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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 2.

Joyfule 2006. 9. 24. 00:43
제 2 장 독일의 종교개혁


독일의 종교개혁은 먼저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각종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외침이 독일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복음에 의한 해방과 더불어서 로마교회로 부터의 경제적,정치적,자유를 얻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1.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정치적 상황

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상황은 다른 나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위치한 나라로서 십자군 전쟁이후로 도시의 발달과 봉건제도에 도전하는 단계에 있었다. 프랑스는 십자군 전쟁의 군대파견으로 전쟁이후의 세력권에서 크게 부상하였다. 스페인은 1492년 이래로 통일 스페인 시대를 맞이해서 해상무역권을 독차지하고 있었다.영국은 스페인의 위성국가 였으며,스코틀랜드는 프랑스의 위성국가로서 힘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교회의 가장 강력한 힘이 미칠수 있었던 곳은 독일뿐이었다.그리고 독일인들의 보수적인 기질마저 겹쳐져서 로마교회의 시녀 노릇을 하였다. 면죄부를 구매하고 각종 세금성 헌금을 바치는등 독일은 로마교회의 재정적 수입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통치아래 대봉건영주들의 총회를 두고서 제국을 통치 하였다. 공동의 주전법으로 화폐를 통일 시키고 관세법을 통일 시킴으로서 하나의 의회 아래에서 통일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운영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8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던 막시밀리안이 1519년 1월에 죽고 부르군디의 필립의 아들이며,스페인의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의 손자인 챨스5세가 1519년 6월 선재후들의 손에 의해서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다.찰스5세는 독일계 스페인 사람이었다.


2.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로마교회의 착취

로마교회는 문예부흥과 더불어서 각종 예술의 부흥이 유럽전역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교회도 예술적인 감각을 도입하였다.교황들은 취임과 더불어서 자신의 임기동안에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고 예술적으로 치장하는것을 보람과 업적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 자금원은 광활한 토지를 중심으로 각 개인의 경건한 신앙심을 가진 독일인들 이었다.

이들은 각종 세금성제도에 합당한 이유만 첨가된다면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였다. 루터가 그의 논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통하여 독일내에서 개혁되어야 할 폐단 27종류를 열거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로마교회의 수탈과 관련되어 있었다.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제일 폐회가 컸던 첫수입세,팔리움,보류권,사라젠세 등은 각종 제도와 면죄부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밖에도 조달비,공석금,기부금,특별면죄권,등이 있었다.그런가 하면 로마교회는 십일조를 강요하였는데 각 교회는 수입의1/10을 교황청에 바쳐야 했다. 그리고 죽은 날을 위한 미사와 개인을 위한 특별미사, 매일같이 지속되는 성자의 날 기념미사와 특별헌금-----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흡입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도화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