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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란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정치인, 카이사르

Joyfule 2006. 9. 12. 05:31
"천재"란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정치인, 카이사르

 요약

Julius Caesar. 기원전 100- 기원전 44. 본명 Caius Julius Caesar.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가졌던 정치인 중 하나인 카이사르는 천재적인 언변과 문장력으로 군사와 정치인, 대중들을 휘어잡았다. 제멋대로의 성격에 엄청나게 잔혹한 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하는 일마다 성공을 거두는 신기에 가까운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다.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 동맹을 맺었다가 자신이 로마를 지배할 무력과 인기를 얻었다고 판단, 곧바로 군대를 몰아 귀족 원로원의 지배를 박살내고 종신 지배자의 자리에 올라 각종 개혁 사업을 진행한다. 그의 종신 지배는 사실상의 황제 권력으로, 로마를 영원히 황제 지배 체제로 바꾼 장본이기도 했다. 그는 문장가로도 유명해 그가 쓴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 등은 라틴 문학의 걸작으로 인정 받고 있다.

 

기원전 102년 로마의 별볼일 없는 귀족 집안에서 출생. (재왕절개 수술- Caesarean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무 근거 없는 전설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의 고모가 평민파의 수장인 마리우스와 결혼하면서 귀족들의 대표 집단인 원로원과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평민파의 수장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당대 최고의 맹장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어 7차례나 집정관을 지냈으나, 전장에서 부하로 함께 싸웠던 귀족 출신 술라에 의해 실각한다. 술라는 이후 수천 명의 정적을 살해하며 공포 정치를 일삼는다.

 

젊은 시절 군대 사절로 활동하다가, 술라의 사망 뒤 로마로 돌아와 변호사, 웅변가로 활약한다. 기원전 75년 그리스로 유학을 떠나다가 해적들에게 붙잡힌 적이 있었다. 해적들은 카이사르의 몸값을 20 탈란트로 해 돈을 벌려고 하자, 카이사르는 화를 냈다고 한다. "나를 모욕할 셈이냐! 50 탈란트로 올려라" 카이사르는 해적들을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겠다고 말했고, 몸값을 낸 뒤에 되돌아와 정말로 해적들을 죽이고 이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버렸다.

 

기원전 72년 군대 사령관으로 발탁. 이때부터 지중해와 아시아, 스페인에서 공적을 세우며 승승장구. 기원전 58년 당시 최강의 권력자였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함으로써 집정관의 자리에 오른다. 이때부터 이들 3명의 군인이자 정치인은 삼두정치 체제를 결성한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외동딸을 폼페이우스에게 시집 보내 정치적 연합을 강화시켰고, 뛰어난 웅변술과 군사력으로 권좌를 유지했다.

 

기원전 58년 갈리아 지방을 토벌. 그의 군사적 정복욕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정치적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군사적 명성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야욕의 희생물이 된 것이 갈리아였다. 그는 헬베티 족, 게르만 족, 벨가이 족을 연이어 대파하며 대부분의 갈리아 지방을 손에 넣는다. 이후 이 지방의 골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수년 간 무참한 살육전을 벌이며 갈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때의 살육으로 로마 권력자들은 카이사르를 극도로 경계하기 시작했고, 그를 반역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갈리아의 참극.

로마군은 식민지 지배를 언제나 무자비한 폭력으로 일관했다.

 

기원전 54년 고대 영국인 브리튼을 침공, (카이사르의 설명에 의하면) 이들의 요새를 함락시키고 압승을 거두었으나, 갈리아 지방으로 돌아갈 시간이 돼 온건한 조약만 맺고 돌아온다. 이때의 브리튼 원정은 카이사르가 자신의 정치 이력에 공적을 추가하기 위한 날조된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로마는 이후 100년간 영국을 다시 침공하지 않는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가 고대 이란 왕국인 파르티아를 침공했다가 재앙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고 권력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로써 기원전 50년 카이사르가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의 정치적 라이벌은 원로원과 귀족파 수장인 폼페이우스만 남는다. 그는 갈리아 지방에서의 참혹한 유혈극으로 원로원의 요주의 인물이 됐고, 가만히 있으면 실각할 위험이 있었다.

 

그는 수많은 전투를 함께 겪으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따끈따끈한 9개의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10개의 군단에 해상 지배권을 갖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해볼만한 도박이라 판단, 기원전 49년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군사 반란을 일으킨다. 군대는 폼페이우스가 더 많았지만 수많은 이민족 군대를 박살 낸 카이사르의 베테랑 군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카이사르 군대의 명성에 기죽은 폼페이우스 군대는 도망갔고, 카이사르는 수도를 장악, 로마를 수중에 넣는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는 역사적인 순간.

카이사르가 이 강을 건넘으로써 500년 로마 공화정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는 이집트로 도망갔던 폼페이우스를 살해하고 여기저기 흩어진 그의 잔당들을 끝까지 추격해 토벌한다. 기원전 47년 서남 아시아 지방에서 로마에 항거한 폰투스 국을 멸망시키며 그는 로마 원로원에 이렇게 전황 보고를 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

 

기원전 45년 폼페이우스의 마지막 군대를 섬멸하고 44년 로마의 종신 지배자의 자리에 오른다. 이는 로마 귀족 계급의 패배이자 500년간 이어져 오던 로마 공화정의 최후를 의미했다. 그는 명칭만 황제가 아니었지, 기존 원로원과 평민관의 권력을 자신 혼자 독점하는 사실상의 황제 노릇을 한다. (이후 로마는 다시는 공화정을 회복되지 못했고,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으로 발전한다.)

 

카이사르는 공화정의 전통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명분으로 황제가 되지 않았으나, 공화정의 지지자들은 그의 정치적 욕망을 용납할 수 없었다. 종신 지배자가 된지 두 달 후, 카이사르는 원로원 출신의 공화정 지지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암살된다. 독재자의 사망은 되려 로마 시민의 격한 분노를 불렀다. 독재자였으나 민중의 지지를 받는 개혁가이기도 했던 카이사르의 죽음은 시민의 폭동을 불렀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 반 카이사르 세력들은 로마를 탈출해 몰락하고 만다

 

카이사르의 최후.

기득권 세력을 몰살시키고 자신이 권좌에 앉았으나, 정치적 배신으로 그의 권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군인으로 입신 출세한 사람이었으나 비판과 토론에 개방적이었다. 대신 매우 제멋대로에 변덕스럽고 오만한 성격으로, 군대를 자기 취향에 맞는 곳에 주둔시켜 놓는 바람에 수많은 정적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실례로 폼페이우스를 기습해 죽이기로 해 놓고, 카이사르는 우쭐한 마음에 아예 기별을 보내 자신이 왔노라 알려 주기도 했다. 이집트에선 클레오파트라와 놀아나느라 폼페이우스의 정치 세력이 재결집할 시간적 여유를 주었으며, 아프리카엔 아주 어이 없는 수의 군대만 몰고 가서 몰살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는 이런 성격상의 결함을 화려한 언변과 설득력, 자신감으로 극복했다. 그는 군대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에게 승리의 자신감을 불어 넣을 정도로 엄청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워낙 활달하고 기지가 뛰어나 어딜 가나 인기가 넘쳤고, 누구든지 그의 말에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내란을 일으키고 공화정을 무너뜨리고도 정치적 탄핵을 받지 않은 것은 그가 대중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기는 여성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살아 생전 셀 수 없이 많은 불륜과 스캔들을 일으켰다.

 

지략적으로 엄청나게 우수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심사숙고하며 철저한 준비로 승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마다 천재적 기지를 발휘하며 적을 압도했다. 그는 항상 과격하고 성급했지만, 일단 길이 보이면 신속 과감하게 결정을 내리고 전광석화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권력을 위해 살고 죽은 사람이었다. 그는 권력이라는 목표를 위해선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비도덕적으로 변할 수 있었고, 권력이라는 목표에 훼방이 되지 않는다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인자하고 너그러울 수 있었다.

 

출처: 야후심리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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