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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게 사는 것이고, 사는 게 죽는 것이다.

Joyfule 2015. 4. 17. 07:58

 

   죽는 게 사는 것이고, 사는 게 죽는 것이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는 라틴어로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말이다. 이 말의 유래는 로마의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을 박해하기위해 로마시내에 불을 질러놓고, 그 죄목을 기독교인들에게 씌워 죽이려고 하는 사건에서 유래되었다. 시내가 불에 휩싸이자, 수많은 사람들이 불길을 피해 로마를 빠져나오는 가운데 베드로도 그들 무리에 있었다. 그 와중에 그는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경악한다. 예수님은 그들이 도망쳐 온 로마시내로 발길을 향해 있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한 말이 바로 쿼바디스 도미네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도망쳐 나온 그곳으로 간다고 하시면서 들어가시자, 베드로는 교인들을 버리고 로마를 떠나려 한 죄책감에, 다시 로마로 들어가 순교하였다는 일화이다.

 

아시다시피, 초대교회는 로마와 유대인의 박해를 받아 수많은 교인들이 고향을 등지고 가족과 헤어져 뿔뿔이 흩어졌다. 재산을 빼앗기고 그간 누렸던 기득권을 포기하였음은 물론이다. 더러는 잡혀 잔혹한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부지지수였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톱으로 토막이 나고, 참혹한 사건을 구경하고자 사람들을 모아놓은 원형경기장에서 사자 밥이 되고, 심지어는 가로등에 묶여져 화형을 당해 밤하늘을 환히 비치는 횃불로도 쓰였다고 하니, 그 잔혹함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그들의 순교가 없었다면, 당신은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 지옥에 던져졌을지도 모른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4,25)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8,39)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사항은 간단명료하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며, 기꺼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게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님의 명령이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으려면, 눈을 지그시 감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당신은 교회를 잘못 찾아온 것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해 교회 예배의식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으며, 생명보다 귀한 돈을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으로 쾌척하고 있으며,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하다시피해서 교회봉사를 하고 있으며, 끊임없는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과 전도행사에 동원되고 있으며, 담임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종하고 있는 게, 그 증거라고 말한다. 그런가? 물론 그런 희생적인 행위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신의 희생적인 신앙행위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허접 쓰레기 같은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마치 우리네 조상들이 유교의 제사행위를 하느라고 엄청난 돈과 시간을 소비했지만, 그게 아무짝에서 쓸모없는 짓이었음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교회의 예배의식이나 엄청난 헌금,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기도회에 나오고 전도행사에 참여한 게, 마치 유교의 제사를 드리면 조상들이 나타나 자손들에게 축복을 내려준다는 미신 따위를 철썩 같이 믿고 재산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은 그런 희생적인 신앙행위와 예배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먼저 드리라고 했다. 그게 바로 쉬지 않는 기도와 말씀의 영적 습관을 들여,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네 교회는 그런 영적 예배와 성령이 내주하는 삶에는 관심이 없이, 형식적인 예배의식과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최근에 불거진 종말론에 대한 크리스천들의 태도이다. 종말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베리칩을 증거로 들며, 이게 바로 계시록에 나타난 종말의 증거로서 베리칩이 666이라고 해석하며 이를 피부에 심으면 지옥에 간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다. 그뿐 만이 아니라 갑자기 성령으로부터 예언을 받았다는 사람이 나타나 전쟁설을 퍼뜨리고, 북한의 땅굴이 발견되었다는 소문과 겹쳐 사람들이 두려움에 휩싸여 전전긍긍하고 있다. 다행스럽게, 12월 전쟁설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앞으로 제2, 3의 예언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지도 모르다. 사실 종말론자들은 종말의 환란을 피해 아마존에 그들의 피난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필자의 기도훈련생이 다니던 교회의 목사는 전쟁설이 파다할 때, 일부 교인들을 데리고 필리핀으로 가서 피신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종말의 환란을 피해 자신의 목숨을 구할 궁리를 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게 하나님의 뜻인가? 그렇다면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도망치거나 아예 잠적을 해서 박해가 없는 곳으로 가서 숨었어야지, 왜 박해지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 어리석게 잡혀서 모진 고문 끝에 살해당해 순교자가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해답이 바로 퀘바디스 도미네이다. 모든 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로마에서 도망칠 때,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불이 활활 타는 로마 시내로 뚜벅뚜벅 걸어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영혼이 살려면 육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누구나 죽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는 것을 두려워말고, 순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마땅하다고 명령하시고 있다. 우리네 조상들은 신사참배를 할 때 목숨을 구걸하고 살아남았다. 그 당시에는 일본종교의 신을 모신 신사에 참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배를 드릴 때도 일본종교의 신에게 절을 하고, 그 신이 예수님보다 더 위에 있음을 고백해야 했다. 그렇게 해방이 되고도 우리네 교회는 아무도 신사참배의 죄악을 회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사참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후손들이 WCC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위해 목숨을 버릴 생각이 없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숨을 구걸하며 잘 먹고 잘사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들만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렇게 종말이 두렵고 환란에서 도망치고 싶은가? 그렇게 목숨을 연장시킬 수는 있는지 몰라도, 당신이 천국에서 얼굴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필자역시 목에 칼이 들어오는 상황이 되어서도, 지금의 주장을 할지 자신은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은 분명하다. 필자의 의지로는 자신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다면 가능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담담하게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출처 : 다음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