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장. 최후의 몇날
다락방
이 주간의 수요일은 예수께서 [베다니]에서나 산중에서 혼자 보내신듯 하다.그러나 목요일 저녁 유월절 음식을 먹는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한 친구의 객실에 앉아계셨다. 이제 불과 한두시간만 지나면 폭풍이 무섭게 휘몰아 칠 것이었으나 여기 이 조용한 다락방에는 하나님의 참 평화가 가득했다.
이 방에서 기독교의 영원한 성례가 제정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거할 곳이 될 천국]에 대한 불멸의 말씀이 있었으며 보혜사 성령의 약속이 주어졌다. 또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전 최후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부터 그에게 주신 자들, 즉 궂은 때마 맑은 때나 수년간은 따라다니며 동행했던,그리고 오늘 밤 그를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소수의 충성스런 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시면서 다시 만날 것과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따른 잔을 그의 손에서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이 다락방이 기독교인들에게는 후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세워졌던 모든 그대한 교회건물들 보다 더욱 친밀하고 귀중한 곳이 되어왔다는 것은 약간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다락방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식탁에서 일어나신 후 제자들을 이 정적이 덮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후 지도자 없는 상심한 제자들이 폭도들로부터 숨을 곳과 피난처를 찾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이 다락방이었기 때문이다.
이 다락방은 잃어버린 그들의 선생에 대한 제자들의 절망적인 슬픔을 목격했던 장소였다. 또한 예수님께서 빗장을 지른 잠긴 문으로 들어오셔서 그가 부활하여 사신 것을 보이셨을 때 그 슬픔이 당혹한, 믿기지 않는 기쁨으로 바뀌게 되었던 곳이기도 했다(요20:19).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가신 후 아마도 이곳에서 그들은 다시 모였을 것이며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그들의 영혼을 오순절의 영광으로 넘치게 하시고 교회를 탄생하게 했을 것이다(행1:13.2:1).만일 전설이 말하는대로 이 다락방이 베드로가 감옥에서부터 피신하여 왔던 집과 같은 곳이라면(행12:12) .복음서에서 이와같이 신비스런 인물로 나타나는 [그 집 주인](막14:14)은 다른 사람이 아닌 마가복음의 저자 [요한 마가]의 어머니,즉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마가복음에서 예수와 함께 [겟세마네]에 있다가 예수께서 잡히시자 벗은 몸으로 도망했던 [어떤 청년]은 바로 [마가]자신이었을 것이다(막14;51).우리는 그가 그 아버지 어머니를 도와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그 다락방을 예비하며 그날 밤 최호의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무슨 일이 생기나 보기 위해 감람산으로 그들을 뒤쫓아 갔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어쨌든 많은 추억을 지닌 이 다락방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끌고 사로잡게 될 것이다. 성찬 떡이 나누어질 때마다 성찬 포도주가 부어질 때마다 성찬 떡이 나누어질 때마다, 성찬 포도주가 부어질 때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눅22:19). 이것은 주님의 마지막 소원이었으며 기독교인들은 항상 이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일은 단순하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의미를 지난다. 수세기에 걸쳐 성례를 행하는 가운데 믿음이 자라왔으며, 희망이 불붙고 사랑이 유지되어 왔다. 우리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려고 할때 우리는 세가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첫
째로 말의 언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 언어가 얼마 못되어어서 무용(無用)해진다는 것은 안다.또한 가장 깊은 것들을 전달해 줄 말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안다. 말의 언어 너머에는 예술의 언어 즉,음악,회화,조각 등이 있다. 물론 종교는 이러한 것을 필요로 하나 여기에는 역시 한계가 있어 예술의 언어가 무용해져 버린다.
이 이상에는 행동의 언어가 있다. 그리고 이것만이 삶의 궁극적인 것들을 전달할 수 있다.이러한 행동의 언어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떡을 떼면서 눈앞에 갈보리의 수난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떡을 떼면서 눈앞에 갈보리의 수난을 그리며 포도주를 분배하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피를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다락방에서 다락방에서 제정하신 성찬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교회는 [주의 만찬]시행에서 단순히 [기념]만을 찾지 아니하고 언제나 [임재]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찬에 있어서 우리가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믿음에 그 자신을 실감케 하시며 정결케 하는 교제로 우리를 축복하신다.[오,내 주여, 여기에서 내가 당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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