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영이 가진 다른 가면
흔히 말하는‘이세벨의 영’도 종교의 영의 한 형태이다.
이세벨은 야심이 많았고, 남편인 아합 왕을 손에 놓고 조정한 여인이였다.
그녀의 남편은 미약한 지도자로 자신의 왕국의 정책을 결정하는데
그녀가 마음대로 하도록 허용했다.
이와 같이 이세벨의 영은 약한 지도력을 대체하려는 곳에서 나타난다.
이 영은 대개 정치적 동맹을 만들어 자신의 세력을 넓힌 다음,
조정하기위해 흔히 기만적인 겸손과 순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권위를 얻게 되면, 강력한 통제의 영과 수치심을 모르는 뻔뻔스러움으로
본색을 드러낸다. 이름과는 달리, 이 영은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세벨은 “자칭(여자)선지자”다(계2:20).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종교의 영에서 조정을 받고 있는 거짓 선지자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성을 얻기 위해 몰두 한다. 우리 안에 자기 스스로 찾고,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만큼 우리의 사역은 부패한다.
중요한 직함이나 지위를 받지 않으면, 쉽게 기분이 상하는 자들에게는,
그 지위나 직함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인정을 받고자 하는 동기에서 움직인 자들과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움직인 자들이 다른 것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차이다.
요한 복음7:17~18에서 나와있는 대로, 그들은 인정을 받기 위해
스스로 말하는 자들이고, 보내신 이의 인정을 구하는 자가 참되다고 하셨다.
스스로 영광을 구했던 이사벨은 참 예언 사역의 대적이였다.
그녀는 구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엘리야의 가장 큰 적수였다.
엘리야 선지자는 특별히 주님의 길을 예배하는 사역을 했다.
이세벨의 영은 가장 강력한 형태의 종교의 영으로
교회와 세상이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지 못 하도록 막는다.
이세벨의 영은 특히 예언 사역을 공격하는데, 이 사역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세례 요한은 이세벨의 화신인 헤롯 왕의 부인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
예언 사역은 중요한 매개체이다.
이것을 통해 주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때를 맞추어 전략 방향을 제시하시기 때문이다.
이세벨은 참 선지자들을 제거해 버리면 사람들이 그녀의 거짓 선지자들에게
쉽게 노출되어, 곧 우상 숭배나 영적인 간음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주님의 참 음성을 들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사단의 속임수에 훨씬 더 걸려들기 쉽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소경된 인도자”라고 부르셨다
(마 23:16을 보라). 그들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메시아에 대한
여러 예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예언들을 완벽하게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 분의 얼굴을 직접보고도, 바알세불로부터 왔다고 하였다.
이세벨이 보낸 바알읠 선지자들은 자신의 신을 기다리며 제물을 드렸고,
심지어는 칼과 창으로 자신들의 몸을 찔러 피가 흐를 때까지 몸을 상하게 했다,
종교의 영의 주요 전략은 교회로 하여금 제물에 더 헌신하게 만들어,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주님의 희생보다는 우리의 희생에 믿음을 두게 만든다.
또한 예물과 제물을 사용해서 주님께 압력을 가해,
나타나 보이시도록 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우리의 선행으로 주님의 은혜와 임재를 살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가장 끔직한 속임수의 한 형태다.
자기 의(Self-righteousness)의 뿌리
의를 얻고 정화(purification)을 위해 혹은 영적 성숙이나,
주님을 만나려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갈2:20).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못박는 것은 자기 의가 된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교만이다. 그러한 교만은 보기에는
지혜와 의처럼 나타나기 때문에 기만적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 하셨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는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골로새서 2:18-23
종교의 영은 스스로 찾고 자기 중심적이 되어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영적 상태를 만족하게 만든다.
교만은 기분을 좋게 한다. 심지어는 사기를 높혀 주기 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관심을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과 남과 비교할 때,
어디쯤 와 있는지로 돌리게 한다.
결과적으로 담대함의 원천을 주님과 그 분의 희생이 아니라
경건 훈련과 개인적인 희생에 두게 만든다.
물론 자기 희생에 대한 훈련과 결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지만,
그 배후에서 있는 동기가 종교의 영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인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종교의 영은 두려움과 죄의식 혹은 교만과 야망을 통해 동기를 부여 받는다.
반면에 성령님은 예수님 대한 사랑 때문에 움직이신다.
일부러 겸손한 척하며 즐기는 것이 종교의 영으로 인한 증상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처럼 자신을 훈련시키고, 금식하고,
자심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기뻐하는 것 보다
그것을 왜곡하면서 기쁨을 찾는데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