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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우리의 의라 - 조지 휫필드 3/3

Joyfule 2019. 4. 24. 08:49


 

     주는 우리의 의라 - 조지 휫필드 3/3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인간의 일반적인 본성이나 그 개별적인 마음의 성향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의가 마음에 뿌리를 박은 마지막 우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모두 행위 언약 아래 태어났기 때문에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이런 행위 언약에 의지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비록 온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악마적인 자만심에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가톨릭교를 비난하고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지만, 우리 모두가 또한 가톨릭교도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모두 타고난 알미니안파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신조를 따른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공로의 교의를 거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선한 은혜라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어리석음에 곧바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아주 훌륭하게 관찰하는 것같이 우리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이리저리 ‘다니며’ 옛 바리새인들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서 난 의에 온전히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쓰라린 슬픔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일찍이 알려졌던 것 중 가장 흔한 죄악입니다. 어느 시대나, 특히 우리가 사는 이 형편없는 시대에 있어서 충분히 매도되지 않는 죄악입니다. 일반인들에 있어서나, 제사장들에 있어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가 하신 것 같이, 한때 진리를 드높게 설교한 강단에서까지.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경건한 조상들과는 달리 너무 타락하여, 은혜의 교리, 특히 모든 것을 넘치게 하신 예수의 인격적인 의의 교리를 너무 드물게 그리고 너무 가볍게 다루고 있는 상황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열렬한 믿음의 조상들이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다시 일어나 저들의 치명적인 잘못을 우뢰와 같은 음성으로 일깨워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천사들도 알아보려고 하는 큰 신비의 하나며,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이 가르치신 최초의 교훈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첫 조상들에게 입히신 옷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믿는자들의 마음을 공로에 돌리는 전형적인 사례들,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돌리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에게 입혀주신 옷은 짐승의 가죽옷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짐승은 사람의 식물이 아니었으므로 그 짐승들은 희생제물이 되었으며 그 뒤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큰 희생을 기념하는 예표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추측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잡은 짐승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입힌 옷은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하나님의 어린양의 의로 가려야한다는 교훈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여기시고”(창 15:6)라고 하신 말씀이 뜻하는 바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가 특히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주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에 대한 바른 견해를 다섯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Ⅰ. 주 여호와라는 말은 누구를 가르키는가?

Ⅱ. 주가 어떻게 사람의 의가 되는가?

Ⅲ. 이 교리에 반대하는 몇 가지 중요한 반론

Ⅳ. 이 교리를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이어지는 아주 심각한 결과의 몇 가지 예증

Ⅴ.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와 본문의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주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권고


Ⅰ. 나는 주(여호와)라고 말할 때 나오는 ‘주’는 누구를 가르키는 말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아리우스파나 소시니우스파 말장이들이 만들어내는 말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고귀한 피로 불쌍한 죄인들을 사신 주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부끄러움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주라는 이름으로 언급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 주(여호와)가 말하노라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주(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의로운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한다는데 모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의 본문에서 주라고 일컫는 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만일 성경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는 다른 본문이 없다 해도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만일 주라는 낱말이 본래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이심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여러 성경의 난외에서 보듯이 주라는 낱말은 본래 원어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본질적인 칭호인 여호와(한글 개역성경에는 주를 대부분 여호와로 밝혀서 읽고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파들은, "와서 하나님의 아들께 입 맞추고 그 앞에 엎드려, 너희가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듯이 그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를 참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천사들, 저 계명성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도 동정녀 마리아를 경배하는 자들과 다름이 없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리고 소시니우스파 "곧 그리스도는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이여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원리에 의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만일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는 육신의 팔일뿐이기 때문입니다(대하 32:8)". 그리고 ‘육신의 팔을 믿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자리에는 그런 괴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나는 이런 점들을 고려하고 나면 그들도 그같이 괴물같은 터무니없는 학설을 부끄러워서 감히 더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주라는 말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해야 하며, 그가 여기서 몸소 여호와라는 칭호를 취하시며 그러므로 그가 참 하나님 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는 바울이 깊은 믿음을 통해 표현하고 있듯이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 9:5)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Ⅱ. 어떻게 주께서 인간의 의가 되시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전가(imputation, 하나님이 의로 여기심, 창 15:6)에 의해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신 뒤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원부터 계신 지극히 높으신 분의 겸손하심은 너무나 크고 깊어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복종을 요구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과 죄 짓지 않고 복종하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불멸의 생명을 주시겠다는 조건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자기 자신을 즐거이 그 언약 당사로서의 책임을 지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그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순종하고 그 나무 열매를 먹지 않는다면 정녕 살리라는 사실을 추측해도 좋을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은 비통한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전해줍니다. 곧 우리의 첫 조상이 어떻게 이 언약을 깨뜨렸으며, 그 때문에 장래에 하나님의 영접을 받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것보다 더 훌륭한 의를 필요하게 된 과정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들은 무슨 일을 해야만 합니까? 그들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공히 행위 언약아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순종한 뒤로, 비록 힘을 잃었으나 그 일을 해야 함은 물론 모든 일을 계속하여 해야 할 책임이 있었으며 또한 주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대로 가장 완전하게 행해야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들이 이미 저지른 범죄행위로 말미암아 무한히 침해된 하나님의 공의를 보상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자(Divine Philanthropy)가 눈부시게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십시오. 사람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을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나타나기 위하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사람의 본성까지 입으셨던 것입니다.


그 사람의 본성을 통해 그는 복종하셨으며, 그로써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도덕률을 다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으며, 그로써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위하여, 또는 대신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만족하였고, 동시에 사람으로서 복종하셨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자, 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야 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온전하고 넘치는 의를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로움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단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인 동시에 수동적인 순종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말할 때, 후자 곧 그의 죽으심만을 언급할 뿐입니다. 그러나 전자 곧 그의 삶과 적극적인 순종이 똑같이 필요합니다. 이 두 요소를 함께 이해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합당한 구세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사셨습니다. 고난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또는 대신하여) 순종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연합하여, 우리의 첫 조상의 불순종이 전가되어 불순종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전가될 완전한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서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첫째와 둘째 아담을 비교한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이해시키고자했던 주 우리의 의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33장 16절에서 “그 성은(곧, 교회 자체) 주(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이 의가 그 성에 전가되어)”라고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과 모든 자녀가 가장 깊이 묵상해야할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타락한 자들의 교만한 마음에 뿌리를 내린 많은 반론들이 이렇게 온전하고, 이렇게 거룩하며, 이렇게 영혼 구원의 양식이 되는 교리를 잇달아 비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