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관 자료 ━━/박 신목사

진짜 오직 예수인가?

Joyfule 2016. 11. 17. 08:41

 

 

   진짜 오직 예수인가?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60-62)

 

하나님은 몰라도 예수는 못 믿겠다.

 

전도를 하다보면 자신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았고 설령 죄를 지었다 해도 죽을 만큼 죄인은 아니라고 잡아떼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간혹 구원이 필요하다고 수긍해도 꼭 십자가 구원이어야만 할 이유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왜 아무 선행도 하지 않고 로마 사형수였던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교리를 납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작 문제는 교인들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꽤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 믿는데 예수님에 대해 잘 납득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온전한 하나님으로 믿습니까? 믿는다면 어째서 예수님이 하나님인지 그 이유를 남들에게 확실히 설명할 수 있습니까?

 

흔히들 예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하나님 되심의 일차적 근거로 듭니다. 물 위를 걷고, 폭풍우도 말씀 한마디로 잠재우고, 중풍병자 장님 등을 고치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죽은 자도 살리고, 마지막에는 당신 스스로 사흘 만에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본문에도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당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한 대로 어김없이 되었습니다. 도무지 인간으로선 상상도 못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적 기사를 지어낸 이야기라고 반발하면 더 이상 이야기가 진전되지 못합니다. 현대 첨단 과학조차 아직도 치료하지 못하는 불치병을 말씀 한마디로 완치시켰다니 긴가민가하지 않습니까? 거기다 지금도 의술의 도움 없이 주술, 기도 등으로 불치병을 고치는 능력자도 가끔 있으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잘 실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제자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립니다. 그분의 초자연적 출생과 죽음은 물론 이적은 어차피 사람들이 믿지 않으려드니 변증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인 증거를 제시하려면, 아니 우리라도 확신을 가지려면 조금 다르게 성경에 접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네 복음서의 예수님의 자리에 역사상 있었던 위인들을 전부 대입해 보십시오. 과연 성경의 주인공으로서 그 모든 내용을 만족시킬만한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구약 성경의 예언을 온전히 충족시킬 자 아무도 없습니다. 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고 감히 선포할 수 있는 인간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그분이 자기를 세상에 보냈으며, 오직 그분이 시키는 일만 하며, 심지어 그 아버지 하나님을 자기가 세상 앞에 보여준다는 것은 미친 자거나 진짜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지 않습니까?

 

더 실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전한 가르침을 100% 충족시키며 살았습니다. 우리 중에 “자기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또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는데도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있을까요? 반면에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는 당신 말씀대로 세상의 죄인, 아니 당신의 원수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견뎠으며, 또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했지 않습니까? 정말로 그분은 우리를, 그것도 아직 죄 가운데서 당신과 원수 사이였음에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약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아니고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완전히 거룩하고, 선하시고, 긍휼하신 분이었습니다. 지금껏 아니 앞으로도 어떤 인간도 그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 말 대로, 또 마음먹은 대로 삶을 이끌어 갈 수 없지만 그분만 달랐습니다. 자신의 뜻과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했던 역사상 유일한 분입니다. 속에서 거짓, 음란, 궤휼, 악한 생각, 어떤 것도 올라오지 않았던 분입니다. 일상적으로 늙어 죽을 때까지 죄를 짓는 우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죄와는 백 프로 무관하셨던 유일한 분이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침묵하신 의미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배반할 것을 예언했고 또 정확히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하나님이라고 본다면 너무나 가난한 해석입니다. 예수님께 그런 정도 능력은 진짜 식은 죽 먹기입니다. 정말 주목해야 할 사항은 바로 그 자리, 그 순간, 그런 상황에서, 어떤 비범하고 위대한 인간도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또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아무 말 없이 그윽이 베드로를 쳐다보신 것입니다. 우선 베드로에게 어떤 말이라도 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주위 사람들이 베드로도 나사렛 랍비의 제자인 줄 알고는 당장 붙들어 함께 재판에 회부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염려한 예수님으로선 너무나도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전혀 눈치 못 채게 아무 말씀이 없으셔야 했습니다.

 

물론 주님의 침묵에는 이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또 그 쳐다보는 눈길이 우리처럼 “봐라 내가 뭐라고 했니? 닭 울기 전에 세 번 배반한다고 분명히 경고했지? 그런데도 네가 지금 하는 꼴이 이게 뭐니?”라는 야단치는 뜻이, 혹은 “네가 나를 보호한다고 칼 들고 설쳐봐야 네 꼴이 겨우 그 모양이지 별 것 있어?” 식의 조롱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포함되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람은 눈으로도 수백 가지 의미를 전달할 수 있고 나아가 영적인 존재인지라 아무 제스츄어, 표정 없이도 마음먹은 바가 상대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습니까?

 

또 기본 양심이 있는 베드로로선 스승의 눈과 마주치지 않았어도 세 번 부인 후에 닭 울음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자기 잘못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스승의 놀라운 예지 능력에도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언컨데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런 잘못을 또 범했지? 나는 매번 성격이 너무 급해서 탈이야. 이번에도 스승을 목숨 걸고 보호하겠다고 큰 소리쳐놓고 이게 무슨 꼴이람!” 정도의 후회 내지 반성만 하고 치웠을 것입니다. 뛰쳐나가 속을 완전히 까뒤집는 통곡은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눈길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정죄는커녕 판단, 아니 재확인하는 의미도 없었을 것입니다. 야단, 힐난, 조소, 냉소, 방관, 포기, 등 그 어떤 부정적인 뉴앙스를 단 한치도 읽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따스함, 온유함, 긍휼함, 용서와 관용과 사랑은 물론이고 새로운 생명의 빛이 은은하고도 풍성하게 비춰 나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구체적으로는 느끼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런 큰 잘못을 범했어도 이전과 똑 같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 깨달았을 것입니다. 최소한 자기를 야단치는 대신에 용서하고 품어주셨다는 점만은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슴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용솟음치듯이 올라오면서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더 머물렀다가는 당장 들킬 것 같아 밖으로 뛰쳐나갔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과 함께 하신 성령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와 권능이 베드로에게 그대로 전해졌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로 하여금 통곡케 역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

 

복음서에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기사들이 간혹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는 말 한마디에 베드로가 배와 그물을 그 자리에 버려두고 스승으로 모시고 따라갑니다. 예수님께 고운 모양, 흠모할 풍채가 전혀 없었을 것임에도 그랬습니다. 성전에서 환전상과 제물 파는 자들을 주님이 야단치며 쫓아 낼 때에도 아무도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돈 버는 생업을 그만두라고 하는데 장사치들이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성 밖 벼랑으로 떠밀어 죽이려 했어도 그 사이를 헤치고 나왔습니다. 완력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을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말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세가 저절로 품어져 나왔다고 입증하는 예입니다.

 

당신께서 아무 말씀 하지 않고 있어도 도무지 보통사람은 아니라고 모두가 느꼈던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한마디에 재산과 생업 다 팽개치고 어디로 어떤 목적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가는지 묻지도 않고 따른다는 것이 상식으로 가당키나 한 일입니다. 그분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를 따라고 만났던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서 풍기는 이 놀라운 권세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거나, 어쩌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확실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최소한 생전 처음으로 너무나 평온하고 자유스러운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다른 랍비들과는 전혀 다른 권세 있는 가르침이며 또 그 가르침을 받으면 가슴이 뜨끔하고 찔리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는 그 권능 앞에 항복하거나 항거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인간관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만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영생이든지 영벌이든지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분과의 사귐에는 현실적 유익을 얻거나, 자신의 이름을 높이거나, 자기 일에 도움 받을 수 있는 인간 쪽의 이해타산이 절대 먹히지 않습니다. 오직 그분이야말로 자기 존재, 삶, 인생의 원천이자 능력임을 절감할 따름입니다. 그를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라면 그분의 향기와 빛을 세상에 비춰내기에 어떤 이에게는 죽음의 냄새를 어떤 이에게는 생명의 향기를 맡게 할 뿐입니다.

 

지금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전해져 오는 새 생명의 향기를 맡고선 옛 자아가 깨어짐으로써 통곡케 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 신비한 능력에만 주목하면 안 됩니다. 바로 그 순간까지도 베드로는 자신의 영적 실체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지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보다 더 정확하고도 완전하게 그를 꿰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사단에게, 정확히는 자신에게 자기가 의롭다고 속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구상에 있었던 모든 인간 중에 예수님만이 사탄에게는 물론 어떤 인간에게도, 아니 그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 유일한 분입니다. 바로 하나님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그분에 의하여 지음 받았습니다. 그분 앞에 무릎 꿇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만이 만물의, 특별히 인간이 이 땅에 생존해야할 목적입니다.

 

스승을 부인하는 윤리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추한 행위를 했음에도 베드로로 밖에 나가 통곡케 한 것은 인간으로선 최초로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게끔 하려는 당신의 일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베드로는 비로소 자신의 전 인격을 걸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영으로서 그분의 영과 접속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그 시커멓던 영이 이제 그분의 빛이 비춰짐으로써 비로소 깨끗케 된 것입니다. 그가 스승을 배반한 것 뿐 아니라, 지난 모든 죄가 이미 그 따스한 눈길로 인해 다 용서 받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통곡이 베드로 스스로의 반성과 결단에 따라 내 죄를 회개하오니 저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는 사랑을 가슴 가득히 받았기에 감사의 통곡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시커먼 속을 뒤집어 꺼내어 씻어내는 통곡은 자기 양심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부활 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심으로써 그를 용서해 주었지만, 실은 대제사장의 법정에서 사랑의 눈길로 이미 용서했다는 사실을 네가 기억한다면 입으로 시인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일대일로 만나지 않으면 이런 통곡이 나올 수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간섭으로 자기 속의 더럽고 더러운 실체를 진짜 발견해야만 자기 전 존재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회개가 가능합니다. 역으로 예수님을 실제 일대일로 만나면 이런 통곡을 할 수밖에 없고 또 그 인생이 이전과는 정반대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음을 깨닫고 속기 전의 모습 그대로 완전히 벌거벗고서 그분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그분이 가신 좁고 협착한 길을 머리 둘 곳이 없어도 기꺼이 따르게 됩니다. 그분을 닮고 싶으며, 그분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집니다. 또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의 성품과 하늘의 보배를 우리 속에 채워주시고 세상 사람들 앞에 절로 드러나도록 해주십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흔히들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완전히 의탁하라고 권면합니다.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그분만 바라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니까 물질이나 욕심만 죽이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일종의 무소유식의 삶만 추구하려 듭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이웃종교,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 사단에게 미혹된 자들이 추구할 수 있는 도덕적, 종교적 최고선의 일종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자는 그분께만 순종하는 성령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세상에서 풍성히 먹고 마시는 것이 인생의 우선 목표에서 제외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삶의 최우선적 의미와 가치가 됩니다. 한마디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 소원합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제 두 아들은 제가 교회 나가고 변화된 것만 보아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구주임이 증명된다고 말합니다. 착하고 거룩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만이 하늘 높은 줄 몰라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할 수 있는 양 큰소리치다가 절대 주권자 앞에 항복했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흉악한 죄인도 말씀 한마디로, 아니 지금처럼 말없이 쳐다만 보아도 겉과 속을 완전히 뒤집어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므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베드로도 하녀의 닦달에도 겁이나 스승을 부인했던 천하의 비겁자로부터, 십자가에 바로 달리는 것조차 스승을 모욕하는 것이므로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위대한 사도로, 주님은 그 눈길 하나로 바꾸셨지 않습니까? 당신의 짧은 생애의 행적과 가르침을 기록한 성경말씀을 이천년 후에 읽기만 해도 성령이 역사하면 그 인간을 완전히 뒤집어버리기에 그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그분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며, 그분을 아는 것이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감히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 시절의 저처럼 시쳇말로 "예수가 밥 먹여주나? 예수 믿느니 집에서 혼자 반성하며 의롭게 살겠다."고 큰소리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모욕하며 지옥 갈 죄가 되고도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진짜로 모르는 진리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모욕당하는 것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벌거벗고 달려 우리의 모든 수치까지 이미 다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를 모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혀 생기지 않기에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절대 맛보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당신께서 그들을 더 안타까이 여긴다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도 곧 십자가에 달리실 스승을 얼마나 안쓰럽게 바라보았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제자와 달리 스승에게 그런대로 의리를 지켰기에 스스로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베드로의 어리석은 영적 실체를 주님은 그의 안쓰러움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될 더 큰 안타까움으로 바라봤기에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이미 예수님의 이런 눈길과 마주쳐서 그분이 시키는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속과 겉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일생일대의 체험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젠 의롭다고 자신해선 결코 안 됩니다. 현실적으로 조금만 어려워도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무엇입니까?"라는 불평과 의심밖에 못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럴 때에 주님께선 베드로를 바라봤던 바로 그 눈길로 지금도 우리를 그윽이 쳐다보시지 않겠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느냐?"라고 말입니다.

 

"오직 예수!"가 종교적 수사나 구호로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존재, 삶, 인생 전부를 진짜 그분에게 온전히 거셔야 합니다. 그래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의 은혜와 권능을 날마다 실제로 누리시길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