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성수와 십일조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교회를 다니다보면 위 칼럼의 제목과 유사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주일성수는 안식일 준수의 십계명에서 나온 것이고 십일조도 성경의 명령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이 얘기를 좀 하고 싶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3~18)
위의 성경구절은 서로 충돌하는 말씀을 하시고 계신 듯하나, 사실은 같은 의도의 말씀을 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구약의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이유가 없을 것이다. 구약의 계명으로도 온전한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에 의인이 없다는 말(롬3:10)로 이를 대신하고 있다. 또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일 뿐이지, 죄를 해결해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이다. 그러나 여전히 구약의 율법 중에서 자신의 지목하는 계명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그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온전히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면서 혹세무민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이 가장 많이 주장하는 것이 주일성수와 십일조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안식일 준수와 주일성수가 같은 의미인가?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지는 시각부터 토요일 해가 지는 시각까지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 쉬어야 한다는 계명이다. 그러나 주일성수는 일요일에 교회에서 시행하는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을 골자로 하여, 아무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덧붙이고 있다. 그들이 주일성수가 안식일준수의 정신을 계승하였다면, 교회에서의 예배의식에 꼭 참석하는 것을 조건으로 붙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구약시대에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아니다. 그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예배형식으로 바꾼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회당예배는 구약에서 명령하는 계명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일성수가 안식일 준수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말이 될까? 안식일을 온전하게 지켜야 한다면 제7일 안식일교회처럼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지, 왜 주일로 바꾸어야 하나? 필자가 주일성수가 비성경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일성수를 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어서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3:3)
위의 로마서의 ‘예배’를 번역한 헬라어는 ‘제사’라는 의미의 ‘라트레이아’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예배는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제물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법은 이미 구약의 율법으로, 신약시대에 폐지되었기 때문에 예배라는 말로 번역한 것이다. 또한 빌립보서의 ‘성령으로 봉사하며’에서 ‘봉사’라는 의미는 제사라는 의미인 ‘라트레이아’이다. 그래서 영어성경(NIV, KJV ,NASB)에는 ‘예배’라는 뜻인 ‘worship’으로 번역했다. 말하자면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의미 역시, 성령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리는 삶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주일에 교회에서 시행하는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이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지나가던 개가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주일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필자도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필자가 말하는 의도는, 주일성수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다는 얘기일 뿐이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11:42)
또한 십일조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말하는 대목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신약시대가 되자 제사법이나 음식법 등의 구약의 율법들은 폐지가 되었는데, 예수님은 의로움과 자비를 행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십일조 준수도 명령하셨다. 그 이유는 십일조의 제정에 대한 성경의 뿌리를 알아야 한다. 원래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 아니었다. 십일조의 효시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포로로 잡아간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을 쳐부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환영하러 나온 자리에서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린 사건이다. 당시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는 고대사회의 관행이었다. 십일조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굳어진 사건은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여정에서, 꿈에서 하나님의 진을 보고 하나님께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주신다면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맹세를 한 사건 때문이다. 야곱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자, 후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족장이 된 아들들에게 유언을 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십일조준수가, 어떻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율법이 되겠으며, 구원의 필수조건이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십일조 준수를 명령하셨을까? 그 이유는 십일조의 최우선적인 사용이, 당시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 같은 극빈층의 구제로 쓰인 용도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지파의 생계비나, 성전의 관리와 제사에 필요한 용도도 포함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십일조의 용도가 가난한 이들의 구제를 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통로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일조의 준수를 명령하신 이유이다. 그러나 십일조 준수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가? 솔직히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지도자들이 성경대로 십일조를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가장 우선적으로 강조하신 구제로 사용되는 돈은 전체헌금의 3%도 되지 않으면서, 십일조를 거두는 데는 혈안이 되어있는 게 기이하지 않은가? 십일조를 내지 않는 교인들이 구원을 못 받는 게 아니라, 성경말씀을 앞세워서 탐욕을 채우는 목회자들이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은 내용까지 구원의 목록을 만든다면, 예수님이 콕 집어서 구원의 조건으로 말씀하신 거룩한 성품의 변화나 성령으로 거듭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덮어두는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구원받는 조건을 채우는 교인이 되려면, 교회공동체에 자주 모여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삶에 적용하려고 애쓰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십일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며, 재물을 포함한 우리의 소유물도 죄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재물이 가족들의 생계비와, 의로운 열매를 위한 씨앗인 구제와 선교비용으로 사용되게 해야 할 것이다.(씨와 먹을 양식참조, 고후9:10) 그러나 반드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드려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자의 저의를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 다음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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