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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장. 위대한 신앙고백 1.- 2.

Joyfule 2007. 9. 4. 01:51

제 13 장. 위대한 신앙고백

1. 전환점

가이사랴 빌립보의 사건은 복음서에 있어 그 분수령을 이룬다. 여기에서부터 그 흐름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그를 왕좌에 앉히기라도 할 것 같았던 대중적인 인기는 사라지고 이제 조류는 시자가를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둘러싸고 있던 밝은 햇살을 사라져 어두워지고 대가는 찌는 듯이 더웠으며, 다가오는 폭풍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갈채를 보내던 목소리들이 약해져가고 더욱 불길한 어조가 들려왔다.예수께서는 가이사랴에서 말하자면 분기점에 서 계셨다.

그것은 마치 뒤로는 그가 지나왔던 모든 길이 돌아다 보이며, 앞으로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더웁고 험악한 길이 보이는 언덕 마루와 같았다. 예수님은 행복했던 때의 잔조가 아직 머물고 있는 곳을 향해 일별하신 후 돌아서서 어두운 그늘을 향해 걸어가셨다.

이제 그의 길은 갈보리 쪽으로 향해졌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헬몬산 기슭 근처 요단강의 근원이 시작되는 먼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멀고 한적한 지방에서 제자들하고만 계셨을 때 예수님은 드디어 제자들에게 그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던지셨다.[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16:13 이하,막 8:27 이하 눅 9:18이하).

2. 메시야 신분의 유보

제자들이나 그밖의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위와 인격에 대해 어떤 의견들을 가지고 있었든지 간에 예수님 자신의 마음속에는 그의 사역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는 여하한 의심의 그림자도 지나간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더욱 깊이 들어가서는 그 혼자만이 독특하게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이 지식은 그의 세가지 시험 사건 배후에 있었떤 지식이었다.

이 사실을 떠나서는 광야에서 있었던 사건을 전혀 설명할 수가 없어진다. 확실히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 지식이 그에게 있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메시야 신분과 하나님 아들이라는 의식이 최초로 예수님의 영혼에 떠올랐던 것은 그가 세례를 받으실 때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나사렛에서의 전 침묵기간을 통해 점차로 형성되었으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사건은 그 자신의 본성과 직문에 대한 갑작스런 깨달음이 아니라 위로부터 권능을 받은 것과 오랫동안 점차로 발견해 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인침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그럴듯하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기간중 그가 철저한 확신을 가지고 그 자신이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되신 사실을 알지 못했던 때는 한 순간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이사랴에서 이 일이 있기까지는 그 지식이 대부분 가리워 숨겨져 있었다. 어떤 의미의 유보와 은폐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그 사실을 지붕 위에 올라가서 외치지는 않으셨다.

그가 고쳐주신 병자들에게 그는 병 나은 사실을 널리 퍼뜨리는 것을 금하셨다(마8:49:30 막 5:43).예수님의 권능을 감지하고 그 신분을 추측한 후 이를 큰 소리로 외쳐 말했던 악령들에게 예수님은 잠잠할 것을 명하셨다(막1;24-25).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질문을 피하시고 그가 하시는 일들을 가리켜 보이셨다.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즉 요한에게는 충분히 사실을 드러내 보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지 않는 대답을 덧붙여 말씀하셨다(마11:2 이하).

예수니믄 같은 목적으로 수수께끼와 같은 [인자]라는 말을 일부러 택하여 즐겨 사용하셨다. 이 칭호는 영적인 심령에게는, 그리고 그들에게만 예수님의 메시야적 품격에 대한 암시를 주는 연상들(특히 다니엘 7:13)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연상들이 전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다. 다만 "들을 귀"를 가진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 사건이 있었던 그날이 사실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던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경계하사 지기가 그리스도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다(마16:20).혹자는 이것을 설명하여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위대함을 낮추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영광을 가리우셨도다 인간의 모습으로 땅위에 거하시나니 그의 위엄이 숨겨졌도다 라고 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유보하셨는가?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마음이 의심으로 번민하셨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가 방금 살펴 본 바대로 이러한 답변은 고려대상에서 제외된다. 아마도 두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첫째로 유대인들이 수백년동안 꿈꾸어오던 메시야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지금의 메시야와는 매우 달랐다. 메시야에 대한 대중적 기대에는 정치적 요소와 민족주의적 요소가 가득했다. 그 미세야는 오셔서 그의 나라를 티끌에서부터 일으키실 것이었다.

그는 힘으로 다윗의 위를 회복하실 것이었다. 그는 철장으로 이방을 부숴뜨릴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희망으로 타올랐으며,이제 필요한 것은 싯뻘건 잿불을 부채질하여 타오르게 할 [내가 메시야다'라고 하는 사람의 출현 뿐이었다. 실제로 과거에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났을 때는 이와 같았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만일 처음부터 그의 신분은 내세우는 길을 택했더면 틀림없이 다시 한번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백성들이 와서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그들의 민족적인 바램과 현세적인 욕망을 따라 왕으로 삼으려는 위험(요6:15)이 결코 멀리 있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공공연히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선포하시기 전에 먼저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영화시켜야만 했다. 예수님은 수세기동안 부착되어 온 정치적 첨가물들을 제거 하셔야만 했다. 특히 예수님은 메시야 사상 속에 수난이 포함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셔야만 했다. 메시야의 수난 사상은 예수님 시대 사람들의 생각에는 전혀 낯선 것이었다.

이것이 메시야 신분 유보의 첫번째 이유였다. 예수께서는 첫번째 목표가 사람들을 영적으로 각성시키는 것이어야 할 것을 알았다.이것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메시야 신분의 선포가 오해만을 낳게되며 전혀 예수님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열렬한 현세적 희망,따라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희망만을 자극할 뿐이라는 것을 아셨다.

 

예수께서 침묵하신 두번째 이유는 [그 이유는 그의 메시야 신분보다는 오히려 그가 하나님 아들이신 신분과 관계된]가장 위대한 진리들은 말과 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생활과 사랑으로만 계시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느날 예수께서 성전의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실 때 동족의 한 무리가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 여든 밝히 말하시오]라고 궁금증을 토로했다. 그러나 삶의 가장 중요한 일들이 그런 식으로 "말해줄 수"는 없었다.

여러분은 명예나 아름다움 또는 사랑이 무엇인지 "명백히 말할 수" 있겠는가?여러분은 저녁 놀을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위대한 교향복의 아름다움과 신비의 마력을 간결한 한 구절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인생의 참으로 위대한 감동적인 체험이나 발견들 중에 말로써 명백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가장 위대하고 감동적인 하나님의 영광이 그런 식으로 말해질 수 있기를 기대하겠는가? 인간의 마음속에 확신을 낳게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다. 그러나 바람소리가 들리는 곳에 바람이 불듯이 예수님과 함께 살며 그르 띵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본성과 아울러 그를 누구라고 불러야 할것인지 배워 알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