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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영의 경고 징조

Joyfule 2006. 8. 22. 00:47

  
종교의 영의 경고 징조  
다음 항목들은 종교의 영에 속박되어 있음을 경고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거의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이 영과 싸우고 있다. 
전투의 성격은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아래에 나열 되어 있는 문제들을 조금씩 모두 다루고 있지만, 
한 두가지 문제와 치열하게 전투 중인 사람보다는 종교의 영의 멍에로부터 더 자유하다. 
우리의 목표는 종교의 영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함을 얻고 
완전하게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않고서는 이 영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종교의 영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은: 
1. 한번 잘못이라고 믿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 그의 주요 임무다. 
그러한 사람들의 사역은 주님의 왕국을 위해 열매를 맺을 때까지 
일을 지속 시킬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분열과 파괴를 가져온다. 
2. 자신보다 덜 영적이라고 판단되는 자들로부터 오는 책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과거 어떤 사람이 당신을 책망할 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떠올려 보아라. 
3.‘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듣겠다는 철학으로 산다. 
주님은 자주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분명 착각이며, 종교적 교만이다. 
4. 다른 사람이나 교회등의 잘할 일 보다는 잘못된 일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사도 요한은 골짜기에서는 바벨론을 보았지만 성령에 이끌려 
높은 산으로 올라 갔을 때, 새 예루살렘을 볼 수 있었다 
(계21:20을 보라). 항상 바벨론만 보인다면, 우리의 시각이 문제다. 
참 비전에 서 있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5. 주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심한 죄책감에 빠져있다. 
죄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의 관계를 십자가 보다는 
우리의 행위에 두도록 몰아가기 때문에, 이것 또한 종교의 영의 뿌리가 된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한계를 아시고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려고 하신 일을 완성하셨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그 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6. 자신의 영적 생활에 점수를 낸다. 성경 모임에 더 많이 참석 했거나, 
성경을 더 읽었다거나, 주님의 일을 더 많이 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남 보다 더 낫게 생각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고상한 시도이다. 
하지만 영적 성숙의 참 척도는 주님께 얼마나 더 가까이 갔는가로 판명된다. 
7. 자신들은 다른 사람을 고쳐야 하는 임무를 받았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의 왕국에 자기 스스로 임명된 감시원과 경찰이다. 
그들은 남을 세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에 심각한 분열을 초래하지 않았을 때라도 상당한 피해와 동요를 가져온다. 
8. 그들의 지도 스타일은 거들먹거리고 거만하며 
다른 사람의 실수나 약점을 참지 못한다.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서 3:17-18 
9. 다른 사람보다 주님께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에 따라 
더 주님게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이다. 
10. 특히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자신의 영적 성숙이나 영적 훈련에 자부심을 갖는다. 
참 영적 성숙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기 시작 할 때, 
분명히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목표를 잃는다. 
11. 주님이 하시는 일에 가장 선두에 있다고 생각한다. 
주님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착각도 포함한다. 
12. 기계적인 기도생활을 한다. 
기도가 끝났을 때나 기도 목록에 따라 기도를 마쳤을 때, 
안도감이 든다면 우리의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그분과 대화를 마칠 때는 결코 안도하지 않는다. 
13.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위해 일을 한다. 
주님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증상이다. 
그 결과 주님 대신 사람을 섬기는 종교가 된다. 
14. 감정을 보이는 일을 거부한다. 
종교의 영에 잡힌 자들이 참 생명이신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하게 되면, 
그들에게는 그것이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육신의 것으로 보인다. 
주님을 향한 열정은 흔히 감정적으로 표현된다. 
다윗왕도 주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 올 때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삼하6:14-16). 
15. 감정을 성령의 역사를 대체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앞의 지적과는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교의 영은 흔히 자기 보존과 자기를 높이며 이런 모순된 입장을 보인다. 
회개의 증거로 흐느껴 울거나 울부짖음이 있어야 하고, 
주님이 만져 주신 증거로 ‘권능에 의해 넘어 지는’ 
현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두가지 현상은 성령이 하시는 참 사역의 증거가 될 수 있지만. 
이러한 현상을 요구할 때는 곧, 다른 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16. 그들의 사역이 다른 사람의 것 보다도 좋아 보일 때는 의기양양하다. 
다른 사람이 더 빠르게 성장하거나 더 좋아 보일 때 낙심하는 것도 포함된다. 
17. 현재 주님이 하시는 일 보다 과거 일에 더 영광을 드린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다. 
성망의 휘장이 갈려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누구보다도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종교의 영은 단순히 주님께 가까이 가는 일 보다 
사역이나 비교하는 일에 관심을 쏟게 한다. 
18. 새로운 움직임이나 교회 등에 반대하고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의 영의 주 열매인 질투와 교만의 확실한 증상이다. 
이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를 통해 새 일을 행하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주님은 물론 그러한 정신자세를 가진 사람을 새로운 일을 잉태하는데, 
거의 쓰지 않으신다. 
19.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영적 현상들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생각이 주님과 같다는 교만에서 나온 증상이다. 
참 겸손은 우리에게 배움을 받아들이게 하고 
열린 마음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열매를 기다리게 한다. 
참 분별은 최악이 아니라 최상을 보고, 또 바라게 한다. 
그런 이유로, 다음과 같은 권면을 받은 것이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 데살로니가전서 5:21 
20. 교회에서 보이는 세속적인 것에 지나치게 과민 반응한다. 
가장 비판적인 사람이 추측하는 것보다, 
사실상 교회에 성령의 것 보다는 세속적인 것들이 더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육적인 것에서 벗어나 성령에 순종하기 위해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비판적인 사람은 작년 95% 세상적이였지만, 지금은 60%가 된 사람까지 없애 버린다. 
그 대신, 사람들이 앞으로 계속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끝까지 갈수 있도록 돕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21. 교회에서 보이는 미성숙함에 과민 반응한다. 
주님께서도 용납하시는 미성숙함이 있다. 
내가 2살 때와 9살 때를 비교해 보면, 2살 때가 더 미성숙했지만, 그건 당연하다. 
사실상, 2살에 맞게 성숙한 것이다. 
이상주의적 종교의 영은 단지 미성숙함을 보고, 
다른 중요한 요소들은 고려하지 않는다. 
22. 초자연적인 현상을 주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삼는다. 
이것도 또한 남과 비교해서 점수를 매기는 일이다. 
물 위를 걸으신 것과 같은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역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사역과 명성을 세우고 조장하기 위해 
기적을 이용하는 자들은 이미 생명의 길에서 심각하게 벗어난 것이다. 
23. 완벽하거나 거의 완벽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완벽하지 않은 죄인들과 함께 하셨고, 
타락한 인간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24. 종교의 영에 지나친 편집증이 있다. 
두려움 속에 있어서는 자유함을 얻을 수 없다.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 
25.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분이 이루신 일, 
그 분이 누구인지에 관심이 없고, 다른 것에 영광을 올린다. 
만약 다른 것들 위에 우리의 사역과 교회를 세운다면, 
그 토대는 단단한 반석이 아니라 오래 견딜 수 없고 흔들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