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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론 - 조지훈

Joyfule 2015. 2. 2. 18:40

 

 

 

지조론 - 조지훈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기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지도자, 배신하는 변절자들을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 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들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 정당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과 명리(名利)를 위한 부동(浮動)은 무지조로 규탄되어 마땅하다고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 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직업정치인보다 지사 적 품격의 정치지도자를 더 대망 하는 것이 국민전체의 충정(衷情)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지사정치라야 국운이 회복된다 염결(廉潔)한 지사정치(志士政治)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唾罵: 침을 뱉고 욕을 퍼부음)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 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를 장사꾼 적인 이욕의 계교(計巧), 음부(淫婦)적 환락(歡樂)의 탐혹(耽惑)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의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서 이미 시대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와 홀아비가 개가(改嫁)하고 재취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막아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나 환부(鰥夫,홀아비)가 사랑하는 옛 짝을 위하여, 또는 자녀를 위하여 개가나 속현(續絃: 아내를 여읜 뒤 아내를 다시 맞음)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또한 잊지 않는다.

 

보통사람이 능히 어려운 일을 했대서 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本能苦)를 이성과 의지로서 초극(超克)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의 고귀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진작에 집어던지고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에나 붙어서 구복 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차여하여 꺼떡거리는 것이 자연의 일이지, 못나게 쪼를 부린다고 굶주리고 얻어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방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 문제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놓은 것이 분반한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 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 잖치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困辱)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자시(自尊自恃)을 위해서는 자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지조 매운 분은 기벽까지 있다. 신단재(申丹齊, 신채호) 선생은 망명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서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 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韓龍雲) 선생도 지조 때문에 여러 기벽의 일화를 낳았다. 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에게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들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 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다.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採根譚)의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힘도 없으면서 뜻 있는 야당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敎旨: 간사한 재주와 지혜)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란 뜻이 깃들어 있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의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체(主體)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 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는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비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 전선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 신념으로 일관하면 변절자가 아니다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의 치욕에 김상헌(金尙憲)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崔鳴吉)은 당시 민족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심양(瀋陽)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혀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변절자에게도 양심은 있다. 야당에서 권력에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失勢)한 사람도 있고 지금 요추(要樞)에 앉은 사람도 있으며,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 있는 사람을 대하는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 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란 것이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핑계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게 됐느냐 하는 그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은가. 양가(良家)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 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아래는 정경환의 고전산책 16] 지조론(조지훈) 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힙니다.--------------------

지조(志操)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 조지훈, “지조론(志操論) : 변절자(變節者)를 위하여”(조지훈, 《지조론》, 조지훈전집5, 나남출판, 1996, p.93)

(해설)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 누구인가? 인간과 세계에 단심(丹心)을 품고 끝까지 지속하는 이 누구인가? 이런 의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 본다. 사랑한다고 해놓고 언제 그런 말은 했는지 어느새 서로 증오한 채 헤어진 이들을 우리는 늘 목격한다. 조국을 위해 일편단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이, 역사 속에는 수없이 나오지만 오늘날 목도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이 설정한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 일생 동안 올곧게 그 가치대로 사는 이, 보기가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변하고, 사람의 가치도 변하고, 사람의 생각도 변하는 것 같다. 우정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지만 오늘날 물질만능의 시대에 진정한 우정과 진정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진정한 우정과 진정한 우정은 대상은 다르지만 상대에 대한 온전하고도 완전한 믿음을 전제로 하여 성립되는 가치덕목이다. 그런데 과연 현실에서 상대를 전적으로 믿는 이 만날 수 있는가?

 

꿈속에서는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나 어려운 연목구어(緣木求魚)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적 아픔을 예견하듯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인 조지훈은 위의 글에서 지조론을 펼치고 있다. 그는 지조를 “순일한 정신을 지키는 불타는 신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참 멋있는 표현이다. 자신이 설정한 가치와 정신을 지키려고 하는 그 신념과 투쟁이 없이는 결코 지조있다는 말을 하기 어렵다. 위의 글을 보면서 지조의 참된 뜻을 되새기게 된다.

*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은 박두진, 박목월 시인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국민시인이자 사상가이다. 그가 남겨놓은 대표적인 저서는 [한국문화사서설]이 있다. 그와 교유했던 많은 이들은 그가 두주불사하면서 사람들과 거침없이 대화하기를 좋아했고 막힘이 없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의 사후에도 애송되고 있다(정경환의 고전산책 16, 지조론(조지훈),작성자 산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