 사람은 삶에서 요구하는 갖가지 기다림이 부담스럽고 그 의미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아니면 삶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느라 현재의 삶을 활기차게 살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과 관계되는 기다림은 물론이고 더구나 중요한 타인이나 자녀들과 관계되는 기다림을 잘하지 못한다. 본인이 하지 못하는 기다림의 탓을 남에게 돌리거나 남이 대신해 주길 기대하고, 정작 기대에 부합되면 좌절하거나

분노, 비난한다.

기다림의 심리 뒤에는 언제나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 기다림에는 내가 가진 성격적 경향이나 살아가는 사회의 가치관

그리고 나 자신의 깊은 심리적 욕구의 역동이 작용한다. 그러므로 잘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를 볼 줄 아는 것이고 이것은

기다릴 때와 행동할 때를 분별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심리적 단계를 넘어서

또 하나의 단계가 있다. 즉 심리적 영역의 결핍을 영적으로 변형해 나가는 기다림의 초월적인 힘을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마치 그랜드 캐년의 그 거대한 침묵 속에 투영되는 듯한 창조주의 큰 기다림 안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불완전한 기다림을 일치시키며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다.

<심혜숙 / 부산대 상담심리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