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장. 위대한 신앙고백
3. 가장 중대한 질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 일이 있었던 날,군중들을 멀리 뒤에 두고 열두 제자와만 함께 계셨을 때 예수께서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유보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느끼셨다. 매우 갑작스럽게 그는 제자들에게 가장 위대한 질문을 던지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삶의 얼마큼 깊이 실제적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서는 [토마스 칼라일]의 유명한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어느날,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온 집안이 침울하고 [칼라일]자신의 마음 역시 괴로웠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는 말씀을 읽어주었다(요14:1이하).그러자 [칼라일]이 갑자기 외쳤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당신 역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 범인보다 무얼 더 잘 알 수 있겠습니까?] 그때까지 [칼라일]은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신]성품에 관한 질문인 [가이사랴]에서의 질문을 애매하고 먼,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제 갑자기 삶의 무거운 압력에 눌리게 되자 그는 그 질문이야 말로 온 세상보다 더 중대한 것임을, 즉 그에게 있어서는 희망, 마음의 평화, 위안 등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성품과 권리에 관한 이 질문과 밀착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가장 중대한 질문이다.
복음서들은 왜 예수께서 이 특별한 시기를 택하셔서 질문하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닥아 올 일을 말해주어야 한 은밀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마지막까지 시험하고 연단하시려 했는데 그 일이 더 이상 지체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치욕적인 죽음이 그에게 신속히 닥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려 하셨다(마16:21,막8:1,눅9:22). 이 사실을 말해주면 제자들의 충성 역시 끝나게 되지나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제자들 역시 그에게 등을 돌려버리게 되고 그의 수고가 헛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예수께서는 당연히 가질만 했다. 모든 것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어느 정도까지 자랐는가에 달려 있었다. 만일 그들의 신앙이 약했다면, 아직까지 머뭇거리며, 희미하고 불확실한 것이었다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려 했던 내용이 주는 충격은 틀림없이 그들의 약한 믿음을 끝장 내버렸을 것이다.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도 그 순간은 제자들에게 못지 않게 갈림길이 되는 순간이었다.
예수께서는 먼저 일반적인 질문을 던지시는 것으로 시작하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어쨌든 대답하기에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도처에서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각 자기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여러 의견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벼라별 소문과 의견이 떠돌고 있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저 예수에 대한 소문 뿐 아니라 예수에 대해 굉장한 사실들을 추측해서 말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엘리야가 다시온 것이 아닌가고 생각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예레미야나 다른 어떤 선지자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바꾸어 말한다면 예수의 정확한 신분에 대해서는 그들의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어떤 위대한 분이라는 사실에 있어서는 모든 의견이 일치했다. 이들에 의해 예수님의 지위는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들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오늘날 다시 한번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 예수님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에 대한 의견은 매우 다양하다.[파피니(Papini)]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시인을 발견한다. [부르스 바톤(Bruce Barton)]은 행동의 사람(the Man of action)을 발견한다. [미들턴 머리(Middleton Murry)]는 신비주의자 (the Mystic)를 발견한다. 정견이 없는 사람들은 곧 잘 예수님을 성자들의 귀감으로, 또한 모든 도덕적 지도자들의 영원한 머리로 높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죤 스츄어트 밀]은 아직까지 추상적인 도덕률을 구체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권하시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더 좋은 예는 찹아보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야로 불렀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전시대를 통해 영웅들과 성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신 분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은 결국 예수께서 어떠한 계열에 속한 한 사람이란 것을 의미했다. 즉 이 말은 그보다 앞선 자와 그와 비교할 만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의미 했으며,비록 그가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고 해도 다만 그와 비교할 마난 수준의 무리 중에서 제일이란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신약의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신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대해 동의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신보다 앞선 자도 없으며, 비교하거나 필적할 만한 존재도 없는,독특한 존재로 말씀 하셨다(그 예로 마11:2710:3724:35,요10:3014:6).
[판테온]에 플라톤의 상과 나란히 예수의 상을 놓았던 로마 황제는 틀림없이 그리스도께 숭고한 찬사를 바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그리스도께 찬사를 바치고 있었다. 다만 그런 것은 복음이 아니었을 따름이다. [에른스트 르낭]이 예수께 대해 "그는 하나님의 참아들들의 찬란한 가문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얻었다"라고 말했을 때 틀림없이 나사렛 출신의 예수에게 존귀한 영광과 위엄을 부여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세례요한, 엘리야,또는 예레미야로 보는 것이 세상을 구원하실 구주에 대해 궁극적으로 옮은 견해일까?그리스도를 플라톤,소크라테스,석가모니 중의 한 사람으로 보는 이것이 옳은 견해였는가? [아사시의 프란시스][버나드][어거스틴]등 의한 사람으로 보는 이것이 옳은 견해였는가?사람들은 때로 이런 답변으로 만족해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결코 이런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여기[가이사랴]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은 뒤로 밀려나고 바로 단도직입적인[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인 질문을 어떻게 개인에 대한 도전으로 이끌어 가셨는가를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가 통상 쓰시던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우물가에서 여인과 대화하시던 때에도 쓰셨던 방법이다. 즉 처음에는 일반적인 대화하시던 때에도 쓰셨던 방법이다. 즉 처음에는 일반적인 화제로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그 여인의 정곡을 찌르셨다. 이러한 방식은 또한 본디오 빌라도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왕되심을 주장한 것에 대해 그리스도를 심문할 때 그와의 대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도전이 마치 화살처럼 갑자기 빌라도에게 날아왔다.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즉 이것은 빌라도 네가 스스로 판단하여 링하는 말인가. 아니면 단지 남의 말을 듣고 옮기는 소문이냐고 물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보만간에 모든 것을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키셨다. 예수께서는 남에게서 들은 의견이나 남을 대신해서 말하는 의견에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그가 원하신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체험에서 나오는 직접적인 대답이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젠 여기서 예수님의 이 질문이 오늘의 세계를 향해 세가지 측면에서 그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역사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시이저]나 [알렉산더]또는 [나폴레옹]보다 더욱 진정한 의미에서 마치 [콜로서스] 처럼 좁은 세계를 활보하는 이 예수, 그의 대의가 수십세기를 통해 수십변 사멸했으나 다만 매번 전보다 더한 영광으로 되살아 났던 이 예수는 누구인가? 성경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마11:27)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이 견습 목수,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온 세상을 향해 자기에게로 와서 쉬라고(28절)명할 수 있었던 이 방랑 설교자, 이 사람은 누구인가?셋째로 양심이 그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말이 지금도 하나님의 예리한 검처럼 우리 마음을 찌르며 그의 눈길이 우리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그의 순결하고 거룩한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깨끗하게 살려는 각오를 갖게 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세계는 이 질문을 피할 길이 없다. 또한 종교와 인생의 모든 것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운명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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