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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장. 최후의 몇날 - 왕이 그의 수도에 입성하심

Joyfule 2007. 9. 25. 04:15

제 17 장. 최후의 몇날

왕이 그의 수도에 입성하심

[헬몬]산에서 변모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전파사시고 가르치시며 남쪽으로 내려가셨다. 가시는 길 주변에 있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여러 동네에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다. 그리고 칠십인을 따로 세워 사명을 주어 보내신 것도 아마 이 기간 중이었을 것이다(눅10;1이하). 그러나 최종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다.

마가복음은 갈릴리 사역 기간에서 바로 예루살렘의 마지막 일주간으로 건너 뛰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연대순으로 살펴볼 때 누가복음의 한 부분 전체가(19:51-18:14)이 사이에 끼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갈보리에서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최소한 두번,즉 10월의 장막절(요7:210)과 12월의 수전절(요10;22)에 예루살렘에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각 지방에서 모여드는 순례자들로 예루살렘이 혼잡하게 되는 3월의 유월절 즉 유대인 최대 명절과 함께 예수께서는 그의 결정적인 시기가 다가온 것을 아셨다.

 

유월절 엿새 전 금요일 저녁에 그는 베다니에 도착하셨다.다음날 안식일을 조용히 쉬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그는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셨다. 많은 순례자의 무리가 성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전국에 으명해진 갈릴리 선지자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보려고 길 가에 나와 서 있었다. 그동안 숨기워졌던 모든 베일이 벗겨졌다.

종려주일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메시야로서 입성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 떠들석한 절기에 있었던 화려한 행렬의 의미였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러한 영광을 공공연히 받아들이셨다.대중적 인기는 한번 일어났다가 사라졌으나 이제 다시 한번 짧은 순간이나마 되살아났다. 잿물로 변했던 불길이 벼란간 다시 타올랐다.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호한 순례자들의 대부분은 말할 것도 없이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즉 그 주간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쳤던 도시의 잡배들과는 전혀 다른 북쪽 갈릴리 예수님의 동향인들이었다. 대중의 감정이 이미 그를 거슬러 흐르기 시작한 후에도,실로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그들의 친구로, 영웅으로 생각했던 수천의 사람들, 즉 그로 인해 육신의 병이 나았던 사람들, 얽혔던 가정이 원만하게 되었던 사람들,영적으로 모든 것이 새로와지게된 남녀의 무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들의 감사와 찬사를 그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를 환영하는 무리의 외침 속을 지나 왕은 그의 도성을 향해 나아가셨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분을 선포하셨다. 더 이상 사역 초기에서처럼 군중들이 갈채를 피하시지 않으셨다. 갈릴리 사역 시기에 제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숨기신 것과는 달리 더이상 자신의 왕적 위엄을 숨기지 않으셨다. 그의 마음속에는 어렸을 때부터 종종 깊이 생각해왔던 옛 위대한 선견자의 말씀이 맴돌고 있었다.[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도다] (슥9:9).드디어 옛 선지자의 꿈이 이루어졌다. 영원히 시온의 딸이 그 사랑하는 자,그 주를 기다려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영원히 다윗의 왕위가 비어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종려 주일의 그 행로등으로 예수님께서는 말로써 하는 것보다 더 명백하게 선포하셨다[네 왕을 보라!]

 

예루살렘 입성은 행동화된 비유였다. 그 일이 신실한 자에게는 그들이 기다리던 표적이 되었다. 또한 이 일은 예수님의 최종적인 사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뒤 따라 올 격렬한 행동과 감정에 알맞는 전주곡이었다. 이 일은 예루살렘의 모든 관심을 예수님께 집중시켰으며 그 결과 그 주간 동안의 모든 관심을 예수님께 집중시켰으며 그 결과 그 주간 동안 어디를 가든지 무리가 그를 따랐고 그의 이름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었다.

 이 일이 그를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도전장이 된 사실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일은 그들에게 대한 도전되었다. 그들은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었으나 거리를 지나 행진하던 이 행렬만은 참을 수 없었다. 이 광신적인 찬탈자를 아주 억눌러 버려야만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란한 절기에 도전을 하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그 날 받아들이셨던 왕적 영광의 표는 그 도전의 실마리를 제공했으며 군중이 외친 [호산나]가 그것을 단단히 못박았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세력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그는 자신의 권능을 알고 계셨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왕좌에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싸움에 대한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흥분으로 인하여 군중의 가슴속에 그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민족적 혹은 현세적 메시야 사상이 되살아 나지나 않을까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의 나라가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국에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조처를 취하셨다. 즉 그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 군마를 타시지 않고 나귀의 새끼를 타셨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라 그는 겸손하여 나귀,곧 멍에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21:5).

더우기 그 행렬이 예루살렘을 향해 서서히 움직일 때 예수님이 제2의 [막카비]라고 상상했던 자들을 놀라게 할 만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구부러진 길이 감람산의 모퉁이를 꺾어 도는 곳에서 예루살렘성이 벼란간 시야에 들어왔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멈추시고9눅19:41-이하) 말없이 앉아서 생각에 잠기셨다. 그는 그 앞에 펼쳐 있는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셨다. 놀랍게도 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예수님께서 우신 것이었다! 그들은 그가 우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사랑하는 성의 완악함과 우매함으로 인해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셨는가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불과 칼날이 예루살렘의 운명을 결정지을 임박한 날을 내다보고 계신 것으로 스스로를 내세울 것을 바랐던 그 지도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이상하게 여겼으며 마음이 동요되었다.

행렬이 다시 이루어져서 움직였을 때 아마도 그들의 호산나 소리는 전보다 덜 확신에 찬 것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이 그들이 바랐던 왕이었던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각은 그들의 새각과는 달랐다. 그날이 끝나고 그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몰래 빠져 나가 무력으로 왕위에 오를 메시야를 아직도 열망하고 있던 자들의 심한 실망과 분노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베다니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