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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게 사랑하라 - 엄상익 변호사

Joyfule 2022. 12. 29. 01:18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좁게 사랑하라


낡은 연립주택들이 가득 들어찬 가난한 변두리 동네였다. 나는 희미한 형광등이 비치는 계단을 따라 사층으로 갔다. 페인트 칠이 바랜 철문 앞에 박스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 집 아이의 엄마가 택배 일을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온갖 잡동사니로 꽉 차 있었다. 그 사이에 아흔살쯤 되는 할머니와 일곱 살짜리 손녀가 있었다. 눈빛이 흐릿한 할머니와 얼굴이 백짓장 같이 하얀 아이였다. 안경을 쓰고 있는 아이는 보청기의 도움까지 받고 있었다. 그 아이는 어쩌면 그런 가난을 대물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엊그제 참석했던 모임에서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

“아버지가 장관을 했던 백수가 있어. 평생 놀고만 살았어. 룸쌀롱에 가서 술 먹고 노래하고 승마를 하고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그렇게 살았지. 얼마 전 아버지가 청담동에 땅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땅이 평당 오억원이 넘게 올랐다는 거야. 이백평만 해도 천억이 넘는 돈이잖아? 대대손손 놀면서 살아도 그 집은 부자야. 그 집에서는 그 아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백수로 살아온 게 고맙다고 하더라구. 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돈을 털어먹는 것 보다는 그냥 노는 게 고맙다는 거지.”​

그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한 재벌이 삼성동의 땅을 대량 사들였었잖아? 그 일대를 개발한다고 하면서 말이야. 지금 그 땅의 평당가격이 십억이 넘는다고 그래. 그 재벌이 청담동과 삼성동을 잇는 반달지역을 금싸라기 땅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거야. 그쪽에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로또복권에 당첨된 셈이지.”​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기생충’에서 본 연립주택 반 지하방에 사는 가난한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화 속의 가난한 가족은 부자 집에 달라붙어 그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찾아간 그 집 꼬마의 엄마나 아빠는 그런 사람들이 전혀 아닌 내가 자식같이 사랑하고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 엄마는 이십년동안 대형백화점 전자제품 코너에서 일했다. 같이 입사한 여직원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그녀는 살아남은 이유를 내게 이렇게 말했다. ​

“제품을 사고 난 후 엉뚱하게 트집을 잡는 손님들이 많아요. 한 여성 고객이 사간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았어요. 고객님 죄송합니다 하고 그냥 비는 게 우리 감정노동자예요. 그 고객이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너 이년 기다리고 있어 내가 갈께’ 하더라구요. 얼마 후 그 고객이 씩씩거리며 매장으로 달려왔어요. 저는 피하지 않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요. 그랬더니 제 머리를 잡아 뜯더라구요. 그렇게 참아야 백화점에서 버티고 일할 수 있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이 찡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도 없이 가난 속에서 자란 아이였다. 그런 수모도 참고 일해야 늙은 엄마를 부양하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결혼식에 갔었다. 남편은 포크레인 기사였다. 일거리만 있다면 어디든지 가서 감사하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남편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듣기도 했다. ​

“포크레인을 몰고 깊은 산속의 깊은 구덩이 속에 혼자 있으면 외로울 때가 있어요. 다시는 거기서 빠져 올라가 세상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이 두렵기도 하고요. 또 어떤 때 산을 파헤치다 보면 죽은 사람의 뼈들이 무더기로 나올 때도 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이십년이 넘게 포크레인 기사를 했는데 살기가 만만치 않네요. 그래도 우리 부부는 딸아이는 잘 키우고 싶은데말이죠.”​

그 부부는 허영이 있거나 게으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그 부부가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했다. 빚을 져서라도 땅을 살 줄 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전문직으로 몇 십년을 일한 나도 땀 흘려 번 돈은 아파트 한채값 정도될까 말까이다. 얘기가 엉뚱한 데로 빗나갔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어떤 사람을 도와야 할까의 문제다. 교회를 가면 아프리카 난민을 구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라오스에 우물을 파 주어야 한다고 헌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겨울 나는 정부가 막 뿌리는 지원금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 돈은 내가 아니라 살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내가 찾아간 가난한 그 집 사람들이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유한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처럼 모든 사람에게 한결 같이 후하며 한결같이 충실할 수 없다. 나와 인연이 된 소수의 이웃 사람을 먼저 도와야 하는 건 아닐까. 좁게 사랑하라 그리고 넓게 사랑하라. 그게 말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