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신앙고백서
(1) 말부르그 신조
1529년 독일 황제 빌립의 소집으로 말부르그 회담이 모이게 되었는데, 이 회담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이 로마 카톨릭의 위협에 맞서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모인 회담이었다. 회담 결과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위격, 이신칭의, 세례, 선행들, 신앙고백, 세속권위 같은 교리들에 관한 전반적인 의견 일치를 표명한 15개조를 공포하였다. 그러나 , 제 15항의 성만찬에 관해서는 완전 일치를 보지 못함으로 결과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2)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The Confession of Augsburg)
1530년 황제 칼 5세가 소집한 독일의회에 제출되었던 루터파 신앙고백이다. 작센선후 요한이 루터, 요나스, 부겐하겐, 멜랑히톤 등에게 의회에 제출할 프로테스탄트 신앙요약문을 작성토록했고, 멜랑히톤이 기초하고 루터가 동의하여 제출되었다. 내용은 전반부 21개조에서는 루터파 기본 교리를, 후반부 7개조에서는 잘못된 교회 풍습을 지적하였다. 1531년부터 인쇄해 반포하기 시작한 이 신앙고백은 비텐베르그 협정(1536), 슈말칼텐 협정(1537)에서 채택되었다. 독일 대부분의 개혁교회들은 40년 멜랑히톤이 수정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공식 채택하였다.
(3) 테트라폴리티안 신조(Tetrapolitiana Confession)
이 신앙 고백서를 작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신학자는 마틴 부어이다. 루터파의 교리와 특별히 성례에 관해서 다른 입장을 나타냈다. 이 신앙고백서의 명칭이 Tetrapolitiana가 된 것은 작성한 신학자들이 남부 독일의 네 도시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1530년에 작성하여 황제에게 먼저 바쳐졌으나,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4) 헬베틱 1차 신조(The First Helvetic Confession)
개혁주의 교회가 채택한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서이다(1536).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에 의해 라틴어로 작성되었으며, 성만찬에 있어 단순한 기념설을 영적 임재를 강조하였다. 주로 스위스와 남부 독일의 교회로부터 파송된 대표들의 참여로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다.
(5) 헬베틱 2차 신조(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년에 채택된 이 신앙고백은 쯔빙글리의 제자 불링거(1504-1575)에 의해 The First Helvetic Confession의 연속으로 작성되었다.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 다음으로 유럽에서 개혁교회들에 의해 가장 널리 사용된 신앙고백으로 반카톨릭적이면서 루터파에 의해 가장 널리 사용된 신앙고백으로 반카톨릭적이면서 루터파에 대한 온건하고 화해적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신앙고백의 요지는 개혁주의 신앙이야말로 모든 시대의 참 보편적 신앙과 가장 조화를 이루며 성경에 근거한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적 오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개신교의 근소한 차이점에 대하여 관용적인 특색이 있다. 서문에서 불링거의 사위되는 심러(Josias Simmler)는 비록 제2차 신조가 1차 신조와 조금 달라지긴 하였어도 보다 발전적이며 어디까지나 성경에 기초한 사실을 강조함으로서 신앙고백의 점진성을 강하게 비추었다.
(6)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hechism)
1562년 올시누스와 하이델베르크 민간 권위자들에 의해 주의 표준적인 교리와 교회 종교 교육의 문서로 제정되었다. 후에 돌트회의에서 시인된 이 요리문답은 미국 개혁 교회와 독일, 화란 개혁 교회들에서 현재 받아들이고 있는 표준교리이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채택 이전에 스코틀랜드에서는 자녀 교육용으로 사용되었고, 미국 통합장로교회 1870년 회의에서도 이 요리문답을 받아들였다.
(7) 영국 교회의 39개조(The Thirty-nine Articles of the Church of England)
크레머 주교이 주도로 1552년 작성된 42개조의 종교 규범을 파커 대주교 등이 39개조로 정비하였다. 이것은 상하원에서 재가되었으며, 1563년 왕의 권위로 출판되어,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이들의식민지와 미합중국 감독교회 교리규범이 되었다.
(8) 돌트 신경(The Canons of the Synod of Dort)
알미누스 제자들에 의해 논쟁하게 된 문제들을 바로 잡으려고 화란의회가 소집하여, 1681년에서 1619년까지 돌트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스위스, 영국, 독일에서도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고문으로 참석했으며, 철저한 칼빈주의자 보게르만이 의장으로 대회를 진행했다. 여기에서 채택된 돌트 신경은 무조건적 선택, 제한된 속죄, 인간의 전적인 타락, 거역할 수 없는 은혜, 성도의 최종적인 견인을 확인하였다. 이 신경은 정확하고 권위있는 칼빈주의 신학의 표현으로 모든 개혁교회들이 받아들였다.
(9) 웨스트민스터회의의 고백과 요리문답(The Confession of the Westminster Assembly)
이 회의는 영국 장기 의회의 결의로 소집되었으며, 1634년부터 1649년까지 열렸다.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영국과 스코틀랜드 청교도들의 교리적 통일 및 대륙의 개혁파 교회와의 연결을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1647년에는 영국에서 49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인준을 받았다. 1658년 크롬웰이 소집한 ‘회중의회’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와 요리문답의 교리를 입증하여 그것과 유사한 사보이 선언문을 만들어 그들의 성명서로 채택하기도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대소요리문답과 함께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 및 세계 여러 나라의 회중교회 뿐만 아니라 모든 장로교 단체들의 교리 규범이 되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됨과 동시에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을 교회의 표준서로 채용하였다.
(10) 티그리누스 고백서 혹은 취리히 고백서(The Consensus Tiguriuns or the Consen년 Zurich)
이 고백서는 성만찬에 관한 문제들만을 26개조로 다룬 것으로 존 칼빈이 기록한 것이다. 1549년에 성만찬에 관하여 개혁교회 내 모든 교파들 사이에서 일치된 합의를 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취리히, 제네바, 삽하우센, 그리센스, 뉴사텔 그리고 바젤의 교회들이 동의하였다.
(11) 제네바 고백서(The Consensus Genevensis)
존 칼빈의 주도로 1552년 제네바 목사 이름으로 쓰여졌다. 이 고백서는 스위스 교회들이 예정의 교리 위에서 연합하기 위해 쓴 것으로 예정론에 관한 칼빈의 모든 진술이다.
(12) 헬베틱 일치 신조(The Formula Consensus Helvetica)
프랑스의 소뮈르 학파에서 가르치는 교리들에 대항하기 위해, 1657년 취리히에 있던 존 헬리와 하이데거에 의해 쓰여졌다. 이 신조에는 “만인의 은혜의 교리, 그와 관련된 교리들과 다른 관점에 대한 헬베틱 개혁교회이 동의 형식”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것은 개혁교회 고백서 중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완전한 고백서라고 일컬어진다. 서문과 26개 조항의 교령들로 이루어진 내용 가운데에는 엄격한 칼빈주의와 소뮈르 학파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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