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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우리의 의라 - 조지 휫필드

Joyfule 2019. 4. 25. 07:44


 

      주는 우리의 의라 - 조지 휫필드

 


Ⅲ. 이 교리에 반대하는 몇 가지 중요한 반론


첫째, 그들은 그들 자신이 도덕적 동반자임을 내세우기 위하여, ‘의가 전가된다는 교리는 선행을 파기하고 방종으로 이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제발 일반적으로 이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믿음이 넉넉한 사람들입니까? 진정으로 선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소수의 예외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대개 썩어빠진 정신에다 믿음을 저버린 자들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명칭은 불경스러운 도덕론자profane moralists가 아니면 이른바 거짓 도덕론자들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곳에 나온 여러분과 아울러 지난 세대에 체험한 믿음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인격의 의에 대한 교리가 가장 많이 비난을 당하고 가장 드물게 언급된 곳에, 악행이 적지 않게 휩쓸었고 지금 휩쓸고 있지 않습니까! 적그리스도인 아르미안의 가르침은 항상 적그리스도들의 행실을 이끌어 왔고 또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롭다하시는 가르침 곧 전가된 의의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서는 교회의 개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루터가 명령하듯이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조항입니다(articutis stantis aut condentis ecclesioe).


그리고 이 교리를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반대하는 쪽으로부터 대개 도덕률폐기론자들, 사기꾼들이라는 악명으로 낙인을 찍히고 있으나 이 교리의 진리가 이 교리를 가르치는 목회자와 그것을 고백하는 신도들의 삶에 의해 비판을 받는다면, 양쪽의 부정적인 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 쪽이 모든 면에서 유리하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이 교리도 다른 모든 은혜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일부 비그리스도교도들의 행실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 믿음에 의한 칭의 등에 대하여 말은 했으나, 결코 자신의 영혼 속에 그 의가 전가되었음을 느끼지 못한 사람의 행실이 그리스도의 적으로 하여금 그같이 모독할 수 있는 구실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불공정한 동시에 부당한 논증 방법입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전가된 의에 대한 이 교리 그 자체가 ‘선행을 방해하거나 방종에 이끈 적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아니다’라고 담대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어떤 원인으로부터 일(또는 행위)을 제외시킵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이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로서, 그리고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의 의롭다 인정받은 증거가 뚜렷함을 나타내기 위해 선행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전가된 의에 대한 교리가 어떻게 방종으로 이끌어가는 교리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모두가 중상모략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이단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단들만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기 자신의 영혼으로 체험해 보지 못한 자들이 계속해서 의의 교리를 반박하고 나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반박이 있음에도 본문의 선지자와 함께 우리는 당당하게 ‘주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그의 종들이 그를 모방하는 것을 염려할 것은 없다) 종종 자신을 빛의 천사를 꾸밉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도된 것들을, 이단과 아르미니우스파들이 사람들을 꼬드겨 말하게 할 것이다) 그들의 반론을 가장 돋보이게 하려고, 어떤 자들은 “우리 구세주가 그런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산상수훈을 보면, 그는 도덕만을 언급하십니다. 따라서 전가된 의의 교리를 아무 근거도 없습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반론을 내세우는 자들은 주의 복된 설교를 읽지도 않았거나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 자들입니다. 그 설교를 보면 전가된 의의 교리, 곧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다 인정하신다는 가르침이 아주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믿음의 경우를 아는 자는 그가 보는 눈이 있다면 그 말씀을 읽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께서 도덕과 선행을 권고하시고 (모든 신실한 목사님들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유식한 바리새인들이 첨가한 많은 거짓된 겉치례들을 제거하여 도덕률을 명백히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하시기 전, 주목되는 사실은, 그가 심령의 가난, 온유함, 거룩함, 슬픔, 마음의 깨함, 특히 의에 주리고 목마름과 같은 내적인 경건을 말씀하시고 나서, 그의 의를 전가받은 증거로서 선행을 권고하시며, 이 은혜와 신성하신 그의 기질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게 하시는 점입니다.


“너희 빛을 (즉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빛)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삶의 규칙으로서의 율법의 법을 빼앗으려고),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그것을 끝까지 지켜서 그 온전한 의미를 깨닫게 하려고)”(마 5:17),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도덕과 율법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전가된 의를 무효로 하는 대신 오히려 확인하심은 물론이요 착한 행실이 의가 우리의 영혼에 전가된 증거요 확증임을 밝히심으로서 앞에서 말한 반론을 반박하시기까지 하십니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선지자가 본문에서 ‘주 우리의 의라’하는 말을 들으십시오.


그러나 사단이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공격했을 때 성경을 인용함은 물론 성경 말씀으로 연속해서 시험했던 것처럼 사단의 자녀들도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대개 같은 방법을 씁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가된 의의 교리에 대하여 또 다른 반론을 펴면서 복음서의 청년을 보기로 내세웁니다. 그들의 반론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복음서 기자 마가는 10장에서 어떤 젊은이가 그리스도께 달려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든 그에게 율법의 계명을 언급하시면서 영생을 얻기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일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행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원인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가된 의의 교리는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최대한의 반론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논리의 전개에는 아무런 타당성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전가된 의의 필연성을 증명하려고 했다면 지금 이 젊은 청년의 경우보다 더 좋은 예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젊은이와 우리 주께서 그를 대하시는 방법을 좀더 면밀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7절을 보면 이 복음서 기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그는 귀족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께 달려온다는 것은 정말 아주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꿇어 앉아(이런 신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은 적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청년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변하시기 위하여 말씀하십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그 청년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입니다.


말하자면 영생이란 그의 행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께서는 그 청년에게 계명을 언급하시면서 반론을 펴는 자들처럼 그 청년의 도덕적 행실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을만하다는 생각을 조금도 심어 주시지 않고, 오히려 그 계명을 통해 그 청년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끄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청년이 자기 자신이 계명의 조목마다 어겼음을 깨닫고, 그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결과적으로 자기의 영생의 기반이 될 더욱 훌륭한 의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주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의 의도였습니다. 그 청년은 독선적이었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 인정하려고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자신을 알았더라면 그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어겼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실제로 간음을 한 적은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마음으로 한 여자에게 음욕을 품어본 적이 없었을까요? 그가 실제로 남을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아무 이유없이 화를 내거나 남을 헐뜯은 적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계명의 지극히 작은 것을 어겼더라도, 그것으로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율법이 하였음이라)”(갈 3:10)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관찰한 것 같이, 우리 주께서는 비난하기는커녕 그 청년에게 전가된 의의 필요성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를 그같은 방법으로 다루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셨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적인 사랑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며 동시에 이 청년은 예수님의 보혈에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염려하여 우시면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말씀을 알았더라면”(눅 19:42) 등의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본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이 청년을 사랑하신 사랑과 마리아와 나사로와 그의 누이 마르다를 사랑하신 사랑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참조, 요 11: 5, 13, 23).


이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공중예배 시간에 점잖게 행동하며 여러 면에서 겉으로 아무런 흠이 없는 생활을 하는 신자를 보면 그만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목회자가 그런 신자에게 느끼는 사랑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진실로 거듭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느끼는 영혼의 일체감과 동정심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족하지만 우리 주의 경우에 적용시켜 보십시오. 젊은이의 경우에 대하여 대개 무슨 말들을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편견을 극복하지 않고 이 반론을 편든다면, 여러분은 그 청년처럼 슬퍼하며 떠나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청년에게 답변하신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본문에서 “주는 우리 의라”고 한 주장의 진실성을 더더욱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더욱 큰 반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반론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취한 것입니다. ‘그곳을 보면 우리 주께서는 백성들에게 영생을 상급으로 주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린 자들을 먹였고 헐벗은 자들을 입혀주는 등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실이 그들이 의롭다 인정받게 된 원인이었으며, 따라서 전가된 의의 교의는 성경과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 본문을 바탕으로 주장된 의인의 교리를 반박하는 가장 그럴듯한 반론이라는 사실을 나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가장 명백하면서도 간략하게 이 반론에 대하여 답변하기 위해서는 영국교회 신조의 조항을 빗대어 고백하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곧 선한 행실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우리가 의롭다 인정하심을 입은 다음 그 열매로서 선한 행실이 뒤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행실은 그 자체가 상급을 요구할 수는 없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갱생된 심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보상이 아니라 은혜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한 행실이 많을수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오실 때 우리의 상급이 더욱 클 것입니다.


이 조항을 잘 살펴보면 반론에 대한 답변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태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임금이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상을 주리라. 너희가 이 모든 일을 나를 사랑함으로 하였고 이로써 너희가 나의 참 제자된 것을 증거하였느니라)”(마 25:34).


그러므로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이런 행실에 의하여 의롭다 인정을 받고 있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마 25:37-38)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의를 의존하면서, 하나님께 용인받고 죄 용서함받는 것에 관한 말과 질문은 전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대하여 다시 대답할 것입니다. ‘그 장 후반부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런 선한 행실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하고 내어 쫓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하신다면 선행하는 것 때문에 구원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전가된 의의 교리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사소한 도덕율일지라도 저버린 사람은 누구든지 당연히 정죄하실 수 있으나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반드시 상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계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들이며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으며 가장 거룩한 산 영혼의 언어가 되어야할 책임을 거의 이행하지 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방금 언급한 경건한 영혼의 틀입니다.


이 사실을 헤아려 볼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에는 너무나 무력한 존재여서 인간의 어설픈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행실을 하나님이 크게 상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낮 뜨거운 짓일 것입니다. 이 말을 ‘주는 우리의 의라’고 한 예레미야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내세우는 자들에게 의분을 느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전가된 의의 교리에 대하여 널리 제기된 당당한 반론들을 잘 반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답변을 중단해야 한다면 나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언제나 감탄했던 논증의 방법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이 방법이 언제나 논점 중 어떤 전제를 부인함으로서 생길 수 있는 불합리한 사항들을 보여주는 아주 납득할만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