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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영' 기만적인 계시

Joyfule 2006. 8. 21. 00:57

 
기만적인 계시 
골로새서2:18-19를 보면, 종교의 영에 잡힌 자는 일부러 겸손한 척 하고 
천사를 숭배하며 자기가 본 것을 헛되이 과장한다. 
종교의 영은 예수님 이외에 다른 것이나 사람을 숭배하게 한다. 
천사를 숭배했던 바로 그 영이 지나치게 사람을 높이게 만든다. 
우리는 지나치게 주님의 사람들이나 천사들을 높이는 자들과 
교회에 부적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자신이 본 비전을 이용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은 사람들이 더욱 우리를 존경하게 만들거나 사역을 증명하기 위해 
계시를 주지는 않으신다. 참 계시의 열매는 겸손이지 교만이 아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언적 쳏섬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사도행전 2:17에서는 마지막 때에 그런 일들이 많아 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또한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마24:11을 보라). 
주님께 온 참 예언적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에 중요하다. 
사단은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많은 거짓 선지자들을 세운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분별된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경고 하셨듯이, 
예언적 계시를 받은 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부풀어 오른 자들에게 위험이 있다. 
종교의 영은 교만과 두려움을 충족 시키지만, 참 영적 성숙은 더욱 겸손으로 이끈다. 
그러한 겸손의 발단 과정이 사도 바울의 삶 속에서 놀랍게 나타난다. 
A.D 56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 되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을 만나보고는, 
‘그들이 내게 더해 준 것’이 없다고 단언했다(갈2:6). 
그들만큼 자신도 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약 6년 후에,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데, 사도 바울은 스스로를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불렀다(고15:9). 
A.D. 61년 경에 슨 에베소서 3:18에서는,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부른다. 
A.D. 65년에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 라고 선언한다
(딤1:15을 보라).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위대한 사도도 사역을 시작한 
처음 몇 년간은 교만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했다. 
우리 중에 누가 그것으로부터 자유하다고 말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희망적인 것은 우리 모두는 은혜 안에서, 겸손을 향해 성장하고 있다. 
젊은 사도들이 상당한 교만을 보인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참 사도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계시나 임무나 업적으로 인해 부풀어 있는가? 
아니면, 은혜와 겸손 안에서 성장하고 있는가? 
순교자 신드롬 
종교의 영과 결합할 때, 순교자 신드롬은 
가장 치명적이고 궁극적인 속임수가 된다. 
믿음을 위해,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참 순교자가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명예다. 
그러나 그것이 왜곡 되었을 때, 가장 비극적인 형태의 기만이 된다. 
종교의 영이 순교자 신드롬과 결탁했을 때, 이 영에 붙잡힌 자는 자신이 
‘복음을 위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속임수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의 거절과 질책도‘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지불하는 대가로 생각한다. 
그러한 왜곡된 인식은 그를 더욱 더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고 
책망을 받을 수 없게 만든다. 순교자 신드롬은 또한 자살의 영으로 나타난다. 
때때로 주님을 위해 사는 것 보다 ‘그 분을 위해 죽는 것’이 훨씬 쉽다. 
그런 사람들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영광을 올리는 일이라고 
십자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의 핵심은 부활이지 무덤이 아니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 돕는 심리학 self-helf psychology 
'자기 스스로 돕는 심리학‘은 교회 안에서 
십자가를 능력을 대체하려는 움직임이다.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심리학은 바울 사도가 말한 
’다른 복음‘이다 (고후11:4를 보라). 이것은 십자가의 적이며, 
또 다른 형태의 종교의 영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로새서 2:6-8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의 ‘내적 치유’는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흔히 말하는 내적 치유는 ‘옛사람’ 을 파헤침으로 
치유하는 것 이상은 아니다. 
그러한 깊은 상처에 대한 해결책은 어떤 철자나 공식이 아니라 단순한 용서다. 
우리가 십자가로 나가 주님의 용서를 발견하고 주님의 보혈을 근거로
 받아 들여 질 때, 우리는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고 
모든 쓴 뿌리와 분노를 씻어 낼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을 발견 할 수 있다.
너무나 간단하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할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11:3 
구원은 단순하다.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단의 주요 전략 중의 하나는 복음의 능력을 희석 시키기 위하여, 
하와를 속인것처럼, 거기에 첨가하게 만든다. 
그 이유는 조금이라도 멋져 보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으면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성경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다. 주기 때문이다. 
사단이 물었을 때, 하와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대답했다(창3:3을 보라). 
그러나 주님은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말씀에 더하는 일은 거기서 벗어나는 일 만큼 파괴적이다. 
자신 있게 주님의 말씀을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시험이 왔을 때, 
그것을 지킬 만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만약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성경 말씀을 더하거나 감하게 만들면, 
하와처럼, 곧 타락 할 것을 안다. 
지혜로워 보이는 많은 크리스천 철학과 치료사들이 있지만, 
사실상 대부분은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대체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상담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십자가로 인도하는 
뛰어난 크리스천 상담가도 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상담 받은 자들을 삼키고, 
주변 사람들까지 빨아 드리는 자기중심주의라는 블랙홀 속으로 이끈다. 
크리스천 용어에 있지만, 그러한 철학은 십자가의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